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bject	재벌개혁 10년, 누구를 위한 개혁인가?: 이상은 짧고 현실은 길다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된 재벌개혁은 올해로 10년을 맞았고 이제 성적표를 만들 때는 지났다. 뒤 늦게 만들어 본 성적표는, 그러나, 그리 신통한 것이 아니다.

SK그룹 수난기

뉴스였다. 북한핵을 밀어내고 1면을 메운 큰 뉴스였다. 2003년 2월 22일 TV로 수백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SK그룹의 최태원 회장이 체포되었다.

수감되는 최태원 회장

2002년 4월 문어발식 확장을 막기 위해 계열사 주식을 순자산의 25% 이상 가질 수 없게 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가 부활한다. 최회장은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그룹 내 비상장사와 상장사 주식을 맞바꾸어 지분율을 올린다. 주식교환 과정에서의 배임과 부당내부거래행위로 기소된 최회장은 재계 총수로는 이례적으로 7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SK그룹의 수난은 회장이 구속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사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은폐한 것이 드러나면서 SK글로벌이 파산위기에 몰린다. 그룹의 해외영업 손실을 떠안은 결과 8조5000억(2003년)의 부채를 안게 된 SK글로벌은 그룹전체를 집어삼킬 (소버린의 말에 따르면) ‘돈 먹는 블랙홀’이 되었다.

SK그룹의 경영진은 SK㈜와 SK텔레콤의 수출입과 유통을 맡고 있는 SK글로벌은 청산하는 것보다 살리는 것이 그룹은 물론 채권자와 투자자들에게도 이익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SK㈜의 2대주주인 소버린은 ‘SK글로벌을 구제하는 것이 주주의 이익인가?’라며 이의를 제기한다. SK㈜는 2003년 4800억의 적자를 보았다.

외국인 투자자와 시민단체들은 외환위기 이전처럼 건강한 회사를 희생하여 부실계열사를 살리는 것은 주주에게 손실을 떠넘기는 것이라 분노하였다. 소버린은 천문학적인 손실의 책임을 지고 경영진이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 유력지들은 외국투기자본의 만행으로 몰아갔지만 글로벌 스탠다드로 볼 때 소버린의 요구는 상식적이었다.

SK 수사와 2년을 끈 소버린 사태가 진정된 후 최회장의 그룹 내 지배력은 더 강화되었고 수사 당시 주당 6000원이었던 SK㈜의 주가는 2006년 6만원으로 10배가 올랐다. 분식회계로 가려졌던 1조5505억원이 회수되면서 투명한 회사가 됐고 신인도가 올라간 것이다. 경영권 도전에 실패한 소버린이 주식을 처분하고 빠져나간 뒤에도 주가는 변동이 없었으며 다른 그룹들에겐 시한폭탄으로 남아있는 분식회계가 해결됐기 때문에 SK그룹은 집단소송의 부담에서 자유로워 졌다. 결과적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SK 그룹과 최회장이다. 그러나 SK그룹의 승리는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결과가 어떻든, SK글로벌에 대해 논쟁이 벌어진 자체는 21세기의 한국이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과거 같으면 어려움에 처한 계열사를 구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오너의 고유권한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재벌은 오너만의 것이 아니다.

재벌개혁: 경제민주화

최회장의 구속 이후 삼성(2004년)과 현대자동차(2006년)로 이어진 검찰 수사는 한국경제를 소수의 가문이 마음대로 지배하는데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재벌의 인기는 언제나 바닥이었다. 붕어가 사는 연못에 상어가 헤엄치면 눈총을 받게 마련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반감은 두 배가 되었고 재벌은 개혁의 대상이 된다.

법원에 출두하는 정몽구 회장

개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정부와 재벌에 의해 좌우되던 국가경제에 대한 발언권은 1987년 이후 노동자, 소비자, 시민단체로 다원화되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제도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업과 은행의 소액주주, 예금주들의 돈의 운명은 여전히 한줌의 재벌가문과 은행 경영진, 정치인에 의해 좌우되었고 그들을 견제할 장치는 미약했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1960~70년대 모두 다 잘 될 수는 없으니 잘될 것 같은 몇몇 기업만 선택해 화끈하게 지원하자는 산업화 정책이 채택되었다. 다수의 희생 위에서 지금의 재벌이 태어난 것이므로 재벌은 오너만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잘되면 다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이니 내 것이고 안되면 뒷감당은 국민의 돈으로 메워 넣어야 되는 시스템에서 재벌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는 없었고 외환위기라는 대형사고를 치면서 재벌에 대한 반감은 극에 달한다.

