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퇴임한 고이즈미 전수상이 역사에 어떻게 남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고이즈미가 수상으로 재직한 5년 5개월은 따분하기 짝이 없는 전후 일본의 정치사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때로 기억될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역사책의 삽화에는 겁없이 자민당이란 풍차에 돌진하는 고이즈미가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돈키호테와 달리 고이즈미는 자민당이란 괴물을 무찔렀다.
정치의 엔터테이너: 라이온 하트(Lion Heart)
고이즈미 주니치로(1942~ , 小泉純一郎)의 재미있는 점은 그가 재미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수상은 파벌간의 뒷거래로 오르는 자리였다. 인기와는 상관없는 정치인이 따분한 사람들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에두르기에 능한 일본 정치인답지 않게 솔직하고 카리스마와 개성이 넘치는 고이즈미는 정치를 충격과 변화, 성공과 실망이 있는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한편의 드라마로 만들면서 일본정치의 논리를 바꾸었다.
미디어 스타들처럼 고이즈미는 뛰어난 스타일리스트이다. 10여 년간 일본에서 개혁은 ‘말 잔치’에 불과했다. 변화가 필요할 때 사자갈기 같은 그의 헤어스타일로 타협을 모르는 외로운 사자의 이미지를 만든 고이즈미는 하품 나게 따분한 일본정치를 락 스타의 이벤트로 만들었다.
2001년 자민당 총재경선에서 현직 수상이며 최대파벌의 보스인 하사모토 류타로가 재선출되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1955년 이래 (1993~94년의 10개월을 제외하고) 제1당 자리를 지켜온 자민당의 총재는 수상과 동의어이다. 파벌이 지배하는 자민당에서 파벌 보스들이 합의한 후보가 총재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당내경선은 합의를 확인하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1995년과 1998년의 총재경선에서 떨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3개 소수파벌의 지지 밖에 얻을 수 없었던 고이즈미는 전략을 바꿔 (당의 늙은 너구리들이 생각하기엔) 더티 플레이를 벌인다. 당의 일은 당에서 해결한다는 묵계를 깨고 고이즈미는 거리로 나가 ‘자민당을 바꾸자, 일본을 바꾸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당원이 아니라) 시민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10년간 경제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민당은 대도시와 대기업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자민당은 경기부양을 한다며 당의 지지기반인 소기업과 농촌에 돈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정부부채가 $6조 또는 GDP의 130%로 늘어나 이자만 갚는 데도 예산의 70%를 써야 했지만 경제는 살아나지 않았다. 2001년 실업률은 공식통계로 5%(350만 명), 비공식 집계로는 10.4%(738만 명), 여기다 회사 내의 잉여인력으로 분류되는 인원까지 더하면 13.5%(천만 명)에 달했다. 자민당은 나라보다는 당의 지지층을 우선하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러나 마땅한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정치에 냉소적이 되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거리로 나와 ‘바꿔! 바꿔!’를 외치는 고이즈미는 요미우리 신문과 아사히 신문 등의 유력언론에 의해 기존질서에 대한 반역자, 개혁자로 그려지면서 일본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유일한 정치인으로 선택된다.
8000엔짜리 현란한 파마 머리, ‘건전한’ 보수 정치인과는 무관한 ‘화려한 싱글’을 고집하는 라이프스타일, 락 그룹 X-Japan의 ‘Forever Love’를 즐겨 부르며 바그너와 엘비스 프레슬리를 동시에 소화하는 별난 취미를 강조하면서 언론은 자민당의 늙은이들과 다른, 젊은 세대와 공감하는 대안으로 고이즈미를 소개한다.
마침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도시지역 당원 230만(65%)의 지지를 얻어 고이즈미는 대의원 141명 중 123표를 얻었고 자민당 의원 346명중 175표를 얻어 총재직에 오른다.
자민당을 바꾸자 일본을 바꾸자
고이즈미가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2001년 4월까지 10년간 10명의 수상이 자리를 바꾸었다. ‘자민당을 살리기 위해 자민당을 파괴할 것’이라 공언하는 고이즈미가 5년 5개월을 갈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은 없었다.
고이즈미의 최대 과제는 10년을 끈 불황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었다. 미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이즈미는 그 많은 공적자금을 쏟아 붇고도 경제가 엉망인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치인 가문에서 태어나 말을 배울 때부터 정치를 배웠고 수상이 되기 전까지 10선 의원이며 장관직에 4번 오른 경력을 가진 고이즈미는 정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이즈미의 당면 과제는 당에서 살아남는 것이었다. 파벌 보스도 아니고 당 주류조차 아닌 고이즈미의 유일한 무기는 대중적 인기였고 개인적 인기를 이용하여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불경기는 선거의 적이다. 선거에서 이기려면 경제를 살려야 하고 경제를 살리려면 전임자들이 쌓아올린 천문학적인 부실채권과 정부부채를 줄여야 했다. 고이즈미는 2005년 3월까지 부실채권을 반으로 줄이고 예산을 동결하여 재정적자를 내지 않겠다고 공약한다.
2차 대전 이후 금융위기를 겪은 나라는 많지만 5년 넘게 위기를 해결하지 못한 나라는 스위스, 스웨덴, 핀란드 3나라 뿐이다. 이들 나라에서 금융위기가 해결된 것은 다른 나라들처럼 은행의 부실을 처리한 다음이었다. 10년을 끈 일본의 불황을 끝내려면 금융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부실채권과 정부부채를 줄이는 손쉬운 방법은 세금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세금을 올리는 정치적 자살 대신 고이즈미는 문제의 구조적 원인인 자민당을 개혁한다.
