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되어 산에 오를만한 날씨다. 산에 가면 한번쯤 세상을 내려다 보며 아등바등 다투던 것들을 한번 비웃어 털어내고 내려오는 것도 좋을 것이다.
영국 등반가 조지 말로리는 ’왜 산에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그 말도 별 감동을 주지 못할 것 같다. 업무와 스트레스에 쫓기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는 산을 찾아야 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게을러서 자주 산을 찾지는 못하지만 어쩌다가 마음이 울적할 때나, 신경통이 쑤셔올 때는 기분전환 요법으로 곧잘 산을 찾는다. 산은 계절에 따라 그 정감이 다르다. 그러나 산정(山情)의 진수를 맛보려면 겨울 산이 더없이 좋을 것 같다.
‘돌의 미학’이란 수필에서 조지훈은 “돌의 맛, 즉 이끼 낀 수석의 묘경을 모르고서는 동양의 진수를 알았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공감이 가는 명언이다. 어디 이끼 낀 수석뿐이랴? 기암괴석과 앙상한 나목의 숲에서 떼 지어 지저귀는 산새의 모습들은 어떠한가. 그리고 두꺼운 얼음 속으로 졸졸 흘러내리는 석간수를 보노라면 한 편의 시요 음악을 느낀다. 그야말로 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知者樂水)의 경지를 실감케 될 것이다.
하지만 산행의 묘미는 외형적인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내면으로 느껴지는 진미를 터득해야 산을 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헐떡거리는 심장의 고통을 달래가며 한발 한발 나아가면 축 늘어지는 육신에서 한 가닥 극기의 희열을 느낄 수 있다. 진정한 낙은 고통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인생의 철리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고(苦)를 낙(樂)으로, 애(哀)를 환(歡)으로 바꾸고자 하는 순수쾌락주의자가 있다면 산을 찾을 일이다.
군데군데 쌓인 흰 눈자락을 밟으며 귀와 뺨에 따갑게 와 닿는 냉기를 걸어 보라. 그러면 굳어진 육신이 봄눈 녹듯이 풀리는 쾌감도 맛볼 것이다. 그것은 영육일치의 안식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산에 오르는 쾌감의 절정은 정상 정복에 있다. 누구나 산정을 앞둔 팔부능선에서 한번쯤은 좌절감을 맛보게 된다. 기진맥진 피로를 감당할 수 없어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발길을 잡아당긴다. 승패의 기로에서 벌이는 자신과의 마지막 싸움이라 하겠다.
’남을 이기려면 자기 자신부터 이겨야 한다’는 교훈을 곱씹어 보며 최후의 결전을 감행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성취한 정상정복의 쾌감은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다. 아마 세계 제일의 고봉을 정복한 등반가들의 쾌감도 이러할 것만 같다. 비할 바 없는 그 때의 희열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기백 바로 그것이다. 높을 대로 높아지고 넓을 대로 넓어진 호연지기, 세속의 번뇌와 갈등 따위를 비웃을 만도 한 것이다.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세속의 풍경은 또 어떠한가. 모든 인간사가 한줌 손아귀에서 노닥거리는 장난감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성냥갑을 세워놓은 듯한 빌딩이나 개미집 같은 주택에서 아물거리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면 인간이 보 잘 것 없는 존재란 생각도 든다.
서산대사는 “만국 도성이 모두 개미 둑 같고 수많은 호걸도 초파리 따위 벌레인 듯하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위자연의 장자도 “석화광중(石火光中)에서 장단(長短)을 겨루니, 그것이 얼마 되는 세월이며, 달팽이 뿔 위에서 자웅(雌雄)을 다투니 그것이 얼마나 큰 세계겠는가?” 라고 읊지 않았던가. 넉넉잡아 백 년이 인생이라 한들 무한의 우주광년에 비하면 번뜩이는 찰나의 불빛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고, 이 세상이 넓다 한들 우주에 비하면 한낱 달팽이 뿔 정도의 면적에 불과하지 않을까...
장자는 그 특유의 우화로 다툼만 일삼는 인간들을 꼬집는다. “달팽이의 왼 뿔 위에 촉이라는 나라가 있고 그 오른 뿔 위에는 만이라는 나라가 있다. 이들은 수시로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을 하니 수만호가 항복하여 북쪽으로 쫓겨 갔다가 한 달도 못돼 되돌아 왔다.” 비좁은 세상에서 자질구레한 이해득실로 다투는 인간을 풍자한 말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결국 남는 것은 허무인데 세상인심은 왜 이다지도 아귀다툼에만 혈안이 되는가. 자질구레한 세속의 욕망번뇌 따위가 새삼 어리석게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는 노루나 꿩에만 홀려 숲도 산도 못 보고 헤매는 포수는 아닌지 모르겠다.
산정에 올라보면 우리는 실상과 허상, 이승과 저승, 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일원화시켜주는 대인지풍(大人之風)을 배우게 된다. 또한 거대한 웅자를 드러낸 채 침묵만을 고집하는 산의 겸손도 배우게 된다. 그러면서 그 무언의 암시에 귀를 기울이면 산은 또 영감의 속삭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네 인생의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거든 언제든지 산으로 오라! 그러면 너의 인생행로의 참 길잡이가 되어 주리라...’
김 병 권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34호
2007.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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