재벌의 지배구조가 외환위기의 원인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이 되면서 재벌개혁의 초점은 재벌의 의사결정구조에 맞춰졌다. 10%도 안 되는 지분을 가진 가문이 100%의 지배권을 행사하는 재벌의 지배구조에서 90%의 이익과 채권자의 권리는 무시되어 왔다. 개인투자자가 주주총회를 소집하거나 장부 열람을 요구하고 주가 하락으로 입은 손실에 대해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등 주주의 당연한 권리는 제한되었다. 소액주주의 발언권이 미미한 상황에서 경영진에 대한 견제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오너는 황제처럼 군림했으며 기업내부에서 총수를 거슬리는 발언은 자리를 걸어야 했다. 1인독재의 비용은 막대했다. 재벌의 파산원인 중 가장 큰 것은 오너의 (특히 2세의) 잘못된 전략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이전 재벌이 지나치게 그리고 무모하게 다각화된 것은 사실이다. 재벌마다 ‘원셋주의(one-setism)’를 내세우며 너도나도 자체 제철소, 건설회사, 자동차 공장을 지어댔다. 외환위기 이전 재벌의 파산은 철강, 건설, 부동산에 과잉투자한 것이 원인이다. 이미 투자과잉인 곳으로 다각화하는 것은 경제전체로 볼 때 자원낭비이고 개별기업으로도 리스크가 큰 곳에 올인하는 위험천만한 전략이다. 김대중 정부는 제도가 잘못되어 오너의 잘못된 결정을 견제하고 주주와 은행의 권리를 보호하는데 실패한 것이 위기의 원인이라 보았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총론이 옳다고 각론이 옳은 것은 아니다.

문어발의 족보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외형성장에 치중하여 나라를 망친 재벌 시스템은 이제 끝났다”고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었다. 재벌의 문어발식 경영에 대한 비판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전자산업에 정통한 경영자가 자동차산업에서도 유능한 경영자가 될 것이란 보장은 없다. 오히려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시장에 경영자의 시간과 에너지가 분산되면서 잘되는 사업까지 위태로워지기 십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에선 다각화된 기업의 주가가 개별기업의 가치를 합산한 것보다 평균 15% 저평가(conglomerate discount)된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 옳은 것이 언제 어디서나 진리는 아니다. 미국 기업들이 전문화된 것은 1970년대 이후부터이고 록펠러와 카네기가 살던 시절 미국 대기업은 한국의 재벌과 별다를 것이 없는 문어발 기업이었다. 더군다나 1876년 에디슨이 설립한 GE는 다각화 전략의 모범으로 꼽히고 지금도 존경 받는 성공적인 기업이다. 미국에서 다각화 전략이 기각된 것은 시장이 효율적이 된 후의 일이다.

시장이 효율적이면 기업은 회사 내에서 해결하던 것을 더 적은 비용으로 시장에 맡길 수 있다. 70년대 이후 뮤추얼 펀드, 벤처 캐피탈, 애널리스트, 회계사 등이 미국의 자본시장에 자리를 잡으면서 기업의 자금조달이 쉬워졌고 비용도 낮아졌다. 노동시장에선 MBA와 CEO 시장이 정착되었으며 공인 자격증은 믿을만하게 되어 기업 안에서 많은 비용을 들여 키워야 하던 인재를 언제든 시장에서 싸고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한국 대기업은 대졸 신입사원의 교육을 위해 평균 20.3개월 동안 신입사원 1인당 6,218만원의 비용을 투입한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선단식 경영을 해체하고 각 계열사가 독립적인 경영권을 갖는 즉 재벌을 해체하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세계 3대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는 2005년 삼성전자의 신용등급을 인텔, IBM과 같은 등급으로 상향 조정했다.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은 당시 A3로서 투자등급 10등급 중 7등급인데 삼성전자만 5등급인 A1을 부여한 것이다. 무디스가 삼성의 지배구조를 잘 알면서 A1을 부여한 것은 ‘삼성만의 지배구조’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올해로 창립 60년을 맞은 LG그룹은 1947년 화장품업체로 출발했다. 당시 한국에선 화장품 병의 플라스틱 뚜껑을 만들어 줄 업체가 없었기 때문에 LG는 플라스틱 공장을 직접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병 마개를 만드는 것으로는 플라스틱 공장을 돌리는 비용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빗, 칫솔, 비누 갑을 만들었고 이것이 LG화학의 시작이었다. 이후 선풍기 날개와 전화기 케이스를 만들면서 전자제품과 통신장비를 만들게 되어 LG전자가 설립되었고 플라스틱을 만들다 보니 원료인 석유를 다루는 정유산업에 손을 대었으며 원유를 들여오기 위해 유조선을 운영하면서 해운회사를 차리게 된다. 그 후 해운업을 하면서 지불하는 보험료만으로도 당시 한국에서 가장 큰 보험회사 매출의 반을 차지했고 비용을 줄이려다 보니 보험사를 운영하게 된다.

