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이 끝난 1990년대 세계는 ‘역사로부터의 휴가(Holiday from the History)’를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의 첫해를 화려하게 장식한 9/11 테러는 세계질서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했고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시대정신’으로 삼아 아프카니스탄과 이라크를 공격하였다. 이후 5년간 아랍권의 뉴스가 언론보도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세계질서를 재정의한 9/11 테러가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뒤돌아볼 시간이다.
7월과 8월 내내 국제면을 장식한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전쟁은 이벤트에 굶주린 언론을 만족시켰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도 서방과 한국의 언론은 당사자인 아랍인들이 그 전쟁을 어떻게 보는가에는 무관심했다.
비아랍권의 언론과 달리 아랍권의 TV와 신문을 메운 것은 헤즈볼라를 지지하는 데모, 이스라엘과 미국을 비난하는 토크쇼, 헤즈볼라를 옹호하면서 성전을 주장하는 성직자들이었고 레바논 시민이야 어떻게 되건 이스라엘 병사를 납치하여 전쟁을 유도한 헤즈볼라의 이기주의는 무시되었다. 전쟁의 이유가 무엇이건 아랍인을 죽이는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후원자 미국은 악마인 것이다.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가 사라진 이후 왜 아랍의 대중이 미국을 증오하는지, 왜 알카에다나 헤즈볼라와 같은 급진적 테러 단체가 영웅이 되는가에 대한 많은 설명이 있어왔다. 어떤 이들은 이슬람 또는 아랍 문화가 원인이라 주장하고 또 다른 쪽에선 이스라엘의 호전성과 미국의 이스라엘에 대한 편애를 비난한다. 그러나 아랍인의 정서를 설명하기엔 두 주장 모두 지나치게 단순하다. “우리는 가난과 싸우는 것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만이 테러에 대한 해답입니다…… 테러리즘은 가난과 절망에서 자라납니다.”라는 부시 대통령의 말처럼 미국의 좌우 양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설명은 아랍 젊은이들의 절망에서 테러리즘이 자라난다는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은 가난과의 전쟁인가?
OECD 국가에서 30세 이하의 인구비중은 전체의 1/4 정도가 보통이다. 그러나 출산율이 높은 아랍권에서 30세 이하의 비중은 전체의 2/3이며 20세 이하는 50%, 15세 이하가 40%이다. 젊은이들이 빠르게 증가하는 만큼 중동의 노동인구는 연평균 3.4%(1990~98) 증가하였다. 이 수치는 미국의 4배, EU의 8배이다.
한국과 일본에선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노동인구가 감소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생각하면 젊은 인구가 증가하는 것 자체가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중동에선 노동인구가 늘어난 만큼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노동력의 공급에 비해 수요가 늘지 않는다면 임금은 떨어지고 실업이 느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랍권에서 그 정도는 재앙의 수준이다. 아랍권에선 아주 정상적인 15%에서 35%에 달하는 실업률(그림1)은 미국에선 대공황 때나 볼 수 있는 수치이다.
그림1 실업률
테러리즘과 같은 정치적 급진주의는 경제적 재앙을 먹고 자란다. 러시아 혁명은 1차 대전 때문에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파산했기 때문에 일어났고 나치즘과 파시즘은 대공황으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경제가 마비되었기 때문에 태어났다. 지난 20년간 OECD 국가의 일인당소득은 연평균 1.4% 성장하였고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5.8% 성장하였지만 아랍권은 1980년 수준에서 멈추어 있다(비공식 추계로는 마이너스 성장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알카에다 간부 대부분의 고향인 사우디 아라비아의 실질임금은 1970년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랍권에서 테러리즘이 탄생한 70년 후반은 고실업률이 일상화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사람은 일자리가 없고 가난하다고 테러리스트가 되지는 않는다. 남미 원주민, 사하라 이남 지역에 사는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지만 이 지역에서 테러리스트가 나온 일은 없다. 최소한 아랍권의 젊은이들은 형편이 더 나은 다른 아랍국가나 유럽에서 일자리를 찾는 대안이 있다. 유럽에 밀입국하는 아랍인의 수는 매년 수백만에 이른다. 대부분의 아랍 테러리스트들은 가난과는 거리가 먼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 자랐고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이들이다. 오사마 빈 라덴은 백만장자였고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를 충돌시켜 자살테러를 감행한 모하메드 아타는 카이로의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치과의사였다. 테러리즘은 가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정치적 모순에 대한 공격이다. 아랍권의 가난은 아랍 국가의 정치적 무능과 실패가 누적된 결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정당성 위기: 중세에 사는 현대인
아랍의 전통에서 정치와 종교는 같은 것이다. 나라 또는 국민을 의미하는 움마(Ummah)는 교회법인 샤리아(Sharia)에 따라 사는 회교도의 공동체를 말하며 논리적으로 교회와 분리된 정치기구인 국가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모하메드의 사후 현실적 필요에 따라 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왕이란 의미인 칼리프는 아랍어로 모하메드의 계승자란 뜻으로 회교도로 이루어진 국가의 왕은 정치적 지도자이전에 종교적 지도자의 모자를 써야만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1924년 터키 혁명으로 마지막 칼리프인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이 사라지면서 칼리프 시스템은 무너졌다. 그 이후 아랍권의 국가들은 서구식 세속국가의 모델을 따랐고 이는 종교적 정당성이 없는 것으로 그 존재 자체가 이슬람교에 반하는 증거이다.
