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경제 이후 10여 년의 장기불황 동안 확대된 소득격차는 모두가 중산층인 나라 일본이 미국처럼 적자생존의 정글로 변해가는 징후이다.
품격 있는 재즈 연주와 후지산을 배경으로 도쿄와 칸토(關東)평야를 내려다보며 입에서 녹는 和牛요리를 즐길 수 있는 52층 스카이 라운지가 유명한 파크 하야트 호텔은 헤이세이(平成, 1989년 이후 일본의 현재 연호) 불황이 한창인 1994년 개장 이후 상류층의 명소가 되었다.
그러나 호텔에서 길 건너로 내려다보이는 노숙자로 채워진 신주쿠 중앙공원의 쓸쓸한 풍경과 호텔의 사치스런 정경의 대비는 거품경제 이후 인생의 승자와 패자로 나누어진 일본의 현재 모습이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외신에서나 볼 수 있었던, 한때 직장과 가정이 있었던 노숙자는 10만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통계로 본 양극화
10년 전 90%의 일본인이 자신은 중산층이라 생각했지만 아사히신문의 3월 여론조사에선 38%로 줄었고 79%는 상황이 더 나빠진다고 보았다. 일본의 전형적인 중산층은 안정적인 직장이 있고 교외에 집이 있으며 전업주부인 아내와 두 아이가 있는 가정을 말한다. 현재 그러한 라이프스타일에 필요한 1,000만 엔의 연수입은 화이트 칼라 부부가 맞벌이를 할 때 가능하다.
80년대부터 일본의 소득불균형은 악화되어 지니계수는 1981년 0.349에서 2002년 0.498로 올랐다(그림1). 지니계수가 0이면 모든 가구의 소득이 동일하며 1이면 한 가구가 모든 소득을 독점하고 0.5이면 상위 25%가 전체소득의 75%를 점유한다는 의미이다. 상위 20%와 하위 20%의 소득격차는 1996년 33배, 1999년 61배, 2002년 168배로 늘었다.
그림1 일본의 소득분배 (지니계수)
그림2 OECD국가의 소득분배 (지니계수, 2004년)
계층간 이동추세를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1996년 연소득이 하위 20%에 속하는 가구 중 50%가 1997년 하위 40%로 이동하였지만 그 비율은 1998년 33%, 2002년 30%로 감소하였다. 계층의 고착화 경향은 소득상위층 역시 마찬가지로 상위 20%에 진입 후 그대로 머무는 가구의 비율은 1998년 10% 증가하였다.
일본정부는 소득양극화의 원인으로 고령화를 꼽는다. 전체인구에서 65세 이상의 비율은 1960년 5.7%에 불과했지만 2000년 17.3%, 2005년엔 세계최고인 21%에 달했으며 2050년엔 3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연금이 유일한 소득인 인구가 늘면 소득분배는 당연히 악화된다. 노인들이 고의로 무전취식, 좀도둑 등의 경범죄를 저지르고 숙식이 해결되는 감옥에 가려는 일이 빈번해진 것을 보면 고령화는 그 자체로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림3에서 보듯 80년대부터 노년층의 지니계수는 오히려 떨어졌지만 젊은 층으로 갈수록 값이 악화된 것을 보면 지니계수가 악화된 주원인은 은퇴한 인구보다 고용인구 내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그림3 연령별 지니계수 (남성)
프리타의 계층화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 등 패러다임을 바꾸는 천재들의 혁신보다는 천재들이 만들어놓은 제품과 제조공정을 점진적으로 개량하는 능력이 일본기업의 경쟁력이며 그러한 개선은 사원들의 경험에서 나온다. 고용은 평생 보장되고(종신고용) 봉급은 능력보다 나이순서(연공서열)에 따라 지급되는 경영시스템은 인적자원이 최대자산이며 경쟁력의 원천인 일본기업에서 사원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
그러나 일본식 시스템은 회사가 성장할 때만 작동한다. 헤이세이 불황으로 성장이 멈춘 일본회사들은 미국회사와 달리 종신고용제로 해고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규채용을 줄인다. 그러나 인원이 늘지 않아도 연공급여제에 따라 월급이란 고정비용이 자동으로 불어나는 시스템에서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다.
불황이 장기화되자 실업은 매년 사상최고치를 갱신하고 임금은 동결되어 소비가 줄었다.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업이 물건값을 내리면서 디플레가 일어나고 이는 다시 기업의 이윤과 임금을 압박하여 다시 소비를 줄이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견디다 못한 일본기업들은 비용삭감을 위해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생산성을 올리기 위해 기업의 60%가 연공급여제에 미국식 성과급제가 더해진 봉급체계를 채택했고 명예퇴직, 정리해고로 종신고용은 유명무실해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비용삭감은 기존 시스템의 해체가 아닌 우회로를 통해 이루어진다.
