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큐슈 후쿠오카현 카스가시(春日市)의 정행사에 퇴계선생의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그 시기는 2003년 4월로 되어 있다.
일본 땅에 퇴계선생의 현창비가 서게 된 것은 서울 남한산에 있는 망월사와 일본 큐슈에 있는 정행사가 자매결연을 맺고 있어 이 퇴계 선생이 일본 유학(儒學) 중흥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는 사실이 양측 사람들 사이에 공동 인식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교학자인 퇴계선생의 비석이 불교 사찰 경내에 세워지게 된 데에는 연유가 있었다.
서울의 망월사(望月寺) 주지인 성법니스님은 퇴계선생의 15대손이다. 젊은 시절, 일본 동경대학에 유학 후 돌아와 인연이 닿아 중이 되었다.
그후 망월사 주지가 되고 나서 일본의 사찰과 교류가 잦았다. 그간에 선조인 이퇴계 선생이 유교 학자로서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유교를 일으키는 데도 크게 공이 있었으며, 특히 명치유신 때, 교육헌법인 ‘교육칙어’를 만들 때에도 퇴계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작성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같은 학덕 높은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일본 땅에 선생의 현창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이를 제의하였더니, 일본 측 사람들도 이미 역사적으로 그 업적을 알고 있었던 터였기에. 이에 선뜻 찬동함으로써 결실을 보게 된 것이었다.
필자는 퇴계선생 비석에 참배하고 만감이 교차함을 느꼈다. 퇴계선생은 500년 전 조선 유학자가 아닌가? 그리고 일본은 임진왜란 때 우리 국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근세에 와서도 36년간 우리 국권을 빼앗아 지배를 하였다.
그러기에 일본은 우리에게 원한의 나라이며, 일본 또한 우리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도 일본 땅에 우리 학자인 퇴계선생 현창비가 세워졌으니, 이처럼 한국인의 현창비를 일본에 세우게 한 것은 무슨 힘의 작용이었을까?
첫째는 선생의 15대손인 성법니스님의 선조의 업적을 현창하고자 하는 숭조심이 씨앗이 되었다 할 것이고, 둘째는 두 사찰 사이의 종교적 자매결연의 힘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큰 힘은 학덕의 힘이 아니었겠는가? 정행사 주지가 스스로 인정하였듯이 퇴계선생은 일본에 유학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고, ‘교육칙어’에까지 선생의 사상을 담아 만들게 되었으니, 그 후 이 가르침으로 교육받은 일본의 현대인들은 모두가 은연 중 선생의 정신적 영향을 입고 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생의 현창비 건립을 제의받았을 때, 자신들의 학문적, 도덕적 스승이요, 은인격인, 학덕 높은 어른의 현창비 건립에 선뜻 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학덕의 힘의 위대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 퇴계 이황 선생은 430년 전 70평생을 살고 타계하셨다. 그러나, 그 학덕은 죽지 않고 살아남아 2003년 4월, 일본인들에게 가르침을 주기 위해 다시 비석으로 화신(化身)되어 정행사 뜰에 나타나셨으니 인생은 짧고 학덕은 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왜곡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이 시점에 양국 사찰의 화합의 결실인 현창비 건립은 양 국민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李炳壽 <퇴계학 부산연구원이사>
11호 (200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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