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오래 전의 일이다. 전 생애를 이 나라 교육계에 헌신한 모 대학총장 K박사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그 날도 가까운 친지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축복하는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몇 점 안되는 유품들을 애제자(愛弟子)들에게 나누어 주면서“이제 나는 영광된 하나님 품에 안기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고 한다.
평소 그분의 인품에 대해 존경의 염(念)을 금치 못하고 있던 나로서는 과연 그분다운 임종의 자세였구나 싶어 애통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성스러운 죽음이 부럽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진정으로 영광된 죽음이란 신이 내린 축복이라는 생각을, 두고두고 곱씹어보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국내에서 이름 있는 모 재벌총수 S회장도 숙환으로 별세하게 되었다. 그분 측근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임종직전에 온갖 몸부림을 치면서 내가 지니고 있는 전 재산의 반을 떼어줄 터이니 나를 살려줄 사람을 데리고 오라고 애걸복걸 하면서 죽어갔다고 한다.
S회장은 평소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기면서 먼 남해안에다 수중별장까지 지어놓고 온갖 향락을 누렸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다시없을 이 지상낙원을 버리기가 아까워 조금이라도 더 이 생활을 연장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성직자도 재벌도 아닌 나로서는 일찍이 거대한 꿈이나 특별한 사생관을 지녀 본 일은 없다. 하지만 이 대조적인 두 죽음을 보고서는 찬미와 허무감이 엇갈리는 가운데 무엇인가 택일(擇一)을 강요받는 듯한 야릇한 상념에 빠지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 있어서 죽음은 자기 인생의 총 결산이다. 아울러 자기 인생관의 마지막 결론이기도 하다. 아무리 한 인생의 서장(序章)이 화려하고 본장(本章)이 충실했다 하더라도 마지막 종장(終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한다면 모처럼 쌓아올린 빛나는 성공탑도 그대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위대하다고 여겼던 정치가, 애국자, 학자, 예술가들이, 삶의 마지막 마무리를 잘못하여 그 영광된 생애에 오점을 찍고 간 예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다.
그래서 그 인생의 공과여부(功過與否)는 관 뚜껑을 덮은 후에야 평가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생자(生者)는 필멸(必滅)하는 법, 타고날 때부터 생로병사는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거늘, 이를 무슨 재주로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천하를 다 얻었다고 자만하던 진시황도 자신의 영화를 더 연장해 보겠다고 많은 선남선녀를 뽑아 불사약을 구하러 보냈지만 끝내 무위(無爲)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이렇듯 숭엄한 섭리 앞에 좀 더 버티어 보겠다고 몸부림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차라리 그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편이 얼마나 떳떳하고 대범해 보이는가.
일찍이 공자는 나이 50이 되거든 천명을 알라고 설파했다. 젊어서는 뜻을 세워 학문에 정진하고 불혹(不惑)의 40대와 지명(知命)의 50대를 거쳐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해도 후회를 남기지 않는 종심(從心)의 삶을 살라고 가르친 것을 보면, 역시 성현의 통찰력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자의 K박사는 이미 천명을 알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함으로서 인생의 분수를 지킨 현자(賢者)의 모습이었다면, 후자의 S회장은 한마디로 말해서 부세영화(浮世榮華)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발버둥 치다가 숨을 거둔 한낱 필부(匹夫)의 죽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디 영생(永生)이 따로 있겠는가. 값진 죽음을 택한 자의 위대한 생애가 길이 우리의 정신 속에서 되살아난다면 그는 굳이 내세(來世)뿐이 아니라 이미 현세에서도 영생의 복락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와는 반대로 사리사욕만을 탐하다가 욕된 죽음을 맞은 사람은 그 생애 또한 오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수많은 충신, 열사, 의사, 지사들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 모진 형극의 길을 택하여 일신의 영화 따위는 초개와 같이 버렸겠는가. 그분들인들 왜 호강의 유혹이 없었겠으며, 부와 향락을 누릴 능력이 없어서 그 길을 택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작 그분들은 와신종사(臥身終死)하는 것마저도 오히려 욕된 죽음이라 여기고 주어진 천명마저 앞당겨 스스로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장자의 생즉사사즉생(生則死死則生)이란 말이 생각난다. 우리가 혼자 천만년 사는 것과 내 삶을 후신(後身)의 대(代)에까지 물려서 천만년 사는 것과를 비교하면 어느 것이 더 값진 삶인가는 자명해지리라 믿는다.
죽음은 바로 삶의 연장선상에서 맞이하게 되는 필연 법칙이다. 그래서 나의 죽음은 나 개인의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다. 내 영욕으로 얼룩진 생애의 마지막이 그대로 자손만대에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어찌 뜬 구름과 같은 영화 따위에 미련을 걸고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겠는가.
이(利)로운 것을 보면 먼저 의(義)로운 것을 생각하고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주라고 한 안중근 의사의 사생관이 오늘따라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소회는 아니리라.
김병권_bkkim31@hanmail.net
21호 (2006.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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