재벌의 다각화 경영은 시장에서 구하기 어렵거나 비용이 높은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면서 나온 결과이며 한국의 상황에 맞추면서 얻어진 경영전략이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 세계화로 국가단위의 시장이 하나의 세계시장으로 묶이면서 더 나은 단가와 품질의 부품과 서비스를 쉽게 외부에서 조달할 수 있게 된 지금 재벌과 같이 모든 것을 자체에서 해결하는 것은 낡은 전략일지 모른다.

1999년 GM이 델파이(Delphi)를 분리한 것에 이어 2000년 포드 자동차는 부품업체인 비스티언(Visteon)을 분리한다. 1999년 $194억의 매출을 올린 비스티언은 외형상으로 일본이나 한국의 어떤 자동차부품업체와도 경쟁할 만한 규모이다. 포드가 비스티언을 분리한 것은 다른 업체에 납품하는 비중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여전히 40%의 지분을 가진 포드는 대주주로 남았지만 2000년 비스티언은 매출의 35%를 그룹 밖에서 올렸고 최대고객은 포드의 경쟁사인 GM이었다. 자회사에서 부품을 조달한다면 자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일정수준의 주문이 항상 있어야 한다. 경기가 좋으면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불경기에는 판매가 줄어든 만큼 생산을 줄일 수 밖에 없는데 자회사를 운영하기 위해 고정적으로 주문을 해야 하는 것은 막대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더군다나 불경기에는 더 싼 값에 더 좋은 질의 부품을 구하여 경쟁력을 올려야 하지만 자회사에 부품을 주문해야 한다면 비용삭감의 여지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삼성의 생각은 다르다. 초창기 시절 재벌이 시장의 필요에 따라 다각화를 했듯이 지금도 수직계열화는 유효한 전략이다. 시장에서 부품을 사는 것이 지금 당장은 경쟁력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계열사에서 부품을 조달하면 외부업체와 달리 회사 자체의 고유한 필요에 더 잘 맞출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경쟁력 확보에 더 유리하다. 전자부문이 막대한 손실을 내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간 소니 역시 자체 조달율을 높였다. 더군다나 디지털 컨버전스가 심화되면서 갈수록 제품간의 구분이 흐려지는 시장에선 다양한 제품군을 거느리는 것이 경쟁력을 유지하는데 문제될 것이 없고 오히려 경기의 부침에 따라 주력제품을 바꿀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산업에 진출하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아무 연관도 없는 산업에 무분별하게 문어발을 뻗는다고 비판하지만 재벌의 다각화 전략이시장과 맞지 않는 비합리적인 것이었다면 재벌이 그렇게 오랫동안 한국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벌이 성장한 것은 60~70년대의 국가주도의 산업화 정책 때문이지만 국가의 정책적 지원이 사라진 80년대 이후에도, 외환위기를 겪은 후에도, 재벌이 한국경제를 지배하는 것은 재벌 시스템이 안정적이라는 증거이다.

주력기업의 희생으로 실패작을 지원한다고 비판하지만 계열사간의 내부거래는 수직계열화로 비용을 낮추고 시장지배력을 키우는 전략이다. 계열사에서 납품 받는 중간재의 단가는 R&D 등의 고정비용이 반영되지 않은 가격으로 시장에선 그러한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다. 물론 내부거래에는 주식, 어음 등을 시장가격보다 높게 인수해주거나 지급보증이나 직접 융자를 해주는 외부에선 부당하게 보이는 편법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원가 이하로 납품한 계열사는 언제까지나 손실을 떠안을 수 없기 때문에 손실을 보전해주어야 하고 부당내부거래는 수직계열화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소수의 거대기업이 시장을 분할한 상황에서 내부거래를 통해 중간재를 조달하여 비용을 낮추는 재벌은 외부기업에 중간재를 팔 때는 내부가격보다 더 높게 부르기 마련이다. 계열사를 우대하는 차별적 가격은 시장에 진입장벽을 만들어 거대기업 간에 분할된 시장구조는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차별적 가격은 경쟁을 배제하지만 그만큼 최종소비재의 가격을 낮추기 때문에 경제전체로 보더라도 재벌 시스템이 비효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재벌의 전성기였던 1989년 5대재벌의 내부거래율은 대만 그룹들의 3배에 이르는 (종합상사를 제외하고) 27%에서 17.6%로 수치로 같은 기간 일본 6대 케이레쓰(系列)의 내부거래율이 10% 내외라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높은 수준이다. 그러나 5대 재벌을 제외하면 내부거래율은 9.2%(종합상사를 제외하면 7.2%)로 대만의 7%와 비슷한 수치였다. 5대 그룹과 나머지 그룹이 내부거래율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경제적 힘의 차이를 반영하며 힘의 차이는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생사를 가르는 기준이 되었다.

