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 자체는 괴로울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살면 얼마든지 즐거울 수 있다. 문학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즐겁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얼마 전 문단행사에 참석했다가 원로시인 H선생과 장시간 대담한 일이 있다.
그 분은 구십이 다 된 고령인데도 그 순박하고 결 고운 심성 때문에 늘 모든 사람으로부터 ‘문학소년’이라는 애칭을 받고 있다. 가끔 제자나 후배들로부터 “선생님, 그처럼 젊게 사시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서슴없이 “시를 쓰면 젊어지지!” 라며 소년처럼 천진스럽게 웃는다.
이러한 H시인한테는 제자가 많다. 물론 고등학교와 대학에서 국어와 국문학을 가르쳤으니 제자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근래에는 시작(詩作)공부를 위해 찾아오는 제자들 때문에 잠시도 한가롭게 지낼 수가 없다고 한다. 참으로 즐거운 비명이라 해야겠다. 하지만 제자들을 가르친다기보다 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흥미롭고 즐거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새로운 제자 중에는 좀 이색적인 분이 있어 오히려 자신이 새로운 인생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전직 장관인 L씨는 칠십 중반을 넘어 팔십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새삼스럽게 시작공부를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를 짓는 기법(技法)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시인의 몫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그 제자로부터 불퇴전의 열정과 인생의 품격(品格) 같은 것을 배우게 되어 가슴이 한 층 뿌듯하다고 했다.
“선생님, 제가 장관시절에 시를 알았더라면 좀더 멋있는 정사(政事)를 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게야 이 것을 깨닫게 되어 후회막급입니다. 사정이 허락된다면 후배들한테 속죄하는 뜻에서라도 시집 한 권을 내고 싶으니 꼭 도와주십시오.”
이 감동적인 고백을 들은 스승은 오히려 그 제자 앞에 머리가 숙여지더라는 것이다. 실로 시를 써 온지 육십여 년 만에 느껴보는 참된 시인의 보람이었다. ‘시를 알면 국가경영을 잘 할 수 있다는 자각. 비록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관료들이 이러한 시심(詩心)에 젖을 수 있는 정신문화가 확산된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남은 생애 동안 더욱 더 혼신의 정열을 바쳐 시작에 임해야 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를 쓰면 젊어진다”는 그의 말은, 결코 즉흥적으로 내뱉은 인사치레만이 아니었다. 문학하는 마음에는 늘 긍정적인 사고와 기쁨을 창조하고자 하는 의지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쉽사리 노기(怒氣)를 띄거나 증오심(憎惡心)에 잠길 수가 없다. 그것은 행복해지고 싶은 인간의 욕구 속에는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본류(本流)로 하는 감정에서 희(喜)와 낙(樂) 만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감정을 극대화하여 인생을 즐겁게 살기 위해서는 예술, 특히 문학과 가까워지는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문학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즐겁게 사는 법을 제시한다. 설사 인생 그 자체는 괴로울지 모르지만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살면 얼마든지 즐거운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 가령 경제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본을 투자했을 때 이윤이 남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나 문학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설사 손해를 보더라도 할 수 없지 않느냐는 관점에서 그대로 수용하고 만다. 이럴 때 정신적인 평안을 확보하는 쪽은 마땅히 후자일 것이다.
그래서 문학은 즐거움을 사랑하는 학문이라고 한다. 즉 철학을 가리켜 애지(愛智)의 학문이라고 할 때, 문학은 애락(愛樂)의 학문이라 할 수 있다.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 이것은 자칫 육체적인 쾌락으로 오해될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애락(愛樂)이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즐거움을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육체적인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정신적인 즐거움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도 한시성의 육체와 영원성의 정신을 대비시킨 말인 것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읽은 몇 권의 문학서적과 거기에서 얻은 뜨거운 감동을 잊지 못하는 것도 위대한 예술혼(藝術魂)에 접목되어졌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은 경험이 특별하다 해도 그것은 육체를 위한 것이기에 쉽사리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영혼의 울림으로 얻어진 감동은 정신적인 내면세계에 깊숙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들도 따지고 보면 문학이 소외된 풍토에서 빚어진 산물이라 생각하니, 새삼스럽게 전직 장관 L씨의 회한이 한층 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모름지기 생활 속에서 문학을 가꾸고 그 문학을 통해 감동과 즐거움을 창출해나갈 수만 있다면 보다 살기 좋은 사회, 보다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김병권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No.36
2007.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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