
subject	가을이 가고 있다

　낙엽 밟고
　가을이 가고 있다
　남쪽 창밖의 정원으로 눈길이 멈췄다. 가을을 차려입은 선홍의 잎파리 하나가 정원 바닥으로 몸을 떨군다.
　감나무에 풍성하게 달려 있는 파란 잎사귀가 불그스레 변해가더니 마침내 미풍에 떨어지고 말았다.
　세상을 태울 듯 강렬했던 한여름 뙤약볕에도 짙푸른 녹색을 잃지 않았고， 먹구름 비바람이 천둥을 몰고 와 땅위에 벼락을 칠 때도 미동도 하지 않았던， 감꽃을 피워 태양 같이 둥글고 먹음직한 큰 감으로 만들기까지도 당당했던 그 늠름함이， 소슬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11월이 되자 어쩔 수 없이 낙엽이 되어 땅에 뒹구는 것이다.
　집 앞의 정원뿐만이 아니다. 출근길의 길거리마다 낙엽으로 뒤덮여 있다.
　쓸어내는 청소부의 일거리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이 불 때마다 우수수 낙엽은 소리 내어 떨어진다. 떨어진 잎새들이 산과 들과 도심의 아스팔트까지 온 세상을 덮고 있다.
　떨어진 낙엽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을 밟고 지나가는 사람 어느 누구도 발아래 밟힌 저 낙엽의 사연을 알지 못한다.
　알려고도 하지 않지만 알아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떨어진 낙엽의 안타까움은 그것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 가슴앓이를 다독여 주거나， 새로이 단장한 청계천 맑은 물에 띄워져 한강 너머 서해바다 멀리멀리 지구곳곳을 돌아보고 싶은 소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마침내 뒹굴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져 한 많은 사연을 안고 흙속에 묻힐 절망감에 통곡하는 안타까움만 간직했을 것이다. 제 아픔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은 사람이나 낙엽이나 같은 것이리라.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그을린 얼굴 가득히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농부의 기쁨을 생각한다.
　스산한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울적한 마음을 호소하는 여인들의 호들갑도 생각해본다.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지만 지금 오히려 남녀의 구별 없이 모두가 외롭고 쓸쓸해 보일 뿐이다. 뭔가 가득해지기를 바라며 산과 들을 서성이고 고뇌하는 사람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귀뚜라미의 울음도 그 소리에 구슬픔을 느끼는 이가 있고， 가을의 아름다운 교향곡으로 감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또，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을하늘이 유독 맑고 높다는 것은 어느 특정인의 느낌만은 아니다.
　가을을 품어안고 무게를 가누지 못해 고개 숙인 들녘의 벼이삭을 보고 수확의 기쁨을 노래하는 농부와， 겸손을 일깨우는 교사와，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종교인， 이렇게 한 가지 일에도 제각각의 느낌과 생각이 있다는 것이 비단 가을이 선물해준 특성만은 아니리라.
　시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낙엽의 아픔을 노래할 수 있겠는가.
　복잡한 세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가을을 마음껏 즐길 여유도 없다.
　줄줄이 엮여 주인을 기다리는 곶감 건조대의 감도 벌거벋거진 자신의 몸을 말리며 누구를 원망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로 산화되기를 기다리며 속살 을 드러낸 마지막 봉사의 마음을 내보이기도 하다.
　싹 내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그리고 낙엽으로 묻혀간다. 세상에 태어난 몫을 다하고 조용히 다가올 훗날을 기약하며 사라져가는 저 순응의 몸짓을 우리는 그냥 자연의 순리로 바라보고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일에 몰두하는 동안 가을은 낙엽을 밟고 또 저만큼 가고 있다.

이종기(시조시인)

15호 (200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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