플라자 합의와 버블경제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세계를 정복할 것 같던 일본은 1990년대 이후 비효율, 부패, 무능의 대명사가 되었다. 극단적으로 바뀐 두 가지 평가 모두 일본의 진실이라는 것이 10년을 끈 헤이세이(平成) 불황의 원인이다.
헤이세이 불황의 직접적인 원인은 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5년 미국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의 쌍둥이 적자를 해소하겠다는 미국의 강요로 맺은 플라자 합의에 따라 엔화의 가치는 달러당 260엔에서 150엔으로 2배가 오른다. 급격한 환율상승으로 경기가 하강할 것을 걱정한 일본정부는 이자율을 낮추고 적자재정을 편성하여 시중에 돈을 풀어 경기를 띄웠고 인위적 경기부양의 부작용인 거품이 터지면서 헤이세이 불황이 시작된다. 그러나 거품이 터지고 불경기가 시작되었을 때 사람들은 의례 있기 마련인 경기순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10년간 불황이 지속된 것은 전후 일본경제의 기적을 만든 시스템이 ‘기적’ 후에도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경제의 얼굴인 자동차, 전자, 기계산업이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50~60년대 정부주도의 산업화 덕분이다. 태평양전쟁 이전에 항공모함을 만들었던 일본은 정부개입 없이도 ‘기적’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단기간에 기적을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본경제의 기적을 이루는데 일본정부의 공을 부정할 수는 없다. 문제는 1970년대 일본경제가 성숙기에 들어가 정부의 인위적 개입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상황에서도 정부가 시장을 압도하는 시스템이 그대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식 복지국가: 약자의 이름으로
1955년 양대 보수정당인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만들어진 자민당의 지지기반은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며 퇴직 후 당의 인적 기반이 되어주는 관료와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대기업, 지역구의 선거운동을 대신해 주는 단위 농협이었다. 이제 막 창당된 자민당은 노조의 지지를 받는 사회당보다 나라에 더 쓸모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태평양전쟁 후 먹기 살기 어려운 상황에서 자민당은 누구나 필요성을 느끼던 ‘경제재건’을 내건다. 그리고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표1).
표1 일본의 경제성장률 (%)
1952-55 8.6
1956-60 8.7
1960-64 11.3
1964-68 10.6
1968-72 10.4
1973-77 4.2
그러나 1973년 1차 오일쇼크 이후 자민당의 정책은 경제성장을 위해 경쟁력 있는 산업을 육성하는 것에서 기업을 보호하고 실업을 막기 위해 경쟁력을 잃은 산업을 보호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꾼다.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1950~60년대 고도성장기와 달리 전세계적으로 장기불황이 시작된 1973년 이후(표1) 일본 제조업의 절반(전체고용의 1/3)이 수요부족에 따른 만성적인 공급과잉 문제에 시달린다.
섬유, 목제가공업과 같이 이미 경쟁력을 잃은 노동집약적 산업뿐만 아니라 철강, 화학, 시멘트, 제지, 유리, 비철금속 등 자본집약적 산업 역시 공급과잉에 시달린다. 이들 자본집약적 산업은 60년대 고도성장기를 이끌었지만 고유가와 엔고로 가격경쟁력을 잃은데다 자동차, 기계, 전자 등 성장부문의 수요가 감소하면서 1973년 이후 이들 산업의 성장률은 사실상 0%에 가까워진다. 문제는 제조업에서 이러한 사양산업의 고용비중은 15%에 불과하지만 자산비중은 40%를 넘는다는 것이다.
합리적 해법은 미래가 없는 산업에 투입된 자원을 성장부문으로 돌리는 것이다. 일본정부는 점진적인 퇴출을 유도하기 위해 ‘산업합리화’란 이름으로 무역장벽을 쌓아 국내시장을 보호해주는 대신 해당산업의 가격과 생산량을 조절하여 적정 이윤을 얻으면서 점진적으로 생산설비 감축을 합의하기 위한 카르텔을 조직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수십 개의 산업에 만들어진 수천 개의 카르텔은 공급과잉을 해결하기 위해 생산설비를 감축하는 대신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 이용된다. 경쟁이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시장이라면 가장 효율적인 생산자의 가격에 맞춰 시장가격이 형성되어 그 가격에 맞출 수 없는 생산성이 낮은 회사는 퇴출된다. 그러나 일본의 카르텔은 산업 내에서 가장 비효율적 생산자의 가격에 다른 회사들의 가격이 맞추어져 산업의 생산성은 시장의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수준으로 하향평준화된다. 1960년부터 1973년 사이 일본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9.6%로 OECD 평균의 2배였지만 카르텔이 조직되어 생산성 증가율이 악화되면서 1973년부터 1989년 사이 성장률은 3.8%로 떨어진다.
처음의 의도와 달리 산업합리화가 산업비합리화 정책으로 변질된 것은 1970년대 세계적으로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기업들이 새로운 투자처를 찾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정치자금과 표를 의식한 정치권의 이해와 기업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정부의 목표는 세계시장의 승자를 키우는 것에서 국내시장의 보호막 아래 연명하는 패자를 돌보는 것으로 돌변한다. 이후 일본은 세계시장의 강자들이 군림하는 수출부문과 약자들이 연명하는 내수부문의 고장 난 ‘이중경제(Dual Economy)’로 바뀐다.
두 얼굴의 일본(Two Japans)
밖에서 본 일본은 세계수준의 기술력과 생산성으로 무장한 자동차, 전자, 기계산업을 거느린 경제대국이지만 안에서 본 일본은 다른 세상이다. 한때는 세계적 경쟁력을 자랑하던 섬유, 철강, 석유화학산업과 통신, 교통, 금융, 전기, 유통 등의 내수부문은 세계시장의 살인적 경쟁으로부터 단절된 국내시장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며 돈 잘 버는 수출기업에 기생하는 것으로 연명한다. 도요다와 같은 세계적 강자는 일본경제의 20%에 불과하며 이들이 나머지 80%에게 사들이는 원자재와 서비스는 국제가격보다 휠씬 높은 가격이다(그림1). 미국보다 50% 비싼 운임은 유통과 여행업의 목을 죄고, 미국보다 30~40%가 비싼 유가와 전기료, 75% 비싼 임대료 역시 경제 전체의 비용을 올린다.
