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나라의 재앙이 된다
제국의 정체성
미국제국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툭하면 팍스 로마나의 영광과 성공을 말한다. 그러나 미국과 세계와의 관계는 로마보다는 몽골제국에 가깝다.
칭기스칸은 몽골 초원에서 끊임없는 싸움을 되풀이하던 부족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민족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이 만든 대몽골 민족 혹은 ‘펠트 천막에 사는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유목민들이 사는 초원지대 너머까지는 닿지 않았다.
몽골인들이 정복한 초원 너머에 사는 강하고도 오만한 주민들은 자신들을 삼킨 제국에 협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중국문화를 끌어안고 중국 왕조를 세운 쿠빌라이나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중앙아시아의 몽골인들처럼 이방의 땅을 통치하던 몽골의 칸과 신하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문명화된 피지배민들의 정체성에 서서히 동화되어갔다.
몽골군은 세계에서 가장 막강했지만 결국 몽골제국은 문화적인 차이를 통합할 공통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다가 얼마 못 가서 4개의 큰 왕국으로 갈라진 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미국의 제국으로서의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범한 커다란 실수는 자유시장과 민주주의, 미국의 상품과 상표, 소비문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 공통의 가치관과 미국의 지도력에 대한 갈망을 만들어내면서 다름 민족들을 ‘미국화’할 것이라고 추측한 데 있다. 이런 추측은 해방된 이라크인들이 미군들을 꽃과 미소로 맞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만큼이나 순진한 것이다. 양키스 야구 모자를 쓰고 코카콜라를 마신다고 팔레스타인 사람이 미국인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성장하는 강국이 박해받는 사람들의 피난처로 자국을 개방하고 관용의 제도를 세계 모든 나라에게 본보기로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적인 패권 국가가 미국 시민권을 외국 주민들에게까지 확장하거나 그들과의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확립하려는 노력을 하는 대신, 세계의 다른 모든 나라들에게 자국의 관용의 제도를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자유시장과 민주주의를 포함한 서구적인 관용 정책을 수출하려는 미국의 최근 시도는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이자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실체로 여기는 수백만 사람들로부터 원망과 분노를 샀을 뿐이다.
2007년 BBC의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응답자의 51%가 미국이 세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변했고 미국에 대한 지지도는 북한, 러시아, 베네주엘라 등에 대한 지지도보다 훨씬 낮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북한이나 러시아, 베네주엘라로 줄줄이 이민을 가는 것을 상상할 수는 없다.
특히 몹시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미국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선망과 존경심, 한편으로는 깊은 증오심과 경멸감이 뒤섞인 모순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미국인이 되고는 싶지만 미국의 지배를 받기는 싫어한다. 그들은 미국인처럼 옷을 입고 미국인처럼 살고 싶어 하지만 미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을 수 없는 처지이다. 그들은 귀로는 미국이 자유를 상징한다는 말을 듣지만 현실에서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모습을 볼 뿐이다.
미국과 같이 민주정체를 가진 초강대국이 자신이 지배하는 전 세계 사람들과 정치적 연합을 이룰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그 방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정치적 연합을 이룰 의사가 있다면 미국은 국가적 정체성과 주권, 또한 초강대국이라는 지위까지 버려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미국은 이론적으로 세계의 모든 나라에 미국의 주가 될 기회를 줄 수 있다. 어쩌면 그 기회를 받아들이는 나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억의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미국시민이 된다면 미국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될 것이다. 정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미국은 이론적으로 국제법과 국제기구에 의해 통치되는 세계정부의 건설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 이 시나리오에서 초강대국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미국이 아니라 미국이 권력을 양도한 세계정부일 것이다. 이상주의자들은 이런 세계질서를 지지한다. 그러나 미국과 여러 세계기구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생각하면 이 시나리오는 비현실적이다.
