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에 지렁이가 운다.
찌르르 찌르르, 찌르 찌르, 찌 찌 찌‥‥‥ 찌르륵 찍‥‥‥
한줄기 소나기가 쏟아질 듯한 후덥지근한 여름날 밤에 지렁이는 애처로운 멜로디를 창조한다. 장독대에서 울고, 봉숭아 뿌리 밑에서 울고, 우물가에서도 운다. 냄새나는 구정물이 고여있는 하수구를 청소하며 지렁이는 더욱 슬프게 운다.
그 작은 환형동물이 지구를 부드럽게 만든다. 단단하게 굳어진 흙 속을 구석구석 다니면서 식물의 뿌리에 공기가 닿을 수 있도록 미세한 틈서리를 만들어 비료나 다름없는 배설물을 공급하여 땅을 기름지게 만든다. 지렁이는 땅을 뚫고 다니지만 두더지처럼 식물을 못살게 구는 법이 없고, 멧돼지처럼 난장판을 벌이지도 않는다.
지렁이의 철학은 정관(靜觀)이다. 녀석은 세상을 불평하지 않는다. 깜깜한 흙 속에 살지만 고통스런 처지를 불평하지 않고, 양지(陽地)를 탐하지도 않는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의 경지에서 체념하며 산다. 낙엽의 잔해(殘骸)와 섞은 흙에서 유기질을 찾아먹는 그 청렴한 생활은 오랫동안 고사리와 풀뿌리만 먹고살다 간 이제(夷齊)의 혼이 깃들어 있을 것만 같다. 백이 숙제처럼 살았던 청백리가 윤회의 탈을 쓰고 지렁이로 태어났을 수도 있으리라.
자웅(雌雄)동체인 지렁이는 음양기능을 다 가지고 있다. 짝을 만나면 서로가 정자와 난자를 주고받지만 혼자서는 정받이를 할 수 없다. 이런 연유로 그들의 세계에는 남성우월주의도 없고, 레이디 퍼스트(lady first)따위의 에티켓도 필요 없다.
이 나라에는 용(龍)이 많다. 청룡 황룡 흑룡 교룡(蛟龍) 잠룡(潛龍) 산신령룡 ‥‥ 경제개발시대에 우리 나라는 아시아의 4마리 용 가운데 하나가 되어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용 가는데 구름 가고, 범 가는데 바람 간다는 격언을 외치며 어깨를 으쓱거릴 만 했다. 그런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경제의 규모는 세계에서 11번 째 대국이 되었다. 지금 비룡(飛龍)이 되어 하늘 높이 날고있는 우리 경제가 어느 순간 땅바닥에 추락하여 지렁이로 변할 것 같아 두렵다. 지렁이를 두고 토룡(土龍)이라고도 하니, 지렁이도 용임에는 틀림없다. 사실은 토룡을 제외한 다른 용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동물이다. 진짜 용은 지렁이 뿐이다. 도롱뇽은 용이 아닐 것이고.
정치에 물든 패거리들은 여의주를 입에 물고 구름 위로 비상하는 용을 꿈꾸며 거들먹거린다. 정치 판에 뛰어들어 허풍을 떤다. 돌아서면 밝혀질 거짓말을 밥먹듯 해대고, 무식한 정견(政見)을 고래고래 외친다. 한 마리 용이 되겠다고‥‥정치깡패들이여, 재발 허황된 용의 꿈을 버려라. 땅 밑에서 고독을 삼키며 굳은 땅을 비옥하게 일구는 한편, 밤마다 애잔한 노래를 불러 가난한 백성들을 고이 잠들게 하는 토룡의 진실만 배워라. 서양에서는 용을 두고 사람을 해치는 나쁜 괴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았으면 좋겠다.
수백만 마리의 지렁이가 울산광역시 북구 주민 14만 3천여 명이 쏟아내는 음식 쓰레기를 처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울산시 북구는 음식물 찌꺼기를 비료로 만드는 시설을 본격적으로 가동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원화 시설은 959평의 땅에 연면적 283평인 2층 건물. 시설 안에 쓰레기를 잘게 부수는 분쇄 시설, 물기를 빼는 탈수 시설, 숙성시키는 발효 시설 등이 있지만, 가장 핵심 시설은 지렁이와 흙 6ｔ이 수십 개의 칸막이로 나뉘어 담겨 있는 지렁이 사육장이다. 이제 지렁이는 발효시킨 쓰레기를 먹고 분변토(糞變土:비료)를 생산해 내는 연금술사가 되었다. 지구를 오염으로부터 구해 줄 최후의 결사대로 무장한 지렁이, 아니 토룡의 당당한 모습이 정말로, 정말로 믿음직하다
안명수
15호 (2005.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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