그림1 일본의 시멘트 가격 (천엔)
일본의 고비용 구조는 효율적인 부문에서 비효율적인 부문으로 소득을 재분배하는 일종의 경제적 복지제도였다. 그러나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가 2배로 뛰어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고비용을 부담할 수 없게 된 수출기업들이 생산기반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1980년대 일본 언론의 화두이던 산업공동화가 시작된다. 도요다가 만드는 자동차의 반은 일본 밖에서 만들어진다. 더 이상 ‘도요다에 좋은 것은 일본에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수출부문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일본경제의 생산성은 비효율적인 내수부문의 수준으로 하향평준화된다. 생산성이 낮다는 것은 같은 금액을 투자해서 더 낮은 이윤을 얻는다는 말이다. 낮은 이윤을 극복하려면 생산성을 올려야 되지만 투자되는 돈의 절대량을 부풀려 이윤의 절대량을 늘리는 것도 방법이다. 80년대 후반 엔고를 상쇄하기 위해 경기부양책을 쓰던 일본 정부는 역대 최저수준인 2.5%대로 콜금리를 낮추었고 이자율이 떨어져 어느 때보다 ‘돈값’이 싸지면서 일본기업들은 마구잡이로 대출을 늘려 신규투자를 벌이면서 수출부문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가려주었다. 버블이 절정에 달한 1990년 기업투자는 GDP의 19%에 달했다.
그러나 돈이 풀리면서 부풀어 오른 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거품이 견디기 힘든 수준이 되면서 1989년 일본은행은 4.5%로 이자율을 현실화한다. 이자율이 올라 거품이 터지면서 빚으로 쌓아 올린 신규투자의 대부분은 이윤을 낳지 못하는 잉여설비로 전락했고 설비투자가 멈추면서 경제는 성장을 멈춘다.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서: 빈혈에 걸린 경제
일본의 이중경제는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려 수출부문을 해외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일본의 물가수준을 세계 정상급으로 올려놓아 소비자의 실질소득을 감소시켰다. 실질소득 즉 쓸 돈이 적으면 당연히 소비는 줄어든다. 현재 일본 가구의 실질소득은 1980년 수준보다 작고 GDP에서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OECD 국가보다 휠씬 낮은 수준이다.
물건을 만들어도 그 물건을 소비할 수요가 없다면 ‘수요와 공급의 총량은 같다’는 경제법칙에 따라 경제의 공급능력은 수요수준에 맞춰 낮아질 수 밖에 없다. 물론 국내소비가 부족하다면 수출로 빈자리를 메우면 된다. 1973~85년 일본의 경제성장은 절반이 수출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의 가치가 2배가 되면서 1985년 GDP의 4.3%에 달하던 무역흑자는 1989년 1%로 줄어든다. 부족한 내수를 대신하던 수출이 1986년 이후 GDP의 3%만큼 줄어들면서 일본경제는 성장을 멈춘다.
내수도 수출도 안 된다면 정부의 지출로 부족한 수요를 메우면 된다. 그러나 적자재정은 기업의 투자와 가계의 소비를 되살릴 때까지 쓸 수 있는 일시적인 자극제일 뿐이다. 정부지출이 부족한 수요를 영원히 대신할 수는 없다. 1990년대 일본 정부가 매년 GDP의 7.8%에 달하는 재정적자를 낸 결과 2001년 공공부채는 GDP의 150%에 달하는 700조 엔(전세계 총부채의 12%, 공사의 부채를 포함하면 10,000조 엔, 지불될 연금과 의료보험을 더하면 20%)에 이르렀다. 정부부채를 만엔 권으로 쌓아 올리면 후지 산 높이의 800배이다. 2005년에는 부채의 이자 지급만으로도 GDP의 10.5%를 써야 했다.
1990년대 정부의 경기부양 덕분에 불황이 더 악화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지만 천문학적인 돈을 소모하고도 불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1998~2002년 GDP는 6.4%, 실질소득은 5% 감소하였다.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OECD 평균보다 50% 이상 비싼 살인적인 물가수준을 낮추어 소비를 살리는 것이다. 식품가공산업은 자동차와 철강산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인원을 고용하고 있지만 생산성은 미국의 1/3이다. 미국과의 생산성 차이를 반으로 줄이는 것만으로도 식품가공산업은 6% 이상 성장할 수 있다. 1990년대 미국의 호황을 이끈 것은 IT 등의 하이테크 산업보다 유통, 금융과 같은 구경제부문의 생산성 증가였다. 일본의 내수산업이 20년간 미국의 생산성을 따라잡는 것만으로도 일본경제는 매년 1.5% 성장할 수 있다.
내수부문의 생산성이 개선되면 일본경제의 고질병인 수요부족 역시 해결된다. 미국인은 소비의 10%를 식료품에 쓰지만 일본인은 23%를 쓴다. 생산성이 개선되거나 수입장벽을 풀어 식료품 가격이 내려간다면 식료품에 묶인 돈이 다른 재화에 돌려져 소득증가 없이도 수요는 자동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낮은 생산성은 경쟁과 수입을 막아 비효율적인 산업을 보호하는 정치의 문제이다. 개혁은 언제나 누군가 손해를 보는 장사이다.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에게 개혁을 요구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손해로 시스템이 바뀌는 것’이다.