외환위기: 약자의 도태와 강자의 정글

외환위기는 공식적으로 1997년 11월 7일 환율절하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위기는 1996년부터 시작되었다. 1995년부터 수출이 줄면서 내수가 위축되었고 1996년 이틀에 하나씩 189개 건설회사가 파산했다(그 중 대다수는 대형건설사들이었다). 건설업이 무너지면서 철강수요가 줄어든데다 자동차, 기계, 전자, 조선업 등 수출부문의 수요감소가 겹치면서 1993-95년 반도체 호황으로 내수경기가 좋을 때 시설을 확장한 한보, 삼미, 기아가 차례로 무너졌고 역시 호경기 때 사세를 확장했던 해태, 뉴코아, 대농, 진로, 한신 등 내수부문의 재벌들이 무너졌다. 1999년 5대 재벌 중 대우가 파산할 때까지 25개 재벌이(이중 40%는 외환위기 직전에) 빚의 무게에 압사당하면서 외환위기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정작 수출을 주도하던 삼성, LG, 현대, 대우는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았다. 대우의 파산은 자동차 산업에 무모한 투자를 한 것이 원인이지 전자산업과는 무관하다. 1995년 주력인 반도체 부문의 수익이 감소하자 삼성전자는 TV, 냉장고, 핸드폰 등의 마케팅에 주력했다. 1996년 반도체 판매가 17% 감소했지만 비 반도체부문 매출이 31% 증가하여 삼성전자의 1996년 매출은 1995년을 상회한다.

‘계란은 한 바구니에 담는 것이 아니다’는 속담처럼 다각화는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러나 2류 재벌들은 그러한 전략을 구사하기엔 너무 작았다. 리스크를 분산하지 못하고 대부분의 매출을 자동차, 철강, 건설, 유통 등 특정 시장에 의존하던 한보, 삼미, 기아. 해태는 파산할 수 밖에 없었다. 2류 재벌들이 무너지면서 상위재벌들의 경제지배력은 더욱 강화된다. 1996년에서 1999년 30대 그룹 중 4대 그룹의 자산은 전체의 48%에서 58%로 증가하였다.

규모와 효율성의 패러독스

경제의 집중도가 높으면 기업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어떤 중간재를 만들던 그룹 안에서 대량으로 소화할 수 있으므로 다양한 시장에 진출하는 것이 합리적이며 경제전체로 볼 때 제품의 다양성이 줄어든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부에서 해결하는 수직계열화는 거대한 고정비용을 만든다. 부품과 원료를 내부에서 조달한다면 중간재를 공급하는 자회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동일한 투자로 되도록 더 적은 품목에 더 많은 물량을 만들어야 비용을 낮출 수 있고 그룹 전체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그러므로 재벌은 소수의 산업에서 적은 품목의 제품을 만들게 되었고 철강, 자동차, 전자제품, 반도체 등 규모가 클수록 유리한 시장에서 세계적인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윤율보다는 규모와 시장점유율을 우선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시장구조에서 재벌이 만드는 제품의 다양성은 줄어들었고 반도체 등 재벌의 주력시장이 침체된 것이 외환위기의 원인이 된 것처럼 해당 시장의 주기에 따라 재벌에 의존하는 한국경제 역시 번지점프를 하면서 외적 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갖게 되었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과 (경제집중도가 낮은) 대만의 반도체 산업을 비교하면 한국은 시장규모가 큰 메모리에 특화되어 있었고 대만은 특수한 목적에 맞춘 소량, 다품종 생산에 특화되어 있었다. 물론 장난감 강아지가 ‘왈왈’ 짖는 소리를 내는데 쓰이는, 주문자의 필요에 맞추는 칩들이 반도체 시장의 꽃이라 할 수는 없고 그러한 차이는 수출규모의 차이로 나타났다.