사실 9.11 이후 미국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미국은 국제범죄재판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고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의정서를 외면하고 UN의 승인이나 전통적인 NATO 동맹국인 프랑스, 독일, 캐나다의 지지도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런 행동들은 결코 세계에서 미국의 입지를 향상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방주의는 민주정체를 가진 초강대국의 입장에서는 더더구나 곤란하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칭기스칸이 약한 나라에게 세계 문제에 관한 발언권을 줄 것이라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민주정체를 가진 초강대국은 세계 만민에게는 지구라는 사회에 참여하고 번영할 권리가 있음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된다. 미국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른 모든 나라들은 미국이 이 사실을 잊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미국은 어디로 가야 할까? 모순된 이야기같지만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노력을 중단하는 것뿐이다.
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은 외국 국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다. 미국은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정부를 전복할 수 있는 힘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해당 지역의 자원(예를 들어 이라크의 석유0을 강탈하거나 그들의 영토를 합병할 수 없다.
미국은 투표함, 본보기가 되는 헌법, 군사훈련, 무기, 수십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할 수 있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외국 국민을 미국인으로 만들 수 없고 그렇게 할 의도도 없다. 몽골제국 그리고 역사상의 다른 모든 초강대국들은 중앙 권력과 피지배민들을 결합해주는 공통의 정치적 정체성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런 접착제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미국 역시 과거의 초강대국들을 무너뜨렸던 적의 어린 분열을 극복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미국 제국이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지 어떻게 미국의 이익에 도움에 될지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 세계에서 군국주의 초강대국은 과거의 제국들이 얻었던 이득은 하나도 확보하지 못하고 돈과 사람만 잃고 정당성을 상실하고 증오심만 키웠다. 지금의 이라크는 미국 제국의 얼굴이다. 수십만에 이르는 미군 병사들이 고향에서 먼 곳에서 뚜렷한 승기도 없고 목표도 없이 전쟁에 갇힌 채 사방팔방에서 겨눠지는 증오심과 총구의 과녁이 되고 있다.
미국은 세계의 수십억 사람들과 공통의 목적의식, 혹은 공통이 정체성을 창조하고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의 리더십에 더 많이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인들은 세계정치에서 미국의 역할에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군사력만으로도 목적을 달성할 수 잇다는 부시 행정부의 태도 역시 신망을 잃었다. 그러나 미국은 세계적인 패권 국가이기 때문에 고립주의라는 사치를 누릴 입장도 아니다.
세계경제는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고(세계의 수십억 인구가 미국의 소비자, 공급자, 투자자, 노동자이다) 다른 나라들의 자주적인 통치권은 안정되어 있으며(아무리 초강대국이라도 자국의 의지를 직접적인 통치 방식으로 강요할 수 없다) 대량파괴무기는 손쉽게 운반될 수 있다.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만이 세계적인 문제들에 대해 주도적인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환경오염이다. 미국에서 아무리 좋은 오염 방지법을 만들어도 다른 나라들이 오존층을 파괴한다면 미국은 고통을 겪게 된다. 바람직한 결과를 얻으려면 모든 나라의 협조가 필요하다. 또한 오늘날 많은 문제들이 이와 비슷하게 국제적인 모습을 지닌다. 물자와 사람이 전례 없는 규모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조유독감과 같은 전염병에 한나라만으로 대처할 수는 없다. 물론 테러리즘 역시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미국은 이런 새로운 다자주의를 기회로 여겨야 한다. 만일 미국이 국제적으로 주도적인 입장에서 그 문제들에 대처한다면 미국은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민주적인 초강대국의 존립에 반드시 필요한 다른 나라들과의 연대감 즉 결속감과 공동의 목적의식까지 창조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패권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경쟁국들은 수많은 자체 문제에 직면하고 있지만 점점 가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으로서는 단순한 강국의 신분으로 복귀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이라 할 수는 없다. 결국 초강대국이 된다는 것은 역사의 이변이고 이득과 함께 희생까지 떠안아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미국이 건국 이후 성공에 성공을 거듭할 수 있었던 비결을 재발견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유혹을 뿌리칠 수 있다면 몇십년이 지난 후에도 세계의 초강대국, 그것도 강압과 군사력에 의지하는 초강대국이 아니라 기회, 역동성, 도덕성을 갖춘 초강대국으로 남을 것이다.
이석우
71호
2010.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