1998년 ‘세계를 실망시키는 일본의 놀라운 능력’이라는 이코노미스트 지의 비아냥에 대해 시이나 모토 의원은 ‘실망하지 않는 일본인의 놀라운 능력’이라 고쳐야 한다고 응수한다. 2001년 고이즈미가 수상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가 실제 어떤 능력을 보여줄 것인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들이 좋아한 것은 고이즈미의 능력이나 그가 약속한 개혁보다는 기득권을 비판하며 비장하게 개혁을 부르짖는 고이즈미의 이미지이고 그가 자신의 당과 전쟁을 벌이는 동안 무엇인가 되어간다는 안도감이었다.
야당인 민주당은 고이즈미의 개혁이 미지근한데다 그마저도 당내의 저항을 넘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유권자들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유권자들도 고이즈미도 일본경제를 개혁하려면 일본의 정치시스템을 바꾸어야 하며 수십 년간 쌓인 기득권은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개혁은 인내를 먹고 산다.
구조조정과 비용절감이란 대가를 이미 지불한 대기업들은 개혁을 원한다. 현 시스템에 투자한 것이 적은 젊은이들도 개혁이 열어 줄 새로운 기회를 원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유권자들이 개혁을 원하지만 고이즈미가 말하는 ‘성역 없는 개혁’을 정말 원하는지는 의문이다. 고이즈미보다 구체적이고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는 민주당은 선거에서 외면당해 왔다.
좀비, 걸어다니는 시체들
일본만 금융위기를 겪은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초 미국 저축은행들의 파산, 1990년대 초 스웨덴, 1997년 외환위기를 겪은 한국과 동남아에서 부실채권은 빠르게 정리되어 경제는 조기에 회복되었다. 일본정부는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정부지출을 늘리는 간접적 해법을 택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1990년에서 2005년까지 일본의 성장률은 연평균 1.3%로 잠재성장률을 6% 밑돌았다. 부실채권으로 마비된 금융시스템이 조기에 정상화되었다면 경제는 지금보다 25% 더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이 제자리 걸음을 하는 동안 1997년 이후 한국은 65%, 미국은 50% 성장하였다.
금융위기를 해결하려면 부실채권의 원인인 경제의 환부 즉 패자들이 죽어야 한다. 실제 정부가 칼을 빼기도 전에 수많은 회사, 은행, 보험사들이 무너졌다. 1994년 주센(住専, 주택대출회사)의 파산을 시작으로 1998년 (자산규모로) 세계 최대은행의 하나인 장기신용은행이 무너졌고 15개의 정유회사는 4개로, 시멘트회사는 7개에서 3개로, 14개의 제지회사가 3개로 줄었다. 자민당 역시 1993년 처음으로 권력을 내놓는다.
언론은 자학적이라 비아냥대지만 그냥 놔두면 발목을 잡는 약자들이 사라져 경제는 정상화될 것이라는 일본은행의 견해는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표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자민당 정부는 문제를 악화시킨다. 부실채권이 해결되지 않은 것은 은행을 감독하는 대장성(지금은 재무성)이 부실 해결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며 대장성이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은 자민당 때문이었다.
(비공식 추정으로는) GDP의 50%에 육박하던 불량채권의 뒤에는 ‘좀비(걸어다니는 시체)’라 불리는 불량 채무자가 있었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게 더 이상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버블이 터지면서 기존 대출의 담보 가치는 정점인 1992년에 비해 주식은 60%, 부동산은 50% 떨어졌다. 상환능력이 없는 채무자를 파산시키고 대출을 회수하더라도 담보가 쓰레기가 된 상태에서 대출은 고스란히 손실이 된다. 은행은 손실이 나면 대출금액의 70%를 충당금으로 쌓아야 한다. 손실을 인정하기 두려운 은행은 채무자를 파산시키는 것보다 ‘경기야 살아나라’고 빌며 담보가치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했고 그때까지 채무자가 죽지 않도록 돈을 더 빌려줄 수 밖에 없었다.
좀비는 이미 떠안고 있는 빚을 ‘담보’로 은행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기 때문에 이익이 없더라도 연명을 위해 가격을 후려쳐 덤핑을 할 수 있다. 이익을 무시한 좀비가 합리적인 시장가격보다 싸게 팔기 시작하면 건강한 회사 역시 같이 가격을 내릴 수 밖에 없고 출혈경쟁은 이윤율을 압박, 건강한 회사까지 부실로 몰아가면서 투자여력을 없앤다.
더군다나 건설, 부동산, 유통업종과 같이 좀비가 몰려있는 업종은 이미 과잉투자로 생산성과 이윤율이 낮아진 업종이다. 아무리 이자율이 0%에 가깝더라도 30% 이상의 과잉설비를 떠안고 있는 좀비가 새로운 투자를 할 리가 없고 투자여력이 있는 건강한 회사 역시 좀비의 경쟁압력 때문에 투자여유가 없어진다. 결과적으로 좀비가 걸어 다니는 산업은 좀비의 존재 자체가 신규투자를 방해하여 안 그래도 낮은 생산성은 더욱 낮아지며 신규투자가 없는 산업에서 신규고용이 있을 수 없으므로 실업 역시 악화된다.
