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때 일본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습관에 여러 번 놀랐다. 그 중 대표적인 하나가, 전철에서 발을 밟히면 밟힌 사람이 먼저 ‘미안합니다.’하고 사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늘 못마땅했다. 어쩐지 본심이 아니고 거짓인사 같아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지곤 했다. 아무리 겉치레(立前)를 좋아하는 민족이라도 밟힌 쪽이 먼저 사과한다는 사실이 상식과 이해를 넘어섰다.
며칠 후 대학에 있는 친한 일본인 친구가 내 사무실에 왔다. 이해할 수 없는 그 발 밟힌 이야기를 했더니, 일본인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철저해 밟힌 쪽이 먼저 사과하는 것이 허례가 아니라고 태연히 말했다. 밟은 쪽이 얼마나 미안해할까 싶어 상대방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미리 사과를 한다는 것이었다. 고도의 도덕성을 지닌 일본인들의 생활습관에 놀란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이런 민족이 어떻게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세계사에 보기 힘든 악행을 저질렀는지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의문은 곧 풀렸다. 매일 오는 신문, 매일 듣는 방송에서 사기, 수뢰, 이권개입, 거짓말 등을 거침없이 대하는데, 일본 국민에게는 절대 해당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단어가 일본 정치가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데에 열쇠가 있었다. 일본 국민과 일본 정치가는 별개의 민족인가? 이런 정치가들이라면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침략근성이 이해가 되었다.
정치의 政자의 사전적 의미는 以法正民이고 바르게 할 正과 같은 뜻이다. 옛날 한자를 만들 때 그 뜻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반대의 뜻을 가진 글자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政과 正은 서로 상반되는 뜻을 가졌으나 같은 뜻이 되기를 바라는 희망에서 상통되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제갈공명이 당시 촉나라 우두머리인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릴 때, “궁전의 안과 밖은 하나입니다.”라는 말을 했다. 상벌이나 법의 적용은 어디서나 공평무사해야 한다는 뜻으로, 궁정에서 항상 곁에 두고 보는 황제의 측근과 궁 밖의 백성을 재는 잣대가 틀려서는 안 된다는 밀이었다. 패거리정치를 지양하고, 政은 正이라는 제갈공명 식 정의를 내린 대목이 아닌가 여겨진다.
정(政)은 정(正)이다. 정치를 하려면 권모술수부터 배워야 한다는 고금의 설은 정치의 한 방편일 수는 있어도 근본은 아닐 것이다. 바름이 있어야 생명이 있는 것이다. 정(政)을 향하여 나아가다가도 정(正)을 되새기라고 서로 사이좋게 만들어 놓은 정(政)과 정(正). 정치가가 된다고 사람의 근본이 달라지는 것이 아닐진대, 앞서 일본의 시민정신과 정치인들의 정신이 그렇게 달리 나타난 것은, 바로 이 정(政) 속에 들어있는 정(正)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내 나라 남의 나라 할 것 없이 정치인이 되면 시끄럽고 고달픈 판 속에서 정(正)을 뭉개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 현자들이 이들에게 숙명적으로 바를 정(正) 자의 족쇄를 채우고 이따금 돌아보게 한 것이 아닐까 한다. 정(政)은 정(正)이라고.
허영수 (전 오사카 한국종합교육원장)
13호 (2005.1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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