미국의 산업분류에 따르면 당시 메모리는 6종류로 분류되었고 반도체 전체는 50가지로 나누어졌다. 한국과 대만은 50종류의 반도체를 거의 모두 생산하고 있었다.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1994년 미국에 $38억를 수출하여 $17억을 수출한 대만의 2배를 수출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한국업체들이 규모가 큰 메모리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38억 중 $21억는 메모리로 $2억3천만를 수출한 대만의 10배였다. 당시 삼성, LG, 현대 3사가 메모리를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 금액은 엄청난 것으로 세 재벌이 반도체 산업에 어느 정도로 올인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92~94년 DRAM 가격이 오르면서 한국의 메모리 수출단가는 $5.5에서 $15로, 대만은 $3에서 $7로 올랐다. 이러한 단가 차이는 대만이 한국보다 저가 칩에 특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메모리 이외의 반도체에선 대만과 한국의 수출단가 차이는 거의 없어지며 대만이 저가, 저급품에 특화되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메모리 수출단가의 차이는 한국의 재벌이 대만보다 자본/기술집약적 산업을 선호한 것이 원인이며 반도체뿐 아니라 상위 재벌들이 자동차, 철강, 석유화학 등에 특화한 것 역시 동일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리스크가 크게 마련이다. DRAM 가격이 오르면서 공급이 늘었고 공급이 늘면서 1995년 $54이던 16M DRAM의 가격은 1996년 $13, 1997년 $3로 폭락한다. 메모리 가격이 떨어지면서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대만은 다른 제품을 팔아 충격을 비껴갔지만 수출의 12%를 메모리에 의존하던 한국은 충격을 완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외환위기를 겪게 된다.

1995년 30%에 달하던 수출증가율은 1996년 마이너스로 돌아선다. 반도체뿐 아니라 1996년 한국의 주력시장인 석유화학, 철강, 전자 시장에서 평균수출가격은 1995-96년 6%, 1996-97년 15% 떨어진다. 그러나 다양한 제품을 수출하는 대만의 수출단가는 같은 기간 한국의 반정도 떨어지는데 그쳤다.

그러나 수출이 어려워지면서 파산한 것은 수출기업이 아니라 건설, 철강, 유통 등 내수업종에 종사하는 2류 재벌들이었다. 충분히 다각화되어 있는 상위재벌들은 리스크를 회피하기에 충분히 다양한 제품군을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상위재벌들에게 자원이 집중된 결과 경제 전체로는 다양성이 작아질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외부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로 나타났으며 그 극적인 결과가 외환위기였다.

철강, 건설업종의 과잉투자를 외환위기의 원인이라 말한다. 상위재벌이 지배하는 전자, 자동차 등과 달리 철강, 건설업은 진입장벽이 낮은 업종이었다. 외환위기로 무너진 2류 재벌들은 5대재벌의 지배력이 덜한 업종에 진출할 수 밖에 없었다.  수출수요가 갑작스럽게 감소하면서 경제전체가 충격을 받았을 때 5대재벌에선 1/5이 2류 재벌에선 반이 3류 재벌은 1/3이 무너져 2류 재벌이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다.

외환위기의 유산: 경기양극화

21세기 한국경제의 특징은 불황과 저성장의 만성화이다. 80년대의 3저호황, 90년대의 반도체 호황기에는 경기상승이 몇 년간 지속되었고 성장률도 높았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호황기에도 성장률은 높지 않은데다 그나마 경기상승이 오래 지속되지도 않는다.

이러한 특징은 90년대 중반 이후 반도체 중심의 IT산업이 한국경제의 주력이 되었기 때문이다. 2005년 수출에서 IT 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36%에 달했고 2000년대 이후 수출은 매년 두 자리 성장률을 유지했지만 경제성장률은 4~5%로 크게 낮아졌다.

IT산업의 생산유발효과는 1.628로 산업평균 1.659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IT산업에서 1000원을 팔면 다른 산업에서 628원을 번다는 말이다). 그러나 부가가치 유발계수는 0.548로 전산업 평균 0.714에 비해 크게 낮다(IT산업에서 1000원을 지출하면 경제전체에서 만들어지는 부가가치는 548원이란 의미이다). 부가가치 유발계수가 낮은 이유는 국내업체의 부품, 자본재의 품질이 높지 않기 때문에 IT산업이 버는 돈이 국내에 머물지 않고 중간재와 자본재 수입을 통해 해외로 나가는 비율이 다른 산업보다 높기 때문이다.

