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에 쳐진 벽은 물론 한 뼘의 발 디딜 땅마저 모두 콘크리트에 덮여, 이제 우리 도시인은 흙도 땅도 모두 잃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도시의 사람들은 흙을 모른다. 다만 땅만 알뿐이다.' 언젠가 K시인의 연작시에서 읽은 구절이 떠오른다. 비록 평범한 시구 같지만 도시인들의 탐욕에 찌든 각박한 세태를 풍자한 말이다.
나는 원래 시골출신이라서 그런지 '토지'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흙이다. 흙도 내 고향 논밭에서 일년 내내 알뜰하게 가꾸어온 땅, 그것도 퇴비냄새 물씬 풍기는 검고도 부드러운 것이라야 값진 것으로 여겨왔다. 즉 토지의 가치라는 것도 그 면적의 크기나 원근의 거리상관에 앞서 그저 부드럽고 진한 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아가서 씨를 뿌려 가꾸기만 하면 오곡이 무럭무럭 자라 수확이 풍성해야 가장 값진 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 잠재의식은 도시생활 수십 년을 해와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비록 하늘 아래 첫 동네라든가, 감자바위라는 별명이 붙은 산촌마을이지만 일찍이 이 나라의 문호 이효석을 낳아준 내 고향 봉평은 흙이 좋은 문전옥답이 많아 '장작불에 이밥 먹는 살기 좋은 고장'이라는 것을 나는 늘 자랑으로 삼아 왔다.
박토든 옥토든 흙은 우리에게 진실만을 가르쳐 준다. 뜨거운 햇볕 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손마디가 갈퀴 등이 되도록 논밭매기를 하고 나면, 그 만큼의 노력의 대가는 수확으로 보장을 받게 된다. 즉 천혜(天惠)의 땅에 씨 뿌려 가꾼 것만큼 그 소출을 보장받는다는 확신이 농민들의 가슴속에는 깊이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이른바 농심이라는 말의 본 뜻도 깊이 음미해 보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얻는다는 단순한 실리적 계산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천심, 농심, 민심이라는 말과 같이 천지인(天地人)이 한데 어우러진 대화합의 장을 의미하며 보다 높은 차원의 친화력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실례로는 지금도 시골 농촌에서 볼 수 있는 두레와 품앗이 같은 미풍양속을 들 수 있는데, 이것 역시 따지고 보면 일찍부터 우리 민족의 대화합의 장으로 승화시켰던 뿌리깊은 전통사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무더운 여름날 그 힘겨운 논밭매기를 혼자서 하려면 못 견딜 만큼 지루한 고통이 따른다. 위에서 내리쬐는 뙤약볕과 아래서 치솟는 복사열 속에서 금세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것은 농사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그 고통을 안다.
그래서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은 이러한 두레, 품앗이 같은 공동체를 조직하여 되도록 농사일에 쏟는 노력의 고통을 덜어 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즉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깃발을 드리우고 그 중에서 선소리와 후렴 잘 메기는 소리꾼이 장고북을 메고 나와 우렁찬 농부가를 부르면서 일을 주도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은 김서방네, 내일은 박서방네 순으로 그 고된 일을 릴레이식으로 치러 나가는 것이다. 얼큰하게 농주 한 사발을 들이키면 은근히 취흥도 돋우어져 절로 흥타령과 어깨춤도 추면서 그야말로 삼복더위 고달픈 논매기를 하나의 잔치마당으로 장식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 조상들의 슬기에 감탄하게 된다. 그것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일에다 신명을 불어넣어 고(苦)를 락(樂)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사실 일이나 춤이나 에너지의 소모 측면에서만 본다면 다 같이 몸을 움직여 고달픈 것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어찌하여 농사일은 고달프고 춤은 즐겁기만 하는가? 그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춤에는 신명(신바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즐거워서 하는 일에는 싫증이 나지 않는 법이다. 여기에 착안한 우리 조상들은 그 고달픈 일에다 신명을 불어넣어 마치 농사일을 춤의 경지로까지 승화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성과는 또 어떠했던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고달픈 농사일을 즐거움으로 바꾸어 일의 능률을 극대화시켰고, 또한 강한 공동체의식을 형성케 함으로써 인화(人和)의 바탕을 다져 나갔던 것이다.
평소 이웃 간에 벌어졌던 아전인수(我田引水)의 갈등이나 전답 경계선을 에워싼 시비 등... 자질구레한 감정 따위도 이러한 화합의 바탕 위에서는 말끔히 해소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훈기(薰氣)어린 흙 냄새 속에서 천, 지, 인이 삼위일체가 되는 대화합의 장을 이루었던 것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흙과 땅의 의미는 이렇듯 천, 지, 인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중심사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올수록 이러한 흙과 땅의 중심사상은 점차 퇴조해 버리고 극단적 타산심리만 남은 것 같다. 앞에서 예거한 시구와 같이 현대인들의 토지에 대한 관심은 이미 흙은 없어지고 땅만 남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흙이 있고 땅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산다. "내 죽으면 고향 뒷동산의 한줌 흙이 되면 그뿐/ 그곳이 내 태어나기 이전의 보금자리인 것을…" 하고 읊은 모 시인의 노래가 새삼 잔잔한 심파(心波)를 몰고 온다.
언젠가 고층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도 나와 같은 시골출신이라서 그런지 "요즈음 우리 식구들은 흙 냄새를 못 맡아서 모두 얼굴이 누렇게 떠 있다" 라고 푸념하던 말이 떠오른다.
또 어떤 어린이는 방송 프로에 나와, "우리도 한번 땅집에서 살아 봤으면 좋겠다"고 한 말도 되살아난다. 그것이 과연 일시적인 호기심에서 나온 말인지,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우리 인간의 원초적 귀소본능에서 나온 말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 모두 깊이 음미해 볼 일이다.
사면에 쳐진 벽은 물론 한 뼘의 발 디딜 땅마저 모두 콘크리트에 덮여, 이제 우리 도시인은 흙도 땅도 모두 잃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영원히 대물려 가야 할 흙의 주인공들도 점차 흙을 등지고 있고 천혜의 땅에서 얻어지는 값진 수확물도 지나친 인위적 조작에 의해 본래의 가치를 상실해 가고 있다.
오늘날 끈끈한 인간적 유대가 이루어지지 못한 도시인의 생활도, 또한 날로 흉포해지는 인간성 상실의 원인도, 이렇듯 흙 냄새를 모르고 살아 왔기 때문이 아닐까....
"천리(天理)를 거스르고 어찌 순명(順命)의 길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는 흙 냄새를 외면하고 살아가는 현대인을 향해 천(天)과 지(地)가 부르짖는 마지막 경고라 해도 좋을 것이다.
김병권
문인협회 부이사장
No.41
2007.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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