불량채권 문제가 장기화되고 대부분의 은행이 국유화된 후에도 자민당 정부는 불량채권을 해결하기 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했다. 2001년 메릴린치는 30조에서 110조 엔에 달하는 불량채권을 정리하면, 일본기업의 1/3은 파산할 것으로 추정했다. 부실기업을 처리하면서 정리해고 될 인원이 실업에 더해지면 공식 실업률은 10%를 상회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좀비를 죽이지 않고 헤이세이 불황을 끝낼 수는 없었다. 고이즈미는 2003년 (한국의 자산관리공사처럼) 부실채권을 인수할 기관으로 산업재생공사(IRCJ)를 설립한다. 그러나 마비된 금융시스템을 살리기 위해 불량채권 정리를 밀어붙이는 고이즈미를 자민당에선 일본의 은행과 회사를 대량으로 파산시켜 헐값에 사들이려는 외국자본의 앞잡이라 몰아세운다. 실제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비난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있다.
고이즈미가 약속한 것처럼 불량채권을 정리하는 것과 정부재정을 정상화하는 것은 동시에 이루어지기 힘들다. 부실을 털어내 은행을 정상화하려면 부실만큼 새 자본을 투입해야 하고 부실을 정리하면서 가장 타격을 받을 부문은 지금까지 은행의 아량에 기대 연명해온 건설업, (생산성이 낮은 내수 중심의) 제조업, 소매업 등 경쟁력은 없지만 고용이 집중된 부문이다. 그러한 산업을 정리하면 실업이 대량으로 발생할 것이므로 고용보험과 같은 사회안전망이 있어야 한다. 큰 수술을 하려면 수혈할 피가 충분해야 하듯이 경제를 개혁하려면 돈다발을 준비해야 하고 파산과 실업에 따른 수요감소를 상쇄하기 위해 세금을 낮추어야 하며 결과적으로 재정적자는 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다.
2001년 마이니치 신문은 고이즈미가 진지하게 개혁을 밀어붙인다면 이미 넘쳐나는 실업자 대열에 50만에서 150만(파이낸셜 타임즈는 300에서 400만이 현실적이라 보았다)이 추가로 더해질 것으로 추정했다. 닛산 자동차가 르노에 매각된 후 21,000명이 해고되었다. 고용인구의 절반만 실업보험의 혜택을 받는 나라에서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것은 정치적 모험이다.
고이즈미의 적: 자민당
자민당의 입장에서 고이즈미의 구조개혁은 정치적 자살이었다. 반세기 동안 일본을 지배해온 자민당의 지지기반은 대기업에서 구멍가게 주인까지 서로의 이해가 같을 수 없는 거의 모든 이익집단을 포함한다. 개혁은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고 구질서에서 이익을 보던 집단은 손해를 볼 수 밖에 없다.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일본 특유의 ‘총론찬성 각론반대’가 튀어나오면서 자신의 지역구와 지지층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고 딴죽을 건다. 각종 이익집단을 대변하는 당내 파벌들이 만장일치로 개혁에 동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각제를 채택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어려운 결정을 리드하는 것은 내각과 수상이다. 그러나 당의 리더십이 파벌로 나누어져 실질적인 정책은 당내 협의체에서 파벌의 만장일치로 결정되는 구조에서 수상과 장관은 상징적 자리에 불과하다. 고이즈미의 전임자들이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자민당의 시스템에선 개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들은 무능한 수상이 되었다.
고이즈미는 시스템을 바꾼다. 그는 이권에 매여 개혁에 제동을 걸 당내 파벌 출신 대신 당 밖의 인물을 핵심부처의 각료로 임명하였으며 정책 결정은 당내 협의를 거치지 않고 수상과 내각이 모든 결정을 내리도록 의사결정구조를 바꾼다.
취약한 당내 기반을 대신하여 고이즈미의 최대 동맹군이 되어준 것은 재계와 관료들이었다. ‘말로만’ 개혁이 아니라 진짜 개혁을 원하는 재계는 경단련을 중심으로 자민당에 대한 지지를 고이즈미 개인에 대한 지지로 바꾼다. 파벌의 힘은 소속의원에게 정치자금을 대주는 능력에 나온다. 재계는 파벌에게 주던 정치헌금을 중앙당으로 돌려 정치적 힘의 원천인 돈을 당총재인 고이즈미에게 쥐어 준다.
당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구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관료들이 개혁에 저항하면 개혁은 이루어질 수 없다. 고이즈미가 개혁을 밀고 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은 대장성 관료들이었다. 대장성은 1990년대 일련의 스캔들로 상당수의 관료가 숙청당하고 금융기관의 감독권을 신설된 금융청(Financial Services Agency)에 빼앗겼으며 메이지 유신 이래 사용해온 ‘대장성’이란 유서 깊은 이름까지 빼앗겨 재무성으로 이름까지 바뀌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의 세무와 재정에 대한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었고 명예회복을 바라는 대장성 관료들을 우군으로 만들면서 고이즈미는 개혁을 이룰 실질적인 기반을 얻는다.
재계와 관료, 도시 유권자의 지지를 얻었지만 고이즈미는 수상이 된 후 첫 총선이 있었던 2003년까지 자신이 약속한 개혁을 이루지 못했다. 용기나 결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고이즈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이권을 지키려는 파벌들의 방해 때문이었다. 개혁이 지지부진해지면서 그의 지지율은 2001년의 기록적인 85%에서 50%로 떨어졌지만 2003년 총선에서 자민당은 고이즈미 한 사람의 인기로 다수의석을 지킬 수 있었다. 이제 고이즈미의 과제는 자신이 총재로 있는 당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우체국: 자민당의 돼지 저금통
2001년 수상이 되면서 시작된 고이즈미와 자민당의 전쟁은 2005년 우정개혁법안이 부결되면서 절정에 달한다. 2003년 총선에서 고이즈미는 우정개혁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었다. 빈곤해결, 경제회생 또는 테러와의 전쟁 등에 목숨을 거는 내각은 상상할 수 있지만 외국인에게 ‘우정개혁을 위한 내각’이란 말은 이해하기 힘들다. 우체국 개혁 또는 민영화가 우체국의 효율성 제고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왜 개혁의 핵심인가는 일본 내에서도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체국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의 문제이다.
