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오랜 투병 끝에 소련은 안락사를 선택했고 소련이 사라지면서 냉전도 끝났다. 20세기 초 파시즘의 도전을 이겨낸 민주주의는 이번에도 공산주의란 경쟁자를 쓰러트렸다. 그러나 문제는 라이벌이 없는 세상이 어떤 것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부르면서 군비경쟁을 강요했고 미소관계는 1962년 쿠바 비사일 위기 이래 최악이 된다. 이미 GDP의 25%를 국방비로 쓰던 상태에서 강요된 군비경쟁은 소련의 병을 악화시킨다. 1991년 병을 이기지 못한 소련은 자살을 선택했다.
동상에 걸린 ‘악의 제국’
10년의 휴가
1945년 얄타회담에서 합의된 냉전질서는 소련의 죽음과 함께 끝났고 미국은 유일한 슈퍼파워가 되었지만 미국은 물론 다른 나라들도 이것은 일시적인 과도기라 생각했다. 러시아가 믿음직한 친구가 되면서 둘로 갈라진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UN 안보리에서 비토권을 남발하며 서로의 발목을 잡던 관계는 협력으로 대치될 것이고 세계의 문제는 UN에서 해결할 것이다. 1994년 키신저는 미국의 군사력은 감축될 것이고 세계는 6대 강대국이 이끌어 갈 것이라 생각했다.
1990년 9월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아버지 부시는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란 말로 냉전 이후 세계질서를 규정한다. 아버지 부시는 침략행위의 근절, 집단안보, 강대국간의 협력을 냉전 이후 신세계질서의 기초로 보았다. 쿠웨이트 침공은 국제공동체에 대한 도전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대한 응징인 걸프전은 ‘신세계질서’의 가벼운 데뷔전이었다.
냉전이 끝나고 ‘혼자’ 세계를 관리한다는 골치 아픈 부담을 던져버린 미국은 ‘역사로부터의 휴가(holiday from history)’를 즐긴다. 그러나 아버지 부시가 제시한 ‘신세계질서(New World Order)’는 세계질서를 규정하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신세계질서의 데뷔전이었던 걸프전은 사실상 미국의 원맨쇼에 불과했다. 미국은 동맹국들에게 쿠웨이트 침공이 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이라 말했지만 그들이 보기에 걸프전은 미국의 전쟁이고 미국이 하자는 대로 적당히 들러리만 서면 되는 문제였다. 동맹국들은 세계질서란 거창한 말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 거창한 사업은 예전처럼 미국 혼자 하면 충분한 것이다.
문제는 미국 자신도 신세계질서란 말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시의 뒤를 이은 클린턴에게 독트린이나 비전은 취향이 아니었다. 유권자들은 나라 밖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고 여론에 민감한 클린턴은 어쩔 수 없을 때만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 즉흥적으로 대응할 뿐이었다. 10년간 미국의 군사활동은 냉전기간 전체보다 많았지만(이라크, 소말리아, 아이티, 보스니아 등) 전략 없는 임기응변의 작전만 반복되었다. 1990년대 미국 외교의 중심은 국무부나 국방부가 아니라 상무부와 재무부로 옮겨져 있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a War on Terror)’이란 ‘비전’을 갖게 된다. ‘테러와의 전쟁’은 좁게 보면 테러조직과 테러 수단을 파괴하여 국제공동체의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고 넓게 보면 테러리즘이 태어나는 환경을 바꾸어 테러로부터 자유로운 세계질서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세계질서는 미국의 이상인 자유와 민주주의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이다. 9/11 테러가 일어난 해(2001년) 테러와의 전쟁은 좁은 의미로 해석되었지만 그 다음해부터 넓은 의미로 해석되면서 미국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깨닫는다.