IT산업의 취업유발계수 역시 높지 않다. IT산업이 10억 원을 더 생산할 때 늘어나는 고용은 1990년 33명에서 2000년 11.8명으로 감소하여 전체산업 평균인 20.1명(2000년)에 크게 못 미친다. 2000년 이후 IT산업의 생산은 20%씩 증가했지만 고용은 6%가 늘었을 뿐이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수출이 늘면 ‘수출증가→소비증가→투자증가→수출증가→소비, 투자증가’의 사이클로 이어졌다. 그러나 국내경제와 연관효과가 낮은 IT산업이 주력이 되면서 수출과 내수의 연관관계는 끊어졌다. 더 심각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내수가 위축되고 IT산업의 수출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더욱 커지면서 세계 IT경기에 따라 국내 경기도 널뛰기를 하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IT부문에 특화한 것이 잘못은 아니다. IT부문으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경제는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산업의 투자가 없다는 것이다. 투자가 없기 때문에 성장률도 없고 고용도 늘지 않는다. 고용이 늘지 않으니 소비도 늘지 않고 소비가 늘지 않으니 투자도 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10% 이상 성장을 기록한 산업의 수는 80년대 8개, 90년대 5개에서 2000년대에는 (IT산업을 제외하면) 1개로 줄었다.

시장의 복수: 돈들의 방황

외환위기 이후 외형경쟁전략은 수정되었다. 그러나 재벌이 외형상으로는 해체되더라도 계열사 간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일본의 자이바쓰(財閥)이 해체된 후에도 계열사간의 관계는 그대로 남아 케이레쓰(系列)가 만들어진 것처럼 전직 재벌인 기업은 거의 모든 매출을 이전에 속해있던 재벌로부터 벌어들인다.

외환위기 이후 투자가 부진한 것은 재벌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제구조는 그대로이지만 재벌의 경영전략이 이전의 문어발로 불리던 공격적 경영에서 수익성과 안정성을 중시하는 보수적 경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제 지금 당장의 주가와 배당을 우선하는 주주들의 견제를 받는 상황에서 오너(또는 경영자)가 과거처럼 수익성이 낮더라도 장기적인 성장을 위해 과감하게 투자하기는 어렵고 투자를 한다면 분명한 가시적 성과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투자의 기대수익률은 올라갈 수 밖에 없으며 기대수익률이 높아진 만큼 과거보다 투자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표1).

표1 투자결정 시 목표수익률 (SERI)
                             1977~1996                   1997~2004
                          제조업        대기업          제조업          대기업
목표수익률        -18.3%        -16.0%        1.21%        16.2%

2000~2005년 설비투자 증가율은 1.1%로 1990~1997의 7.8%를 크게 밑돌았다. GDP가 1% 성장할 때 설비투자는 1.26% 증가하는 것이 적정비율이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투자는 이전의 과잉과 반대로 과소상태에 머물고 있다(그림2).

그림2 과잉/과소 투자율 (SERI)

외환위기 이전 -0.4%이었던 한국기업의 수익성은 2002년부터는 몰라보게 좋아져(그림3) 미국과 일본기업의 평균수익률인 4.82%, 4.14%와 비슷해졌고 투자효율성을 나타내는 총자산회전율은 미국(0.91)과 일본(0.99)기업보다 더 좋아졌다(그림4, 회전율이 2이면 1,000원을 투자해 1,000원을 다시 회수하는 사이클이 1년에 2번 반복되고 1이면 1번 반복된다. 회전율이 높으면 투자금을 회수하는 기간이 짧다는 의미이고 회수기간이 짧은 만큼 이윤율은 높아진다).

그림3 순이익률 (한국은행)

그림4 총자산회전율 (한국은행)

부채율은 90년대 후반 평균 3.93배로 미국(2.58배)과 일본(2.87배)에 비해 월등히 높았으나 재무구조 개선 노력으로 2000년대 초반에는 평균 2.24배로 미국(2.52배)과 일본(2.46배)보다도 낮아졌고 2005년에는 역대 최저치인 1.86배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재무구조 개선 노력으로 부채율이 낮아진 것 자체는 바람직하지만 마냥 좋게 볼 수만은 없다.

1990~97년 기업의 자금부족규모는 연평균 40.5조원이었지만 1998년 이후엔 35.6조원이 되었다(그림6). 물론 이윤율이 개선되면서 내부자금이 늘었기 때문에 차입을 늘릴 필요가 없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투자하는데 돈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대기업이 은행, 주식 채권시장에서 조달하는 자금규모는 대폭 감소하였다. 1998년 투자재원에서 외부자금의 비중은 69.8%였지만 2004년에는 내부자금 비중이 74.3%를 차지하였다. 2006년 상장기업의 1/3 가량은 사실상 무차입 경영을 하고 있었다

그림5 기업의 자금 부족률 (한국은행)

