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가 결혼을 하게되면, 가정을 이루기 위한 생활공간이 필요하게 된다. 주택의 규모는 일반적으로 가족 구성원들의 문화수준과 비례한다. 문화는 공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공간이 없는 곳에서는 문화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는 주변이 바로 정서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서공간은 문화적으로 설치되어 있어야 각박한 현실생활에서도 예술을 창조하기에 편리할 것이다. 문단의 어느 중진은 서재에 책상이 세 개나 놓여 있다고 한다. 시 쓰는 책상, 소설 쓰는 책상, 수필 쓰는 책상을 별도로 두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생활에 주택이 필요하듯 개인의 육체도 최소한의 공간을 요구한다. 이것은 본능적인 욕구이다. 인간의 정서공간은 추상적, 관념적인 개념으로 존재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은 상상의 공간이지만 육체의 보호막이라고 할만큼 모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아니 될 중요한 공간이다.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중심으로 일정거리까지는 공간으로 비어 있어야만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개인이 본능적으로 원하는 정서공간은 같은 문화권에 소속된 사람들끼리는 대체로 비슷한 크기로 나타난다. 인간은 자기가 소속되어 있는 사회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과 풍속에 따라 개인의 공간이 형성되기 때문에 다른 문화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의 개인 공간과는 그 규모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디를 가드라도 <개인 공간>이라고 하는 이동 가능한 공간을 지고 다닌다. 개인공간은 달무리처럼 개인의 육체를 둘러싸고 있다. 다른 사람이 나의 공간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나는 불안과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와는 반대로 남들이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고독감이나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말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일정한 공간이 있음으로써 친밀감과 신뢰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생활 특히 도시생활에서는 개인의 정서공간이 파괴될 때가 많다. 버스 속이나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공간은 고사하고 신체가 접촉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경우 우리는 개인의 공간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도시인들은 개인의 정서공간이 자주 빼앗기게 되므로 대부분 성격이 까다로워지고 공격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심리적 반응이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서유럽 사람들의 정서공간은 대체로 <손가락 끝 거리(fingertip distance)>라고 한다. 이는 손가락을 펴고, 양팔을 벌려서 한바퀴 빙 돌면서 원을 그렸을 때의 크기이다. 동유럽 사람들은 서유럽 사람들보다 약간 짧은 <손목 거리(wrist distance)>이고, 지중해 국가의 사람들은 더욱 짧은 <팔꿈치 거리(elbow distance)>정도라고 한다.
어느 날 영국인들과 아랍인들이 파티에 함께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회식이 끝나고 상담(商談)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커피 잔을 들고 두 사람씩 심각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영국인들은 무의식중에 손가락 끝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 발씩 한발씩 뒷걸음질을 하였고, 반면에 아랍인들은 팔꿈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한 발씩 한 발씩 전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영국인들이 벽에까지 후퇴한 다음에 대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정서공간의 불일치로 인하여 상담 결과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한국인들의 정서공간에 대한 기록을 본 적이 없다. 아마 초가 삼간 작은 집에 많은 가족들이 옹송그리며 살았으니, 지중해 문화권의 팔꿈치 거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공간이 협소한 문화권의 사람들은 비밀이 많다. 귀와 입이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고, 그러한 습관은 비밀스런 대화로 발전할 것이다. 그런 사회는 사담(私談)이 많고, 정의롭고 당당한 웅변이 적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사회는 낮의 역사보다는 밤의 음모가 판을 치는 음침한 정치 행태가 조성되기 쉽다. 계파가 활개치고, 붕당이 득세하는 음험한 세력이 야합하여 엉터리를 당선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역사가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 우리 나라는 국민 소득이 많이 증가되었고, 정서공간도 무척 넓어졌다. 우리 모두 소득과 공간에 버금갈 정도로 마음의 크기도 빨리 바뀌기를 기대해 본다.
안명수_msahn38@hanmail.net
25호 (2006.6.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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