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에게도 도가 있거늘
옛날 공자시대의 일이다. 저 유명한 대도(大盜) 도척에게 그의 부하가 물었다. <도둑에도 도(道)가 있습니까?> 라고. 이에 도척은 서슴없이 대답하기를 <남의 집 재물을 밖에서 추측하는 것은 성(聖)이요, 앞장서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요, 동료를 먼저 보내놓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은 의(義)요, 성공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지(知)며, 훔쳐온 물건을 고르게 나누어 갖는 것은 인(仁)이니라.> 그리고 덧붙여서 하는 말이, <예로부터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한 자가 큰 도둑이 된 예는 일찍이 없었느니라> 라고 일갈(一喝)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비록 도적이긴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호걸다운 면모와 경륜도 있어 보여 절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또한 신라의 대 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의 대도(大盜) 황소를 몇 마디의 격문(檄文)으로 굴복시킴으로써 후세에까지 그 명성이 널리 칭송되고 있음은, 문장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능히 짐작케 한다.
최치원이 당나라 유학시절(857-886)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 소금 밀매업(密賣業)을 하면서 온갖 국법질서를 어지럽히다가 끝내는 난을 일으켜 세상을 도탄에 빠트린 황소(黃巢)라는 대도가 있었다. 이 때 토벌군 사령관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된 최치원이 토황소격문(討黃巢激文)을 지어 만 천하에 포고(布告)하게 되었는데, 이 격문을 읽어본 황소는 그 문장에 감동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서 최치원의 명문장이 세상에 알려져 신라인의 긍지와 명성을 한껏 드높였던 것이다.
“무릇 지혜 있는 자는 때에 순응하여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려 패가망신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선악은 마음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니, 하루속히 개과천선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기 바란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수필로 자리매김 되고 있는 이 격문은 우리 문학사에서도 큰 획을 긋는 장거(壯擧)라 하겠다.
사실 따져보면 고운선생의 문장도 문장이지만 그것을 읽고 쉽게 감동할 줄 알았던 황소에게도 일말의 찬사는 보낼만하다. <돼지우리에 주석 자물통>이라는 말이 있듯이 만일 그가 무지몽매한 좀도둑에 그쳤다면 어디 그런 명문을 읽을 줄이나 알았겠는가.
또한 허구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도적 중에도 홍길동이나 일지매, 임꺽정 등은 당대의 의적(義賦)으로서, 관의 폭정으로부터 백성을 구제한다는 그럴듯한 이상과 경륜을 보이고 있어 오히려 불의에 대한 정의로운 표상으로 추앙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들은 도둑이란 허울은 썼지만 오히려 악을 징계하고 선을 추구했으니만큼 당시 양두구육(羊頭狗肉)을 일삼는 탐관오리들의 악행에 비한다면 마땅히 도적의 위치는 서로 뒤바뀌어져야 했다.
그리고 설사 도적질을 했다 하더라도 저 명작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과도 같이 당장 굶주림을 면키 위해 한줌의 먹이를 훔친 자는 도적이라기보다는 한낱 불쌍한 소시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어디 사흘 굶고서 남의 집 담 뛰어 넘지 않을 자 있다던가. 이렇듯 때로는 도적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다가도 요즘처럼 우리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는 듯한, 도둑들의 악행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어안이 벙벙해질 뿐이다. 한갓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남의 목숨을 함부로 앗아가는 잔악한 무리들. 그들에게 도적이란 이름을 붙이기엔 아무래도 후한 대접인 것만 같아 망설여진다.
그러고 보니 도적의 종류와 활동영역도 각양각색이어서 일일이 다 열거할 수조차 없다. 도적들에 대한 보도기사나 시중의 여론도 수없이 많이 나와 있지만 그것을 일일이 되짚어 볼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가지 바라고 싶은 것은 아무리 도적이라 해도 최후까지 지켜야 할 일말의 양심만은 버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간은 그 누구나 선과 악의 갈등 속에서 번민하게 마련이다. 거기서 양심은 이 선(善)을 지키려고 하는 마지막 도덕률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양심이 본능적 충동에 패배했을 때 인간은 동물로 타락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인간인 이상 양심의 회복은 언제나 가능하다. 때로는 도둑질하러 갔다가 상대의 딱한 사정을 보고 오히려 도심(盜心)을 도적맞고 왔다는 이야기도 있지 않던가. 또한 어느 소매치기가 생활고에 못 이겨 강물에 투신자살 하려는 여인을 구하여 자신이 훔친 돈으로 그녀를 구제했다는 미담도 있지 않던가.
그런데 요즈음의 도적들은 어떠한가. 아무래도 그들은 양심의 마비로부터 출발하는 모양이다. 도적들도 이젠 예사도적이 아니다. 고도의 지능과 치밀한 조직 그리고 완벽한 기술 훈련으로 기업화로까지 발전하고 있다니, 그들에게 개과천선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 도적질을 하고서도 악(惡)이라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정당한 노력의 대가(代價)쯤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니 이 어찌 개탄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겠는가.
하기야 신기(神技)에 도달했다고 할 만큼 그들의 도둑질 수업과정을 따진다면야 피나는 노력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들이 그 많은 기량을 얻기까지의 노력을 사회봉사나 공익적인 면에 기울였다면 오히려 그 이상의 공로를 인정받고 포상도 받을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 도적질을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호구지책을 위한 최후 수단이어야지, 여기에 다른 목적이나 취미가 수반되어 피를 부르는 흉악범으로까지 발전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도적도 도적이기 전에 한 인간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잘 의리와 질서를 내세워 일사불란한 조직체계를 자랑하고 있는데, 이것을 인간 양심에 기초하여 사회정의를 위해 사용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디 인간성을 외면한 냉혈(冷血)지대에서 유유상종식 의리나 값싼 동정심에 얽매이지 말고 선량한 시민으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김병권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62호
2009.8.3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