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bject	복사꽃 붉게 피는 고향의 봄

　은행나무들이 죽은 듯이 길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습니다. 그림처럼 말없이 서 있던 가지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힘차게 들렸습니다.
　은행나무를 안고 있던 땅이 따뜻한 봄기운에 몸을 녹인 틈을 비집고 숨어있는 샘을 찾아 물을 길어 올리는 움직임이었습니다.
　넓은 길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차에서 뿜어내는 매연이 매캐하여 호흡을 방해하지만 은행나무는 싹을 틔울 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길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한여름 내리쬐는 태양의 따가운 볕을 가려주려고 잎을 내어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늘에 떠있는 태양이 이끄는 대로 순응하는 은행나무의 지혜를 배웁니다.
　6차선 넓은 도로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이며 그 일들 중에 안타까운 일도 많겠지만 은행나무는 불평을 늘어놓을 방법도 모르고 다른 짓을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일만을 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면 물돋기를 하고， 싹을 틔우고， 새순을 내고， 잎이 무성해지면 길가는 이들에게 따가운 햇볕을 막아주는 일을 하려고 땀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동차의 경적이 시끄러워도 매연이 숨을 막아도 지나는 사람들이 가끔 발길질을 해도 불평 한마디 없이 어떤 거부의 몸짓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여름 강렬했던 태양빛이 힘을 잃는 가을이면 은행나무 파란 잎들도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미풍에 우수수 떨어져 을시년스런 보도위에 뒹굴면 사람들은 은행나무의 한 해 마침은 의식하지 못하면서 노란 잎들이 서러워 가을을 책갈피에 간직합니다.
　잎이 떨어지고 1년의 삶을 마감한 은행나무는 그래도 '나는 1년의 생을 마치지만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하고 감사해.' 하면서 가지에 매어달린 노란 열매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내 소산들이 저렇게 많은 것이 더없이 기쁜 듯 지나가는 바람에게 미소로 화답하던 작년 가을을 생각합니다.
　설한의 고통을 감내하며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해 역경을 아무 말 없이 인내하고 있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낼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 자연의 섭리 앞에 고개를 숙입니다.
　일생이라고 하여야 불과 며칠 활짝 피어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시들어 버리는 잠깐의 화려함이지만， 이 몇 날을 위하여 356일 긴긴 날을 기다리며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꽃들은 불평하는 마음도 짧은 생을 거부하는 몸짓도 하지 않습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움을 느끼게 하였다는 자부심으로 오히려 감사의 생이었다는 겸허함만을 읽게 합니다.　 꽃들은 스러지면서 추웠던 겨울을 견딘 그 긴 세월이 잠깐 며칠의 개화를 선보이는 보람밖에 없었다고 억울해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름답게 보아주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꽃들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까， 탐욕으로 가득 찬 인간의 무지함이 그저 꽃에게 부끄럽다는 생각입니다.
　유채꽃 이 곱다며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 벚꽃축제를 보려고 진해에 모여드는 군항제의 인파， 철쭉꽃축제가 열리는 영주 소백산의 사람들， 서울의 윤중로， 창경궁 뜰에 발 들여 놓을 틈 없이 모여든 구름떼 같은 무리들.
　그 누구도 시샘바람에 날려 흩어지는 꽃잎을 보며 아름다움이 사라진 뒤에 오는 파란 잎들의 돋아남은 생각지를 못합니다. 가는 것이 있으면 오는 것이 있다는 세상의 이치에， 가는 것을 잡지 못하는 허무함도 또한 내 삶의 한 몫으로 지는 꽃에게 대범함을 배워가고 싶습니다.
　작년 4월 친구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낸 일이 있습니다.
　벚꽃이 활짝 핀 윤중로가 인파로 가득했던 4월이었습니다.

화려함을 시샘하던 바람은
꽃잎을 강물위에 띄우고
꽃잎 떨어진 벚꽃나무는
파란 싹을 내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활짝 핀 벚꽃처럼
화려한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식 키우며
꽃잎 떨어진 나무처럼
좋은 시절 꿈으로 접고
가지마다 파아란 싹을 내어 보내듯
이제 든든한 뿌리가 되어
가지를 받쳐주고
무성한 잎을 내어보내는
자식들의 기둥으로 남았습니다.

　길가에 개나리가 노오란 옷을 입고 만발하지만 숨어 있는 깊은 뜻을 우리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목련의 자태가 우아하다고 느끼지만 시들고 난 뒤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달래가 타는 듯이 붉게 산을 뒤덮어도 우리는 봄이 왔다는 계절의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느끼지를 못합니다. 꽃의 아픔을 당신을 알고 있습니까.
　영덕의 복사꽃 밭을 둘러보는 농민들은 꽃의 화려함보다는 꽃잎이 지고 난 뒤의 열매를 기다리는 마음만이 희망으로 남습니다.
꽃들의 봄맞이
글 : 이 종 기
<시조시인>
사진 : 정 운 봉

3호 (2005.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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