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엔터테이너, 선구자 그리고 사상가 3종류의 음악가가 있다. 시골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학을 전공한 탐 맥크래(Tom McRae)는 사상가이다. 대학을 다니기 위해 처음 런던에 와 레코드 계약까지 6년의 악전고투를 치른 그가 보는 세상은 이해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별천지로 뭔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반전과 자아발견을 외치던 70년대의 사상가들과 이념이 사라진 21세기를 사는 탐 맥크래는 다르다. 그 역시 위선적인 사회를 경멸하고 그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에 절망하지만, 그 문제의 원인도 어떠한 대안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문제를 보여줄 뿐이며 그 제시의 수단도 말이 아니라 음악이다.
음울한 분위기 때문에 금연캠페인 광고에 사용된 데뷔 앨범(2000)의 ‘You Cut Her Hair’는 삭발 당한 유태인 소녀의 사진을 보고 쓴 곡이다. 인터뷰에서 탐 맥크래는 삭발은 그 소녀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생과 긍지까지 말살하는 비인간적인 행위라 말한다. 그러나 이 곡에서 그런 내용은 언급되지 않으며 가사 자체의 의미도 불분명하다. 그의 가사는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하여 그 자신만 이해하는 (그의 말로 하자면) ‘바보의 언어’로 쓰여진다.
그의 음악에서 분명한 것은 말로써의 의미가 아니라 육성의 톤으로 전해지는 정서이다. 그의 음악은 수십 년의 삶이 음악이라는 순간에 박제된 것으로, 말로는 전달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느낌을 음악으로 말하는 것이다.
물론 메시지만으로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며, 음악으로서도 완성되어야 매력적인 음악이다. ‘You Cut Her Hair’는 통기타, 피아노, 현악4중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멜로디의 명쾌함을 얻으면서도 정교한 레이어링을 더하고 첼로의 으르렁대는 저음을 부각시켜 자욱한 연기로 채워진 동굴 같은 포티쉐드(Portishead)의 음산함을 떠오르게 한다. 이와 같은 치밀한 프로듀싱은 곡에 음악적 깊이를 만들어 오래 들어도 질리지 않으면서 매번 새로운 느낌을 주지만 그러한 기술적 완성도가 탐 맥크래 음악의 매력은 아니다.
그가 만드는 멜로디는 아름답지만 그 멜로디를 부르는 보컬, 탐 맥크래를 누구나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의 음색은 매력적이지만, 삶에 지친 듯 느릿하게 읊조리는 가창 스타일은 음악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며 배경음악으로 흘려 듣는 이에겐 감흥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골방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들으면 그의 음악에선 정서적 깊이와 힘이 느껴진다. 탐 맥크래는 음악이란 나비를 박제하듯 살아 움직이는 삶을 순간에 고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회상적이며 슬플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의 음악은 햇빛 찬란한 캘리포니아에서 만들어지든 우중충한 런던에서 쓰여지든 슬픔이란 같은 색을 띈다. 탐 맥크래 음악의 매력은 듣는 이를 끌어당기는, 탐 맥크래 개인의 깊은 내면에서 끌어올려진 슬픔이다.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할 때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무기력함에 대한 슬픔이다.
2001년 영국의 그래미상 격인 머큐리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음악은 공중파를 타고 영국 전역에 알려지지만, 지금까지 나온 3장의 앨범 중 어느 것도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의 음악은 들린다기보다는 느껴지는 음악이며, 음악보다는 감수성이 먼저 다가온다. 그건 그만큼 보편적인 시장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정서의 코드가 맞는 사람에겐 컬트가 되겠지만, 어떤 이에겐 불편한 음악이다. 탐 맥크래의 음악은 분명 파티장에 쓸만한 것은 아니며 라디오에서 나오는 배경음악으로 흘려 들을 만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음악에 귀 기울일 약간의 시간만 있다면, 그의 삶에 대한 슬픔은 탑 맥크래란 개인을 넘어 당신의 슬픔이 될 것이다.
추천앨범: Tom McRae (2000)
이석우 cura_lee@hotmail.com
10호 (200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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