남이야 뭐라 하건 네 갈 길을 가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의 도시(City upon a Hill)는 가려지지 않나니.” 성서의 말이다.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세상의 빛이라 자부했다. 모든 국가는 신과 계약을 맺었다고 본 청교도들은 그들이 살던 영국은 그 계약을 어겼기 때문에 자신들이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대륙으로 간 청교도들은 신과 이스라엘인들이 특별한 계약을 맺었듯이 자신들은 신과의 약속이 실현된 나라를 세울 것이며 자신들의 나라는 세계의 빛과 소금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청교도들의 선민의식은 후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미국의 이상은 인류의 이상이다(벤자민 프랭클린).” “신은 우리가 세계를 이끌도록 운명 지웠다(허먼 멜빌).” “미국은 세계의 마지막 희망이다(링컨).” 자유와 민주주의란 이상에 따라 만들어진 미국은 역사의 실험이었다. 선택의 자유가 있다면 누구나 미국의 가치를 선택할 것이라 믿는 미국인들은 이상이 실현된 나라인 미국이 인류의 선구자로서 세계를 이끌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인들이 미국에게 이로운 것은 인류에게도 이롭다고 믿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가 갚아주어야 할 단순한 재난이 아니라 미국이 자신의 역사적 사명을 깨닫는 기회로 보았다. 테러는 미국의 이상인 자유와 민주주의에 반하는 것이고 전세계에 미국의 이상이 실현된다면 테러는 사라질 것이다. 전세계에 미국의 가치인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미국으로선 자신의 역사적 사명이기도 하다. 9/11은 미국을 바꾼 것이 아니라 미국을 더 미국답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게 미국다워진 미국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진주만은 유럽과 아시아의 자유를 지킬 의무가 미국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고 이번의 테러로 미국은 얼마든지 혼자 살 수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렸다.” 9/11 테러 직후 아버지 부시가 한 말이다. 그러나 동맹국들은 과연 그것이 미국이 배운 교훈인지 의심스러워 했다.
아프카니스탄에서 벌인 반테러 캠페인에서 미국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여도 상관없다는 것을 깨달은 듯이 보였다. 어쨌든 유일한 슈퍼파워인 미국은 뭐든지 혼자 할 능력이 되는 것이다. 동맹국을 무시하는 부시 행정부의 외교정책은 일방주의적이고 오만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자신이 옳다는 신념이 있고 그 신념을 밀어붙일 힘이 있다면 남이 뭐라 하건 내 갈 길을 가면 그만이다.
미국의 사명을 위해서 군사적 힘은 필수적이며 누구도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해야 한다. 미국은 물론 대량살상무기가 확산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의 사명을 지키려면 미국 자신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면 다른 나라들은 미국의 그러한 이중잣대를 인정하는가? 유사 이래 그런 적은 없었다.
미국인들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같은 미국의 가치를 전파하고 지키면서 미국이 세계를 더 안전하고 살기 좋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존경할만하다. 그러나 미국식 가치가 무엇인지 세계는 충분히 들어왔고 다른 나라가 보기에 미국식 민주주의는 가능한 여러 옵션의 하나에 불과하며 그 중 최선의 것도 아니다. 미국의 경제 역시 존경할만하지만 그만한 성공은 다른 나라도 해낸 것일 뿐이다. 미국의 번영은 특별한 것도 아니고 운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은 다른 나라들에게 미국의 선의를 믿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은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지만 언제든 자신을 찍어 누를 수 있는 유일한 패권국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 신뢰는 대등한 상대에게만 줄 수 있는 것이다.
오만과 매너
정치적 신념을 가진 미국인들은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이며 의무(어쩌면 운명)라 생각한다. 훌륭한 생각이다. 그러나 이상을 현실로 옮기는 것은 언제나 미묘하고 까다롭다. 일을 성사시키려면 안보, 경제적 이익과 같은 평범하고 현실적인 이해들과 이상은 타협하고, 수정되어야 한다.
2차대전이 끝났을 때 미국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어느 나라보다도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힘을 과시하기 보다는 동맹국과의 합의를 우선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UN, IMF, 세계은행, GATT 등은 세계의 룰을 만드는 기구들이었고 미국이 ‘평등한 자들 가운데 첫째(primus inter pares)’로서 동맹국들과 협력하기 위한 장치였다. 미국은 동맹국들을 리드하지만 지배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언제나 옳은 일을 한다” 미국의 팬이었던 처칠의 말이다. 동맹국들이 보기에 미국은 자비로운 패권국이었다. 미국은 자신뿐 아니라 모두가 혜택을 보는 경제 시스템을 무리 없이 관리해왔고 동맹국에게 손을 벌리는 일없이 자신의 돈으로 모두를 위한 군사적 방어막을 제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의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은 힘을 일방적으로 휘두르려는 미국 자신의 유혹에서 온다. 21세기 들어 미국과 연관된 주제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제국’이다. 로마제국에 빗대어 미국 대통령을 ‘집정관’이라 부르는 것이 유행이지만 누구도 식민지나 황제를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은 국제관계의 룰을 정할 수 있고 혼자서 그 룰을 강요할 수 있다. 미국의 그러한 위치는 그 자체로 비난의 표적이 된다.