국가의 통치행위는 국민의 동의 즉 정당성을 얻어야 된다. 군대와 경찰력을 가진 국가는 무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통치할 수 있지만 그런 식의 통치는 효율적이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독립한 중동국가들은 식민지 행정기구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국가로서의 기능을 유지할 수는 있었다. 기껏해야 사막을 돌아다니는 유목부족이나 농민만 있고 유럽과 같이 정치세력이 될 수 있는 중산층이나 노동계급이 형성되지 않은 나라에서 기존의 강자인 족장들을 견제할 세력은 없었고 족장들이 국가기구를 장악하여 왕으로 변신한 것은 자연스러웠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나라에서 통치의 정당성을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얻을 것인가는 숙제로 남는다.
중동의 저주: 석유
북미지역의 석유 채굴비는 배럴당 $10~15 정도이다. 그러나 배럴당 채굴비가 $0.05에서 $1에 불과한 중동의 석유는 금, 다이아몬드처럼 시장가치에 비해 노력은 적게 드는 상품으로 돈 만드는 도깨비 방망이이다. 도깨비 방망이의 소유권이 국가에 있는 중동에서 권력은 막대한 부와 동의어가 되어 권력투쟁은 패배가 허용되지 않는 전면전이 된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권력자의 힘이 강한 경우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는 중동처럼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 되고 기득권자와 경쟁자의 힘이 비등한 경우엔 권력투쟁은 앙골라, 수단, 알제리처럼 내전으로 발전한다.
이슬람 권에서 석유가 나지 않는 터키에만 민주주의가 정착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석유란 자원이 있다는 것은 국가권력을 나눠가질 수 없는 배타적 권리로 만들며 유전으로부터의 막대한 수입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세금에 의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국가는 시민 즉 납세자로부터 독립적이 된다. 세금을 걷지 않으면 세금으로 한 일에 대한 책임도, 세금을 내라고 동의를 구할 필요도 없어진다. 미국독립전쟁의 모토였던 “투표권 없는 곳에 세금도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말을 뒤집으면 세금을 안내면 참정권을 주장할 근거도 없다는 말이다. 민주주의는 자기가 낸 세금이 제대로 쓰이는지 감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정부의 돈이 자기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는 한 정부 예산이 어디서 나오고 어디에 쓰이는지 신경 쓸 사람은 없다.
16세기 영국 정부의 수입은 전적으로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세금을 인상할 때마다 최대 납세자인 귀족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의회에 양보를 했다. 그에 반해 세금 외의 다른 수입원이 있었던 프랑스 정부는 세금인상을 위해 의회를 소집할 필요가 없었다. 그 결과 영국에선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프랑스에선 절대왕정이 성립된다. 석유가 주수입원이 되기 이전 사우디 아라비아의 왕은 최대 납세자인 예다 상인들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해야 했다. 그러나 석유가 발견되어 세금으로부터 재정이 독립하면서 사우디 아라비아는 완전한 전제국가가 된다. 사우디 아라비아의 석유의존도는 국가재정의 75%이며 역시 전제국가인 쿠웨이트, 카타르, 아랍 에미리트, 바레인, 오만 등의 사정도 비슷하다.