우표를 팔고 편지를 배달하는 것은 일본우정공사가 하는 업무의 가장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일본의 4대 은행 지점을 다 합쳐 봐야 2,700개에 불과하다. 그러나 24,700개의 지국을 가진 일본우체국은 일본 예금의 30%, 생명보험의 40%에 해당하는 331조 엔의 세계 최대의 자산을 보유한 공룡은행이다.
재무성이 감독권을 가진 일본우체국의 자산은 관료의 재량에 따라 집행되는 ‘그림자 예산’이다. 국회의 동의가 필요 없는 눈먼 돈은 경제적으로 의문스럽지만 정치적으로 인기 있는 선심성 사업에 사용되어 자민당 의원의 선거 캠페인에 이용되어 왔다.
1999년 국회에서 승인된 9,000km 연장의 고속도로 건설안은 우정공사에서 빌린 3조 엔을 예산으로 착공되었다, 그러나 국토교통성 장관조차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매머드급 공사는 이권을 노린 정치인, 관료, 건설업자의 모임에서 결정된 것으로 돈 낭비에 불과하며 고이즈미에 의해 사업은 취소된다. 고이즈미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낭비되는 돈을 정치인들로부터 해방시켜 효율적인 부문에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2005년 여름 우정공사 민영화 법안이 부결되었을 때 고이즈미는 의회를 해산하였고 주가는 10% 상승하였다.
우체국에 맡겨진 눈먼 돈은 ‘토건국가(土建國家)’라 불리는 정치인과 관료, 건설업자의 ‘철의 삼각동맹(Iron Triangle)’을 유지하는 재원으로 이용되었다. 국토교통성의 하천국이 댐을 만들기로 하고 수자원공사에 공사를 발주한다. 수자원공사의 임원은 대부분 하천국의 퇴직관료들이다. 수의계약에 따라 수자원공사는 ‘강의 친구들’이란 회사에 하청을 준다. 이 회사 주식의 90%는 수자원공사 임원들이 소유하고 있다. 정치인은 지역구에 돈을 부어 표를 사니 좋고 건설업자로부터의 예산의 1~3%를 뇌물로 받아 좋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공공사업을 남발한 결과 천연림의 나무는 인공조림한 수종으로 갈리고 강은 필요 없는 댐으로 뒤덮였으며 강 바닥의 반이 시멘트로 포장되었고 산은 아무도 쓰지 않는 도로와 터널로 벌집이 되었다.
1990년대 경기부양을 한다며 자민당 정부가 운용한 재정적자의 실체는 ‘철의 삼각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벌인 ‘공사를 위한 공사’에 낭비된 돈이었다. 2000년 공공사업으로 GDP의 9%가 소모되었다. 무가치한 사업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국가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았지만 매년 40~50조엔(GDP의 8%)의 예산이 만드는 7백만의 일자리(노동인구의 10%)가 걸린 시스템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인의 가치는 중앙정부를 압박해 지역구에 얼마나 예산을 쓰게 하는가로 결정된다. 그러나 토건국가 시스템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당이 만들어질 당시 자민당의 지지기반은 대기업과 도쿄, 오사카 등의 대도시 지역이었다. 그러나 노동인구의 3/4를 고용하는 (실제로는 동네 구멍가게가 대다수인) 소기업과 인구는 적지만 선거구는 많은 농촌을 무시하고 다수당이 되기는 어렵고 자민당은 고도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이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0년대 40%이던 자민당의 지지율이 1970년대 초 25%로 바닥을 치던 1972년 수상이 된 다나카 가쿠에이(1918~1993, 田中角榮)는 자민당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 ‘일본열도개조론’을 내세운다. 일본열도개조론은 소외계층을 배려한 자민당의 정책을 집대성한 것으로 경제성장으로 이득을 본 부문에서 소외된 부문으로 소득을 재분배하여 고도성장의 결과를 모두가 고르게 나누자는 것이었다.
신칸센(新幹線)의 건설은 언제나 일본의 중심이었던 도쿄, 오사카 등 태평양 연안의 오모테 니혼(表日本, 바른 일본)과 언제나 뒷방신세인 우라 니혼(裏日本, 잘못된 일본)의 격차를 줄이자는 다나카 비전의 대표적 예이다. 신칸센으로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고 소도시와 농촌에 인프라를 건설하여 오모테 니혼에 집중된 산업을 우라 니혼으로 분산하자는 다나카 비전 또는 토건국가는 일본식 복지제도였다. 2005년 히로시마 6구에서의 선거는 토건국가의 의미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2005년 여름 우정개혁안이 부결된 후 고이즈미는 의회를 해산하면서 법안에 반대한 37명의 자민당 의원의 당적을 박탈하고 그들의 지역구에 언론이 ‘자객’이라 부른 후보들을 내세운다. 예외 없이 매력적이고 세련된 도시의 멋쟁이들인 자객들은 고이즈미의 개혁으로 피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가난한 시골에 공수된다. 지금은 금융스캔들로 더 잘 알려진 라이브도어의 CEO 호리에 타카후미는 히로시마 6선거구에서 우정개혁법 부결을 주도하여 숙청된 파벌 보스 카메이 시즈카에 맞섰다.