더불어 사는 세상
군사력은 공기와 같아서 그것이 없다면 누구도 살 수 없다. 미국의 군사력이 없다면 세계질서는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질서는 군사력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테러와의 전쟁은 세계를 안전한 곳으로 만드는데 중요하다. 그러나 테러리즘을 억제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며 다른 나라의 협조가 필요하다. 아프카니스탄에서 군사적 성공은 쉬웠지만 여전히 알카에다는 50여개국에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21세기의 문제는 갈수록 더 많은 것들이 국가의 통제권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국제금융이 안정되는 것은 미국의 번영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선 미국은 다른 나라와 협력을 해야 한다. 국경의 담장이 점점 무의미해지는 세계에서 마약, 전염병, 테러리즘 등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은 국제공조를 해야한다.
국제문제에서 발을 빼면 미국은 안전해질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9/11 테러는 미국의 영향력만이 아니라 미국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 공격이었다. 미국이 세계에서 발을 빼더라도 테러리스트들은 여전히 국경을 넘어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의 경제력을 증오할 것이다. 미국기업과 시민들은 글로벌 자본주의를 상징하며 그 자체로 배척할 대상이다.
발을 뺄 수 없고 미국 자신을 위해서 세계의 경찰이 되어야 한다면 거치적거리는 다자주의는 버려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순수한 다자주의란 불가능하다. 난쟁이에 불과란 동맹국들과의 입씨름은 소인국에 떨어진 걸리버를 묶어두기 위한 걸리적거리는 그물에 불과할 것이다. 국가간의 전쟁보다 테러가 안보의 위협이 된 시대에 UN에서 동맹국들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기를 기다리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혼자서 선제공격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에 따라 누가 동맹이 될 것인지 결정되어야지 동맹이 누구인가에 따라 일이 결정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작전의 목표는 동맹국 간의 최소공배수로 한정될 것이고 그런 상태에서 작전은 성공할 수 없다.” 럼스펠트 전 국방장관의 말이다.
미국이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할 때 동맹국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은 그것이 미국과 세계질서에 이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억지력을 갖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미국은 더 이상 공격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테러리스트에게 공격받기 전에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이것은 국가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에서 아들 부시가 한 말이다. 동맹국들은 아연실색했다. 프랑스와 독일은 실제 공격을 받았거나 위협이 현실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이상 무력사용은 안보리의 승인을 거쳐야 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런 주장을 받아들일 미국 대통령은 없다. 부시 대통령은 남의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절대강자가 된 미국은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19세기 대영제국은 다른 나라와 상의 없이 해적을 소탕했고 그 결과 세계의 바다는 안전해졌다. 평화는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고 힘을 어떻게 행사하는가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2차대전이 끝난 후 미국의 외교정책은 트루먼 대통령이 만든 동맹 시스템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반세기 가까이 유지된 외교정책을 냉전시대의 ‘낡은 세계질서’라 말하면서 외교정책의 ‘혁명’을 시작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아프카니스탄 공격을 준비할 때 NATO는 회원국에 대한 공격은 동맹국 전체에 대한 공격이라며 미국을 군사적으로 도와주려 했다. 그러나 부시의 반응은 미지근한 것이었고 이라크를 공격할 때 부시는 공공연히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 나 혼자서도 충분하다’며 전통적인 동맹을 무시했다. 동맹은 쓸모 있는 패인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필수는 아니다.
그러나 다자주의는 미국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다. 다자간 합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면 미국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이면서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힘에 보탬이 되지 않는 방해물에 불과하다며 동맹국들을 무시했고 이라크쯤은 미국 혼자서 처리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라크 문제가 장기화되면서 미국은 동맹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군사력은 불량정권을 제거하는데 충분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나라를 ‘해방’하는 것은 군사력 이상의 명분이 필요하다. 미국의 의도가 순수하더라도 정당성은 자동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당성은 국제사회의 합의란 지루한 요식행위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순수한 다자주의란 불가능하지만 정책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다. 언젠가는 미국은 저물게 되어 있다. 키신저가 말했듯이 미국의 과제는 지금의 우월한 힘으로 미래에도 미국의 가치와 이익에 부합할 세계질서를 만드는 것이며 그것은 미국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석우
No.33
2007.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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