벤처의 백일몽

낮아진 부채비율, 개선된 이윤율 등 수치상으로 재벌개혁은 성공적으로 보인다. 외환위기 이전과 비교하면 은행의 경영은 신중해졌으며 정부의 규제도 강화되었고 대기업의 지배구조는 몰라보게 개선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재벌에 경제력이 집중된 현실에서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덤빈 결과는 수출과 내수의 순환구조를 끊어버리는데 한몫 거든 것 외에는 별 다른 것이 없다. 그 결과 위기가 만성화된 지금에 와서 보면 무엇을 위한 개혁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수익성이 좋아진 만큼 이전처럼 부채에 의존하지 않아도 자체보유자금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경제민주화를 명분으로 한 재벌개혁으로 기대수익률이 올라갔기 때문에 투자는 위축되었고 기대수익률만큼의 수익을 올릴 곳이 마땅치 않아 투자되지 않은 돈은 기업 내부에 쌓일 뿐이다. 더군다나 주식시장에서 배당을 중시하는 외국인 보유주가 늘어나고 M&A에 대한 경영권 방어를 위해 ‘총알’을 쌓아둘 필요가 늘어나면서 투자를 하는 대신 현금으로 비축해두는 비율이 올라갔다(표2).

표2 제조업종 대기업의 현금흐름대비 투자비율 (%, 금감원)
1995        1996        1997        2001        2002        2003        2004        2005
186.1        319.5        333.9        67.1        44.5        53.7        56.2        79.1

문제의 근원은 소수 대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나 10년 전이나 재벌은 다각화되어 있었지만 경제는 다각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위기를 겪은 경제는 개혁이 필요했고 경제의 활력은 재벌이 아닌 다른 데서 찾는 것이 바람직했다.

외환위기 직후 은행대출을 독점하던 재벌들이 부채비율을 줄이고 내부정리에 바빠 자금수요가 줄면서 돈이 벤처와 중소기업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1999년 벤처기업은 GDP의 4.8%를 차지했고 18만 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성인인구의 9%는 설립된 지 3.5년이 안된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2만개의 벤처기업을 육성하여 2005년까지 GDP의 18%, 120만의 일자리(1998년 30대 재벌의 비중은 GDP의 12%, 고용 73만이었다)를 만든다며 ‘재벌경제로부터 벤처경제로’의 이행을 내세웠던 김대중 정부의 산업정책이 실효를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테헤란 밸리

그러나 은행이 정부가 요구한 BIS 자기자본 비율 제고를 위해 수익성을 내세우고 안전한 가계대출에 몰두하면서 중소기업 대출이 감소한데다 위기가 진정된 후 재벌들의 구호가 구조조정에서 ‘e-commerce’로 바뀌면서 문어발이 부활한 후 벤처 육성은 용두사미로 끝났다.

벤처기업들이 개척해놓은 영역에서 후발주자였던 재벌은 자금력과 조직력을 내세워 비중을 키워갔다. 인터넷 상거래의 핵심분야인 B2B사업의 경우 1999년 재벌이 64.4%를 차지한다. 삼성은 포탈사이트(유니텔), B2B(삼성물산, 삼성SDS 등), B2C(삼성물산, 유니텔 등), 콘텐츠(삼성전자, 유니텔, 삼성물산, 제일기획, 에버랜드, 삼성경제연구소 등), 컨설팅(삼성SDS, 삼성종합기술원 등), 무선인터넷(삼성전자, 삼성물산 등) 등 인터넷 관련사업 전 영역에서 지배력을 확보했다.

개혁: 무원칙의 원칙론

외환위기 이후 10년을 끌고 있는 재벌개혁은 구체적 각론에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과가 그렇게 된 것에는 처음 목표가 잘못된 것이 원인이지만 그 과정 역시 문제를 키웠다.

외환위기 이후 경기양극화가 구조화되면서 소득양극화가 문제가 되고 있지만 OECD 국가 중 한국의 소득불균형은 여전히 낮은 편이다. 외환위기 이후 악화된 것은 소득분포보다는 실업률이다. 2000년 이후 실업률은 4%대를 유지하고 있다. 외환위기를 넘기고 살아남은 재벌들은 수출로 돈을 벌고 있다. 그러나 수출이 잘되면 내수경기도 좋아지던 경기순환이 끊기면서 실업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불경기는 재벌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다. 2000년대 이후 재벌이 원칙을 안 지킨다며 개혁의 대상이 된 이후 원칙을 요구하는 정부와 시민단체의 행동은 (중국인들이 원칙이 없다며 한국인을 ‘적반하장 매니아’라 부르는 것처럼) 원칙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99년 삼성자동차의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이건희 회장은 삼성자동차 부채처리를 위해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내놓겠다고 말했고 정부는 생명보험사 상장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힌다. 그러나 정치권과 시민단체의 반발에 부딪힌 정부는 삼성생명의 상장 여부에 관계없이 이건희 회장이 2조 8천억 원을 책임져야 한다며 사재출연을 요구한다.