히로시마 사람들에게 호리에는 히로시마와는 아무 상관없는 도쿄의 젊은 벼락부자일 뿐이었다. 팝스타와 맞먹는 호리에의 이미지는 그를 보려는 ‘오빠부대’를 모을 수 있었지만 카메이 역시 그의 정치적 재난에 동정적인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히로시마 사람들은 카메이가 지역을 위해서 한 일들을 기억한다. 21,000명이 사는 카메이의 고향, 쇼바라 사람들은 그가 추진한 고속도로사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히로시마 외곽에서 해안까지 갈려면 이전엔 3시간이 걸렸지만 고속도로가 세워지고 나서 1시간 반으로 단축되었다. “지금의 경제에서 득을 보는 것은 한줌의 소수에 불과하며 일본인 전체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대기업이 약자를 죽이는 동안 지역경제가 말라 죽고 있습니다. 이것을 발전이라고, 성공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카메이가 선거유세 중 한 말이다.
카메이는 재선되었지만(법안을 반대한 37명 중 20명은 재선에 실패한다) 이미 대세는 결정되어 있었다. 2005년의 선거는 일본의 미래를 묻는 국민투표였다. 유럽에서 복지국가가 더 이상 지탱되기 힘들어 졌듯이 일본에서도 토건국가는 지속되기 힘들어졌다. 자신을 갈릴레오와 비교하는 고이즈미는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 듯이 경제는 정부가 아닌 시장을 중심으로 돌아야 한다고 말한다. 고이즈미는 정부의 개입으로 왜곡된 경제구조를 바로 잡으려면 경제는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2001년 잠자는 미국을 깨운 9/11 테러와 비교되는 2005년 9월 11일의 선거는 고이즈미의 ‘작은 정부’론에 대한 국민투표였다. 2005년 선거에서 자민당은 480석 중 296석을 차지하여 총 의석의 62%를 확보하였다. 선거 후 처음 열린 정기국회에서 민영화 법안이 통과된 후 고이즈미는 ‘낡은 자민당은 무너졌다.’고 말한다.
고이즈미의 유산: 파벌의 몰락
중이 제 머리 못 깍듯이 어떤 사회도 대안이 바닥나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개혁을 하지 않는다. “시스템은 시스템을 이끄는 자가 더 이상 그 시스템을 믿지 않을 때 무너진다.” 고르바초프의 말이다. 1998년경부터 관료, 재계, 언론, 학계의 엘리트들은 일본의 시스템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을 잃어버린다. 이때부터 의미 있는 개혁이 시작되었다. 고이즈미가 수상이 된 2001년 사람들은 누군가 대신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을 원했고 그들이 선택한 고이즈미는 자민당으로 대표되는 낡은 시스템을 해체했다.
‘두 얼굴의 일본’, ‘토건국가’로 상징되는 일본의 시스템의 정점엔 자민당이 있었다. 파벌을 통해 모두의 이익을 대변하는 자민당은 모두를 대변하기 때문에 변해야 할 때 변할 수 없었고 고이즈미가 부순 것은 자민당이 변할 수 없는 원인인 파벌 시스템이었다.
파벌의 힘은 자파 의원을 위해 정치자금을 모으고 공천권을 따내는 데서 나온다. 그러나 1994년 당내에서 복수의 후보를 낼 수 있는 중대선거구에서 단일후보만 가능한 소선거구로 선거제도가 바뀌면서 후보지명권이 있는 중앙당의 힘이 강화되었고 중앙당이 국고지원금을 포함한 정치자금을 관리하도록 선거자금법이 개정되면서 당내 파벌의 영향력은 줄고 있었다.
고이즈미의 등장은 약해지고 있던 파벌에게 결정타였다. 300억 엔에 달하는 정치자금의 분배권이 (총재가 임명하는) 간사장(幹事長)에게 주어지고 공천권을 가진 고이즈미가 파벌과 무관한 후보를 늘리면서 당의 권력은 파벌에서 중앙당으로 옮겨졌고 당내 협의체에서 이루어지던 정책 결정이 수상관저로 옮겨지면서 파벌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파벌의 발언권이 약해졌기 때문에 밀어붙일 수 있었던 공공사업 예산의 축소 때문에 건설업자, 농민단체, 소상인연합 등의 표가 줄어 파벌은 더욱 약해진다. 2006년 예산심의에서 이익단체들을 위한 선심성 예산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아직 파벌은 존재하지만 당 권력의 중심이 아닌 의원들의 네트웍으로 기능한다.
파벌의 비공식 네트워크에서 정책이 결정되기 때문에 일본의 정치는 책임소재가 분명하지 않았다. 정책에 대한 책임이 없을 때 정치는 부패한다. 선거법 개정, 내각과 수상의 권한을 강화하는 1990년대의 정치개혁은 영국처럼 수상에게 권력을 집중하여 비공식적 의사결정구조를 책임소재가 분명한 공식적 구조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정치개혁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고이즈미 개인의 힘이다.
이미지의 정치
케네디 이후 정치는 이미지의 정치이며 고이즈미는 이미지를 연출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당내 파벌을 압도하여 그들을 코너로 몰 수 있었던 고이즈미의 힘은 그의 개인적 인기였고 인기는 그의 이미지에서 나왔다. 고이즈미 한 사람의 선거였던 2005년 선거에서 고이즈미는 자신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82)에 비유했다. 사분오열된 일본을 통일하는데 자신을 바친 천부적 재능의 정치가였던 오다 노부나가는 무자비한 개혁가였고 자신의 길을 홀로 걷는데 두려움이 없는 인물이었다. 도시의 젊은이와 여성들에게 고이즈미는 오다 노부나가처럼 ‘쓰레기 같은 이놈의 세상을 쓸어버리기로 결정했다.’고 비장하게 말하며 자신의 사명에 몸바치는 외로운 사무라이였다.
