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bject	어린 날의 초상화

사람은 누구에게나 되새기고 싶지 않은 삶의 부분이 있드시， 내 철없던 시절도 결코 되돌아 보고 싶지 않은 후회의 그 날들이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삶의 모퉁이에서 회한으로 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6개월 된 외손자가 있다. 어찌나 하는 짓이 예쁘고 귀여운지 하루라도 외손자 소식을 한두 번 듣지 못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다.
　3남매를 키울 때에는 쉬는 날이 되어도 안고， 업고 야외에 한번 데리고 나간 기억이 없다.
　그런데 외손자가 하루가 다르게 새록새록 크는 모습에 할아비의 마음이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라 했던가? 유년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와 지냈던 기억을 떠올려 본다.
　어린 시절 나는 어찌나 부산하고 장난기가 심했던지 동네 또래들의 짓궂은 일에는 언제나 앞장서는 악동이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 동네 꼬맹이들과 동네 골방에 모여 밤 가는 줄 모르고， 어른들이 깜짝깜짝 놀랄 일들을 만들어 내곤 했다.

　함박눈이 내리던 겨울밤이었다.
　밤이 한참 깊은 시간 문밖을 나서니 쌀가루를 흩뿌려 놓은 듯 하얀 눈이 발자국이 찍힐 만큼 쌓여 있었다，
　아이들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모퉁이를 막 꺾어 도니 우리 앞집의 사립문이 초저녁에 내린 눈보라 탓인지 활짝 열려 덜커덕 거리고 있다.
　그 틈 사이로 갓 짜 놓은 듯한 노란 빛을 띤 새 가마니가 눈길을 끌었다. 순간 장난기가 슬그머니 발동을 하였다.
　내일 아침 어제 짜 놓은 새 가마니를 법석을 떨며 찾을 앞집 아저씨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참 재미가 있을 것 같은 생각에 가마니를 끌고 간 자국이 눈길에 남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가마니를 우리 집 광에까지 옮겨 놓았다. 이튿날 아침， 어제 저녁의 일이 꿈속처럼 가물거렸다. 황급히 광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제 밤의 그 가마니는 없었다. 가마니를 끌고 온 눈길엔 아직도 선명한 그 자국이 남아 있는데 어찌 된 일일까?
　온 집안 구석구석 돌아보아도 어디에도 가마니는 없다.
　그렇다고 식구들에게 펴 놓고 지난밤의 사건을 고백하여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미제로 접어 두었던 그 일이 내 삶의 틈틈이 되살아 나지만 그 숙제는 아직도 풀 길이 없다.
　아마도 천방지축 뛰어다니며 동네의 온갖 말썽을 다 부리는 손자 녀석의 장난기를 눈치 챈 할머니의 배려 때문이라고 막연히 믿어 볼 뿐이다.
　내 심했던 장난기가 어머니의 마음을 건드려 강하고 정직한 아들로 키우려는 사랑의 회초리로 종아리에 겹겹이 피멍이 들 때도 할머니는 늘 손자의 편에 서서 어머니와 나 사이에 일어나는 감정의 골을 막아 서며 감싸시던 손자 사랑의 애틋함.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도 그 사랑의 포근함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새록새록 잠이 든 외손자의 고사리 손을 살며시 잡아 본다.
　손 끝에 따뜻한 정이 흐르고 있다.
　이것이 혈육의 정이구나.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분신인 나의 핏줄.
　철없던 어린 시절이 외손자의 얼굴 위에 겹쳐진다.
그리고 무한에 가까웠던 할머니의 사랑이 몹시도 그립다.
　할머니의 체온을 느끼듯 외손자의 새근거리는 숨결에서 아련한 세월의 저 너머 묻어 두었던 아픈 기억들이 새롭게 되살아 난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되새기고 싶지 않은 삶의 부분이 있듯이， 내 철없던 시절도 결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후회의 그 날들이， 이순(耳順)을 바라보는 삶의 모퉁이에서 아픈 회초리 되어 회한으로 내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삶이 마감되는 그 순간까지 묻어 두어야 할 나의 과오들이 할머니의 사랑으로도 덮어지지 않았다면， 외손자의 천진한 웃음 속에 살며시 묻어 보리라.
　새근새근 잠든 외손자의 얼굴이 좋은 꿈을 꾸고 있는지 방긋이 웃는 모습이 천사를 닮아 있다.

글/邦久(본명 김상환)
사진/이종기(사진작가)

10호 (200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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