그러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느 정도는 지지기반이 있어야 한다. 지지기반 즉 정당성을 얻는데 민주주의보다 효율적인 시스템은 없지만 잠재적 경쟁자를 키울 가능성 때문에 선거가 싫다면 돈으로 지지를 사면 그만이다. 정치적 정당성이 부족한 한국의 군사정권이 경제적 성과로 지지를 얻었던 것처럼 이란-이라크 전쟁(1980-88)으로 경제가 마비되기 전까지 사담 후세인의 바트당은 경제적 풍요를 제공하는 것으로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로 아랍의 산유국들은 석유생산을 늘리지 않고도 수입을 3배로 올릴 수 있었다. 넘쳐나는 오일달러로 이라크를 포함한 중동의 산유국들은 도로, 전기, 전화, 수도 등의 사회간접자본을 건설하고 교육과 의료 등을 무료로 제공하는 등 복지혜택을 확대하는 한편 공공부문의 고용을 늘려 일자리를 만들었고 보조금을 주어 농업과 각종 산업을 지원하였다. 정부재정이 세금으로 운영된다면 이런 식의 선심쓰기는 불가능하다. 선심을 쓰려면 누군가 그 돈을 부담해야 하지만 돈은 자기가 내고 혜택은 엉뚱한 사람이 얻는다면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선심을 받는 사람은 그것이 자기 돈이 아닌 한 ‘그냥 이대로 영원히’ 지속되길 바라며 정부가 무엇을 하건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선심쓰기는 국민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심어준다. 1970년대 유가가 올라 생활수준이 높아지면서 국민들은 미래에도 소득은 계속 증가할 것이므로 자녀가 많아도 충분히 부양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 결과 중동지역의 인구가 급증했다.
그러나 80년대 유가가 폭락, 그때까지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 수 없게 되면서 임금은 떨어지고 실업이 늘어난다. 유가는 언제든지 오르내리는 것이고 다시 유가가 오르면 실업은 해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70년대 아랍권의 인구폭발은 정도가 심했다. 경기가 하강하면서 출산율도 줄었지만 도를 넘어 늘어난 젊은 층이 결혼적령기에 이르면서 아이를 가지게 되므로 출산율은 일정수준을 유지하는 관성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보다 높은 출산율이 장기간 지속되어 실업률은 낮아지지 않았다. 70년대까지 사우디 아라비아에선 대학졸업장만 있으면 능력과 무관하게 공무원과 같은 일자리를 국가가 보장해주었지만 유가하락으로 여력이 없는 국가로선 더 이상 그런 선심을 쓸 수 없었다.
석유로 넘쳐나는 돈 때문에 왜곡된 경제구조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중동 산유국이 석유수출로 번 돈은 미래에 대한 투자로 인프라를 건설하고 첨단 공장을 짓는데 쓰여졌다. 그러나 관료의 탁상공론에 따라 지어진 공장들은 투자된 돈만 잡아먹고 수익을 낳는 데 실패한다. 70년대 $24억이 들어간 사우디 아라비아, 얀부의 석유화학공장은 국제가격의 1/8으로 석유를 공급받아 플라스틱, 나일론 등을 낮은 가격으로 만들어 수출한다는 계획에 따라 건설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싼 원료는 싸기 때문에 물처럼 낭비되었고 미숙한 경영진은 시장조사, 원가계산 등 경영의 기초조차 무시했으며 당시 최고의 기술로 지어진 생산설비는 첨단이기 때문에 국내인력으로는 제대로 운영될 수 없었다. 싼 원료에도 불구하고 비효율적인 경영 때문에 제품의 가격은 팔리기엔 지나치게 비싸질 수 밖에 없었다. 정부는 공장을 쉘, 모빌에게 거의 공짜로 넘기게 된다.
