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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수필] 천하대장군 - 신복희

맨드라미꽃이 피었다. 여름 볕이 점점 뜨거워지자 앞 다투어 피는 봉숭아, 채송화와 함께 맨드라미도 붉은 벼슬을 한껏 돋우더니 송이가 활짝 벌어졌다. 닭 벼슬을 닮았다는 꽃은, 코를 가까이 대어도 향이 느껴지지 않는다. 향내 없는 맨드라미, 그것은 향수(鄕愁)속에 떠오르는 고향집 마당에도 언제나 피어있다.
   고향집에서 보았던 맨드라미는 봉숭아와 함께 파수병인양 장독대를 둘러싸고 여름 내 꽃을 피웠다. 우글거리는 꽃술로 검붉은 빛을 토해내는 맨드라미를 보면 어느 결엔가 남성이 떠오른다. 벼슬 같은 꽃송이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 건장한 남자가 그곳에 있기라도 하듯 의젓하다. 힘살 붙은 두 다리를 연상케 하는 튼튼한 줄기와, 잎맥을 선연히 드러내고는 붉은 물을 머금고 너풀대는 잎사귀는 장수가 입는 갑옷의 금속비늘처럼 위엄이 있다.
  다른 일년초는 꽃이 피면 그 무게가 버거워 넘어지거나 꺾이며 꽃송이가 땅으로 쏟아진다. 그러나 맨드라미는 태풍이 와도 끄떡없고 내려 퍼붓는 뙤약볕도 묵묵히 견딘다. 가운데 우뚝 핀 벼슬꽃과 어긋나기로 돋은 잎 사이로 불끈불끈 솟은 작은 꽃송이가 아무리 많아도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다. 그렇게 여름을 보내고 국화가 시들 쯤에야 꽃빛깔이 바래지만 된서리를 맞아도 마른대궁으로 꼿꼿이 서서 겨울을 지낸다. 제 몸에서 생명이 빠져나간 후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것이다.
   맨드라미의 꽃말은 ‘열정’이다. 꽃을 보면 참으로 꽃말에 걸맞은 화초라는 생각이 든다. 참한 아낙모양으로 볼을 붉힌 봉숭아가 바로 곁에서 새치름히 서있으면, 맨드라미는 피 끓는 정열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씨앗을 뱉어낸다. 잎사귀가 먼저 탈진하여 시들고, 불을 뿜듯 빨갛게 타오르는 꽃송이가 차츰 거뭇하게 빛깔이 바래면 모래알보다 작은 새까만 씨앗들이 사정(射精)한 정액처럼 주르르 흘러내린다.
    장독대 근처에는 왜 항상 맨드라미가 있었을까. 악귀를 쫓는 주술적 의미라면 봉숭아 하나로도 족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맨드라미를 하나 더 심었던 까닭은 음양의 이치에 맞추어 살고자 했던 슬기로운 조상들의 우주관이 아니었을까. ‘꽃’이라고 하면 어느 것 없이 모두 여성을 떠올리게 하지만 맨드라미는 누가 보아도 남성이기 때문이다.
   맨드라미는, 옛 민화 속에도 붉게 피어나 사람들의 소망과 상처를 들어주고 어루만졌다. 괴석(怪石)아래서, 모이를 쪼는 장닭과 맨드라미가 어우러진 그림은, 가장의 건강과 출세를 기원하는 상징이었다니 예부터 맨드라미는 장부의 기백(氣魄)으로 인정받은 셈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맨드라미를 ‘마당의 천하대장군’이라고 했을까.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의미를 이제는 차라리 감동으로 공감할 수 있다. 장승처럼 우뚝 서서, 잎사귀를 흔들며 시뻘건 빛을 뿜는 맨드라미를 보노라니 정녕 천하대장군이다. 늠름한 기상(氣像)과 기질이 그 이름에 모자람이 없다. 뿐만 아니라 맨드라미 곁에서, 주홍빛 꽃송이를 달고 내외처럼 서있는 봉숭아가 지하여장군 격이었다니 둘은 참으로 어울리는 꽃장승이다.
    어린 시절,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 만났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은, 수호신으로서 마을의 편안을 빌고, 재해(災害)를 막기 위해 예부터 세워둔 것이었다. 오늘날의 십자가처럼 받들어 기도했고 액운(厄運)을 막아줄 것이라 믿은 존재였다. 그 수호신이 마당에는 꽃으로 피어있었다.
   꽃으로 핀 천하대장군, 맨드라미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성전(聖殿)의 재발견이었다. 성전이란 바로 신(神)이 계신 곳을 말하는 게 아닌가. 마당에 맨드라미가 피어나는 집은 ‘거룩한 성전’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꽃 한 포기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씨 뿌렸던 옛 사람들은 그 마음이 곧 성전이었으리라.

신복희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gounp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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