90년대 말 비정규직 고용을 가능케 한 규제개혁이 단행된다. 1990년 비정규직은 취업인구의 18.8%에 불과했지만 2006년 초 30%를 차지하여 2,000만에 달했다. 1995년 캐논 공장의 비정규직 비율은 10%였지만 2000년 50%, 2005년엔 70%로 늘었다. 1998년 총비용의 73%였던 임금비중은 2004년 64%로 떨어진다. 2002-04년 중국특수와 노동시장의 유연화로 비용삭감에 성공한 기업들은 2005년 사상최대의 이익을 올려 2001년 43조 엔에 달했던 불량채권은 20조 엔으로 줄어든다.
비정규고용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정규직을 늘릴 여유가 없는 기업들이 채용 자체를 꺼려 실업률은 독일과 프랑스처럼 10%를 웃돌아 소득격차는 더욱 악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대가가 있다. 다른 OCED 국가보다 여전히 정규직은 핵심인력으로 엄격하게 보호되는 반면 비정규직 관련규정은 OECD 평균보다 더 유연하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격차는 두 배로 OECD 28개 회원국 중 6위이다. 비정규직을 허용하여 신규채용이 늘었지만 사회에 첫발을 딛는 젊은 세대가 버텨야 하는 불황의 무게는 이미 고용되어 있는 기성세대보다 무겁다.
1987년 처음 사용된 프리타(freeter フリ-タ-, 프리와 아르바이터의 조합어)란 말은 빡빡한 정규직 대신 이일 저일 되는대로 하면서 취미생활을 할만큼의 용돈을 버는 정도로 만족하는 신세대들의 트렌드를 가리켰다. 그러나 90년대 비정규직이 보편화되면서 프리타는 비정규직 중에서도 35세 이하의 안정된 직장 없이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레스토랑 등의 저숙련, 저임금 파트타임 일자리를 전전하는 사람을 지칭하게 되었다. 매년 졸업생의 1/10 이상이 실업자나 프리타가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프리타가 계속 늘어나면서 하나의 계층으로 굳어지는 것이다.
표1 프리타의 증가추세 (만명)
경기회복이 본격화된 2005년 9년 연속 감소하던 정규직 증가율이 처음으로 비정규직 증가율을 넘어섰으며 98년 이후 처음으로 임금이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보너스도 다시 지급되었다. 현재 일본의 고용통계를 보면 ‘경기가 회복되면 양극화문제는 해결된다’는 정부입장이 맞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장기적인가는 아직 미지수이며 장기적이라도 프리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프리타의 2/3는 정규직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들로 팔릴 만한 기술이 없어 생활비라도 벌려고 프리타가 된 이들이 저숙련직을 전전하면서 그런 기술을 배울 가능성은 적다. 파트타임직에서 일하다 정규직으로 옮기기는 80년대에도 힘들었지만 정규직 자체가 줄어든 90년대 이후론 더 어려워졌고 최소한 정규직원은 정년까지 투자할 대상으로 보는 대기업에선 조직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갓 졸업한 신입사원을 선호한다.
현재 25-29세인 프리타 남성이 5년 내에 안정된 직업을 가질 가능성은 45% 정도이다. 일단 프리타가 되면 정규직을 얻거나 자영업을 시작하여 프리타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한번 프리타는 영원한 프리타’란 현상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이어진다. 평균 연수입이 168만 엔에 불과한 프리타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울 수는 없다. 1.3으로 세계 최저인 출생률은 더 악화되고 있다. 현재대로라면 2800년에 일본인은 멸종할 것이다.
여성 프리타의 사정은 약간 다르다. 아직도 결혼과 퇴사가 동의어인 일본에서 자신보다 나은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으로 프리타를 졸업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그러나 30살 넘은 남성 프리타가 커리어를 시작하기 어려운 것처럼 30살 넘은 여성 프리타가 남편을 구하기도 어렵다. 여성 노동인구의 비정규직 비율은 50%로 남성의 2배이며 프리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므로 산술적으론 자신보다 나은 배우자와 결혼하는 것이 꿈은 아니다. 그러나 3고(고연봉, 고학력, 고신장)의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일본여성의 높은 기대치와 비슷한 계층끼리 맺어지기 마련인 현실을 생각하면 대다수 여성 프리타의 선택지는 미혼과 프리타와의 결혼이다. 25-29세 여성의 미혼율은 2000년 5.9%에서 2005년 59.9%로 늘었고 30-34세 여성의 미혼율은 32.6%였다.
미국과 유럽에서 프리타는 낯선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일본처럼 프리타가 단기간에 대규모로 만들어졌다면 프랑스에선 전국 규모의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독립하는 유럽과 달리 그나마 의식주를 부모에게 기댈 수 있는 일본에선 불만은 누그러든다. 2004년 35-44세에서조차 부모와 동거하는 비율은 12%였다. 그러나 그들의 미래는 현재보다도 더 암울하다. 연금이 파산위기에 몰린 다른 OECD 국가들처럼 일본의 연금 역시 낸 만큼 가져가는 방식으로 바뀔 것이며 저축은 고사하고 생활비도 감당 못하는 프리타가 더 일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기다리는 것은 절대빈곤이다.
이석우 cura_lee@hotmail.com
27호 (2006.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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