돈이 낭비되어 사라진 것이면 그나마 다행이었겠지만 별다른 산업기반이 없어 투자할 곳이 마땅치가 않은 저개발국에 막대한 외화가 유입되면서 인플레가 초래된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1974년에서 1982년 사이 부동산 가격은 500배 상승하였다. 인플레로 농업을 포함한 국내산업의 생산비가 급격하게 올라 제품가격이 오르면서 수입품에 대한 가격경쟁력이 없어진 결과 석유산업 이외의 다른 산업이 몰락한다. 인플레 때문에 안 그래도 빈약한 국내산업기반이 무너지면서 산유국의 석유수출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높아진다. ‘석유의 저주(oil curse)’라 불리는 악순환을 거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이라크의 대추야자는 지나치게 비싸졌고 더 이상 수출되지 않는다.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공공부문인 석유산업의 수출비중은 90%, GDP 비중은 40%인 반면 민간부문의 GDP 비중은 35%에 불과하다. 원유를 빼면 중동국가의 수출을 모두 합해봐야 핀란드의 수출보다도 작으며 석유를 빼면 중동 산유국의 GDP를 모두 합해도 이스라엘의 GDP보다 작다.
잔치는 끝났다
1970년대 후반부터 유가가 떨어지면서 잔치는 끝난다. 유가가 배럴당 $10까지 떨어진 1989년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는 파산위기에 몰렸다. 정부지출이 줄면서 경쟁력이 없는 민간부문이 타격을 입는다. 중동의 농업 생산비는 수입품의 3배에 달하지만 정부 보조금으로 가격을 낮춰 연명할 수 있었다. 농업 외의 모든 민간부문이 그런 식으로 정부에 의존했다. 1970년대 사우디 아라비아의 민간회사 60%는 정부의 보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정부보조금이 사라지면서 농토는 다시 사막으로 돌아갔고 정부에 기대던 회사들은 파산한다.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다. 10년, 20년 후에 우리는 악마의 똥물에 빠져 죽을 것이다.” OPEC의 창립자이며 베네주엘라의 후앙 알퐁소 전 석유장관이 70년대 초에 한 말이다. 70년대 초까지 베네주엘라는 석유수출로 $6,000억을 벌었지만 10년 후 베네주엘라의 1인당 소득은 15% 감소하였다. 다른 OPEC 회원국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배신당한 기대: 상대적 박탈감
오일달러에 기대어 부양되던 경제가 위축되면서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렵게 되고 오일달러로 확대된 교육을 받으며 기대치가 높아진 젊은이들은 기대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 현 체제에 반감을 갖는다. 코란을 읽고 해석할 줄 아는 것에 큰 의미가 부여되는 사회에서 글을 읽을 줄 아는 것은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연결된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에 걸맞은 일자리를 얻기는 어려워졌다.
중동의 생활수준은 절대빈곤에 허덕이던 식민지 시절보다 개선되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없던 것보다 있던 것이 없어지면 더 참기 어렵듯이 갑자기 나빠진 경제사정은 ‘뭔가 이 나라는 잘못 돌아간다’ ‘지금과는 다른 대안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정부가 선심을 쓸 수 있는 동안엔 갈등은 줄고 반대파를 억누를 수 있지만 사회적 불만을 누그러뜨릴 어떤 정치적 제도도 만들어지지 않은 중동에서 불만은 해소되지 않고 쌓이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분출구가 없는 불만은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18~19세기 유럽의 전제국가에서 체제비판은 탄압하면서 종교비판은 암묵적으로 허용한 것은 불만이 과도하게 쌓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제국주의에 대한 공격과 이슬람 근본주의는 중동국가에서 암묵적으로 허용된 불만의 표현방법이다.
아랍 민족주의: 외부의 적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나오는 것처럼 영국의 지원을 받은 아랍인들은 터키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1차대전이 끝나고 터키가 항복한 후 영국과 프랑스는 약속을 어기고 신탁통치란 명목 아래 중동지역을 나눠 먹는다.
이집트인, 요르단인, 시리아인, 모로코인은 있었지만 유럽인도, (터키어를 쓰는) 터키인도 아닌 아라비아어를 쓰는 2억 명의 사람들이 하나의 민족이란 개념은 1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실체가 없는 가공의 것이다. 물론 가공의 개념도 그들이 하나의 국가로 묶일 수 있었다면 실체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국의 배신으로 아랍인의 단일국가란 꿈은 좌절되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난 후에도 아랍은 21개의 독립국으로 쪼개져 아랍인의 단일국가는 영원한 꿈이 된다.