지금에 와서 고이즈미가 진심으로 개혁을 원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가 개혁을 이슈화하는 과정은 진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민당을 부수자’, ‘개혁 없이 성장도 없다’ 등 알기 쉬운 간단한 말로 문제를 정리하는 고이즈미의 스타일은 ‘구호정치’라 폄하된다. 그러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이지 과정이 아니다. 결과를 얻기 위해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이미지로 정리하는 고이즈미의 구호정치는 지지를 끌어 모으고 정적을 공격하는데 효과적이었다. 우정개혁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정개혁이 왜 필요한가’와 같은 복잡한 사안을 ‘개혁은 우체국 민영화이다. 찬성이냐 반대냐?’란 말로 마무리 짓고 반대라는 이유만으로 정적들은 ‘반역자’, ‘저항세력’이 되었다.
고이즈미의 이미지 정치는 일본의 선거를 의회 다수당이 아니라 일종의 대통령을 뽑는 축제로 바꾸었다. 더 이상 수상은 뒷거래로 골라진 무개성한 정치 전문가일 수는 없다. 누가 되었건 그(또는 그녀)는 (좋건 나쁘건) 정말로 인기가 있어야 한다.
고이즈미의 이미지는 그의 후임자들에게 무거운 부담으로 다가온다. 고이즈미는 자신이 전국시대의 영웅인 오다 노부나가의 근처에도 못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후 그의 후계자들이 항상 그와 비교되었듯이 고이즈미 이후의 수상들은 언제나 그를 의식할 수 밖에 없다.
고이즈미: 시대의 행운아
고이즈미 이전의 자민당 정부가 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규제개혁, 빅뱅, 비정규직 허용, 회계법개정, (농산물을 포함한) 수입개방 등 10년간 정치, 기업, 금융, 무역, 노동시장에 점진적으로 조금씩 도입된 개혁들이 쌓여 시스템은 바뀌고 있었다. 1990년대 추진된 다양한 규제개혁으로 싸진 전화요금, 교통비, 전기료 덕분에 물가가 낮아지면서 소비자에게 돌아간 혜택은 2002년도만 따져도 GDP의 4.2%로 추정된다. 고이즈미가 정치생명을 걸었던 우정개혁의 요점인 토건국가의 해체 역시 1998년 그의 전임자인 하시모토 수상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고이즈미는 이미 진행된 것에 마무리를 지은 것이다.
천문학적인 부실채권과 공공부채의 해결을 내걸고 집권한 고이즈미는 자신의 약속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폴 크루그먼이 지적하듯이 고이즈미가 자신의 말대로 개혁을 밀어붙인다면 일본의 디플레이션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유일한 탈출구는 경제가 다시 성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해답은 중국특수라는 행운에서 찾아졌다.
2002년 2월부터 시작된 경기회복은 2006년 10월까지 57개월간 성장세를 유지하여 전후 최장기간 지속된 이자나기 붐(1965년 11월~1970년 7월)보다 오래 지속되고 있다. 중국특수로 시작된 경기회복은 2003년 이후 내수주도로 바뀌었고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3%로 살아났다.
기업들은 장기불황을 겪으면서 구조조정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기업의 비용구조가 개선된 상태에서 중국의 수요에 힘입어 사상최대의 이익을 올렸다. 도요다는 2006년 매출은 13.2%, 순이익은 40% 증가하였다.
고이즈미가 감행한 부실채권 정리와 맞물려 기업들이 대출을 상환하기 시작하면서 2005년 은행의 부실채권은 4/5가 해결되어 버블 이전 수준으로 떨어진다. 은행들은 공적자금을 상환할 수 있게 되었고 부실문제가 해결되면서 은행대출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증가세로 돌아섰다.
그 동안의 제로금리와 통화팽창정책에 더하여 기업의 투자가 회복되면서 2005년 처음으로 소비자 물가가 플러스가 되어 0.6%로 올라 15년간 매년 1%씩 떨어지던 디플레가 끝나고 인플레가 시작되었다.
기업의 채용 역시 재개되었다. 1997년과 2003년 사이 240만의 일자리가 사라졌지만 2003년 이후 100명의 지원자 당 107개의 일자리가 제공되어 실업률은 8년 만에 최저치인 4%로 떨어졌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오래 끈 헤이세이 불황은 막을 내렸다. 2002년부터 시작된 호황은 10년간의 작은 노력들이 모아진 결과로 고이즈미의 개혁 덕분에 호황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이즈미의 업적은 10년의 노력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자리잡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다.
낡은 일본을 부셔야 한다는 고이즈미의 모델은 대처 수상이었다. 1980년대 일본 국회를 방문한 대처를 에스코트한 고이즈미의 슬로건은 대처와 동일하다: ‘민영화’, ‘정부예산 감축’, ‘패배자의 응석을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
고이즈미의 개혁으로 상징되는 변화는 대도시와 대기업, 은행은 이득을 보았지만 지방과 중소기업이 소외되면서 ‘가진 자(winner)와 ‘못 가진 자(loser)’의 격차를 벌려 놓았다. 2000년 도쿄의 신규건설 면적은 1995년보다 18% 증가하였지만 전국적으로는 12%, 홋카이도 지역은 25% 감소하였다. 1992년 2.2%에서 2003년 5.4%로 늘어난 공식 실업률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높다고 할 수 없지만 20~24세의 실업률은 10%(남성은 12%)이고 60~64세는 8%(남성은 11%)로 일본 언론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 실업보다 더 큰 문제는 고용형태의 변화였다. 전체 고용의 22%는 프리터라 불리는 파트타임 직이다.
“원한다면 옛날로 돌아가세요. 이 여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you turn if you want to; the Lady's not for turning).” 1980년 영국 보수당 총회에서 대처 수상이 한 말이다. 헤이세이 불황이 끝난 일본이 과거로 돌아갈 길은 막혔다. 고이즈미의 유산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이즈미로 상징되는 미래는 일본의 선택이다.
이석우
cura_lee@hotmail.com
29호 (200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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