삼성자동차는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주주는 출연한 자본만큼 책임을 지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너무도 당연한 원칙은 국민정서나 이익단체 그리고 정치권의 이해관계에 따라 바뀌어야 했고 삼성자동차 부채문제는 지배주주의 사재출연으로 해결되어야 했다.

지배주주에게 사재출연을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삼성이 현실적 대안으로 내걸었던 삼성생명의 상장도 여론의 변덕에 맡겨졌다. 보험사는 주식회사이다.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계약자에게는 보험약관에 의한 서비스만을 제공하면 되고 상장에 따른 이익은 주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상장은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여론의 반발에 부딪혀 생명보험사를 상장시키지 못하고 계속 유보했다.

이해집단, 시민단체, 정치인, 그리고 정부의 행동은 삼성자동차 부채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으며 법정으로까지 가게 했다. 삼성자동차 부채 처리는 삼성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재벌에겐 ‘법대로’를 말하면서 그것을 말하는 사람은 적반하장으로 무원칙할 때 내용을 떠나 개혁의 신뢰성은 떨어질 수 밖에 없고 그 결과 역시 좋을 수가 없다. 기아사태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국민기업이라는 여론을 등에 업고 경제논리를 배격하고 정치논리로 처리한 결과는 기아자동차의 부실만 키웠고 한국경제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했다.

사람들은 모든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하자고 주장한다. 모든 이해관계자들의 의견과 여론을 수렴해 다수결의 원칙으로 해결하자는 것이다.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면서 경제논리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이처럼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수결이란 언제든지 의사결정의 결과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변덕스럽고 경제원칙에서 벗어나 문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시장에서 다수결은 무의미하다. 시장에선 결과만 중요하다. 문제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다.

개혁이란 이름의 메아리: 문어발은 질기다

외환위기는 외형성장전략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1998년 삼성은 매달 1,700억의 손실을 보고 있었다. 삼성 정도의 덩치도 파산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경영진은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1938년 창업한 이래 최악의 재난이 된 삼성자동차는 4조7천억 원의 부채를 남기고 사라졌다. 세계시장에서 겨룰 수 있는 자동차를 만들겠다던 이건희 회장의 포부는 외환위기 이후 ‘작게 생각하자(Think Small)’로 바뀌었고 삼성의 구조조정은 재벌들 중 가장 공격적이었다. 1999년 삼성은 석유화학, 건설, 항공과 일부 반도체 부문 등 100여 개의 자회사를 정리하여 4조에 달하는 자산을 매각했고 종업원 수는 30%가 줄었다. 삼성의 구조조정은 시장의 인정을 받는다. 1999년 삼성의 규모는 5대재벌 총자산의 1/5에 불과했지만 시장가치는 1/2을 넘어서고 2004년 삼성전자의 주가총액은 소니를 추월하여 아시아에서 도요다 다음이 되었다.

라스베가스 CES 2006 삼성 부스

삼성뿐만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현대자동차는 세계 6위의 자동차업체로 성장했다. 현대자동차의 성공비결은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한 것이다. 그룹에 남아있었다면 현대자동차는 현대건설과 하이닉스 같은 부실회사를 살리는 돈줄이 되었을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이라면 삼성자동차의 매각(실질적으로는 파산)과 현대자동차의 분리는 생각할 수 없는 일로 ‘감히’ 재벌을 개혁하는 첫 번째 대통령이 되겠다던 김대중 정부의 ‘치적’이 되었고 재벌개혁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작이 갑작스러웠던 것처럼 그 끝도 갑작스러웠던 외환위기는 20세기의 끝을 장식하면서 21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화려한 불꽃놀이였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정착된 2000년대 체제에서 과거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었을 뿐이다. 총론은 옳았지만 재벌 중심으로 돌아가는 경제구조는 바뀌지 않았고 경제민주화를 내건 재벌개혁은 소수 거대기업에 의존하기 때문에 외적 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했을 뿐이며 경제의 활력을 마비시켰다. 10년이 지난 지금 재벌개혁은 공허한 명분이 되어 울릴 뿐이고 그 명분조차 정략적 계산에 따라 변질되었다. 90년대 러시아와 아시아의 경제개혁이 남긴 교훈은 기업에겐 ‘기업이 누구의 소유인가?’가 아니라 ‘기업이 시장의 요구에 따라 움직이는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석우

32호
2007.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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