그러나 역사의 몽상인 아랍 민족주의와 그 적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중동국가의 좋은 명분이 되어준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아랍국가의 왕들은 대부분 영국과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고 친서방적이었다. ‘제국주의와의 결탁’은 그들의 무능과 부패와 맞물려 쿠데타의 명분이 된다. 1948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집트의 친서방 왕정을 군부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1952년 집권한 나세르 대통령은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한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했고 이라크에서도 1958년 친서방 왕정이 타도되고 바트당이 집권했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를 대신해 들어선 정권은 그들이 타도한 왕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를 주지도 않았고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이루는 데도 실패했다. 어떤 비전도 제시할 수 없었던 아랍국가들은 한국의 군사정권이 북한이란 외부의 적을 핑계로 정권안보를 확보했던 것처럼 외부의 적이 필요했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후견인인 미국에 저항하는 PLO, 하마스, 헤즈볼라 등의 테러 단체는 국내의 불만을 돌려줄 이벤트를 벌일 배우로 기용되어 중동국가들의 지원을 받는다.
오랜 기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역사를 가진 이슬람권에서 이교도들이 같은 회교도인 팔레스타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주의를 돌리기에 좋은 이벤트이며 외세의 오랜 침략으로 상처받은 자존심에 호소하는 것은 탁월한 선택이다. 이라크에서 사담 후세인의 지지율은 낮았지만 아랍권 전체에선 그의 인기가 높았던 것은 아랍인의 자존심에 호소하는 그의 쇼맨십 때문이었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인 헤즈볼라와 핵무기 개발을 밀어붙이는 이란 대통령의 인기가 높은 것 역시 같은 이유이다.
그러나 외부의 적을 이용하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수십 년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지기만 한 전적은 아랍국가들의 무능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고 국내 문제와 겹쳐져 내부의 적에게 좋은 명분을 주었다.
이교도는 우리의 적
“알라는 우리의 목표요 선지자는 우리의 지도자이며 코란은 우리의 법이고 성전이 우리의 길이다. 알라의 품에서 죽는 것은 우리의 소망이다.”고 외치는 이슬람 근본주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완전한 삶의 방식인 코란을 따르지 않고 이교도(서구)의 방식을 따르는 사회가 썩었기 때문이라 본다.
1979년 이란 혁명과 소련의 아프카니스탄 침공 이후 아랍 테러리즘의 양상이 바뀐다. 1979년까지 아랍 테러리즘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민족주의였다. 1980년 64개 아랍 테러단체 중 둘만이 종교적 단체였지만 1995년엔 56개 단체 중 26개로 늘어 거의 반을 차지한다.
그들의 적은 코란을 저버리고 서구화를 추구하는 지배층이고 자신들을 타락시키는 서구의 이교도들이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집권한 근본주의자 호메이니는 미국을 ‘대악마’라 부른다. 이후 중동지역의 반서구주의 특히 반미주의는 이란 근본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빈 라덴은 그들의 직계이다. 현재 반미 테러리즘은 알카에다의 전유물이다. 1996년 빈 라덴은 자신의 목표는 사우디 아라비아 정부를 전복하고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회복하여 아랍 민족만의 칼리프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며 이슬람 세계에 미국이 끼어드는 한 그의 목표는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였다.
1990년대 근본주의자들은 자국의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 그러나 이란과 아프카니스탄 외에는 근본주의 혁명이 성공한 곳은 없다. 모든 문제가 코란의 가르침대로 산다고 해결된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모든 곳에서 이슬람이 공격받고 있다고 믿기도 어렵다. 어떤 사람이 팔레스타인, 카시미르, 보스니아, 동 티모르 등 회교도가 사는 지역이란 것 이외엔 서로 아무 연관이 없는 곳의 문제들이 회교를 말살하려는 이교도들의 음모라고 믿겠는가? 더군다나 9/11 테러의 극단적 수단에는 대다수 아랍인들이 혐오감을 나타낸다. 더군다나 인도네시아, 터키, 요르단 등에서 근본주의자의 테러로 피해를 입은 것은 이교도보다는 대부분 같은 회교도로 그들의 폭력적 수단에 질린 회교권에서 근본주의에 대한 지지는 높지 않다. 그러나 9/11 테러 당시 아랍에서조차 이름도 모르던 빈 라덴이 인기스타가 된 것은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아랍권에서 아랍의 문제는 상당부분 이교도 때문이라 보는 인식이 보편적이며 이교도 중에서도 미국이 중동의 운명을 멋대로 쥐고 흔든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석우
28호 (2006.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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