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深紅)의 안타레스(Antares)
한참 좋은 봄날이었다. 무엇이든 핑계를 만들어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고개를 쳐드는 그런 5월의 어느 날 말이다. 마침 마시던 얼 그레이(Earl Grey) 티가 떨어져 준 것을 핑계삼아 그는 잠시 집 밖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사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 일이었는데도. 홍차를 좋아는 했지만 없이는 못 산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고, 꽤나 예민한 미각에도 불구하고 가장 입에 맞는 티는 역시 트와이닝(Twining)의 티백이었던지라 그 정도야 다른 일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할인 매장 따위에 잠시 들르는 것으로도 충분히 손에 넣을 수 있었던 탓이었다. 역시나, 날이 너무 좋았던 탓이라고나 하면 변명이 될지 모르겠다.
고작 티백 스물 다섯 개가 든 홍차 한 팩을 사기 위해 카트 위로 넘치다 못해 연신 흘러내리는 빵 봉지를 끊임없이 추슬러 올리는 한 중년 여자 뒤에 하릴없이 서서 연노란 빛의 홍차 팩을 만지작거리며 그는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재미있는 일이다. 훔치는 것이 직업인 주제에, 이런 곳에서는 이렇게나 양순하고 얌전한 얼굴로 계산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니. 물론, 자신의 댓가를 치르지 않은 소유욕은 주로 보석에 한해서만 발동되는 탓이긴 하지만. 그는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은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돈을 내기 싫어서가 아니라 사려는 물건의 값어치에 비해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짜증스럽다. 어떻게, 그냥 한 번 나가 볼까. 그러나 우습게도, 이 홍차 팩으로 따지자면 평생 밥 대신 먹어대도 다 마시지 못할 만큼의 양과 바꿀 수 있을 희귀한 보석 앞에서는 놀랄 만큼 대담해지는 자신이지만 이 별 것 아닌 물건 앞에서는 그만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만다. 그는 다소 부자연스러우리만큼 심각한 표정으로 홍차 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만지작거렸다.
“저기, 손님?”
어느샌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앞줄의 계산이 전부 끝난 모양이다. 바코드 입력기를 손에 든 캐셔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거, 그것 뿐이세요?”
“아, 네.”
순간 방금전까지 품었던 불경한 생각이 겸연쩍어져, 그는 미소를 지으며 홍차를 건넸다. 띠 하는 가벼운 경보음과 함께 홍차의 소유권이 합법적으로 그에게로 넘어간다. 그 짧은 순간에 벌어지는 일련의 일들은 늘 그에게 묘한 감흥을 주어, 그는 제법 한동안 가만히 능숙한 솜씨로 바코드를 입력하는 캐셔의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2180원입니다.”
지갑을 꺼내어 지폐 세 장을 건네고 동전 몇 푼을 거슬러 받는다. 그는 이제 온전히 자신의 손으로 넘어온 홍차 팩을 들고 유유한 걸음으로 출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누군가 찾아오신 것 같은데.라는 오피스텔 관리인의 말은 상당히 생경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찾아왔단 말인가. 집과의 연조차 오래전에 끊어지다시피 한 지금, 그를 기억하여 그를 찾으러 올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제법 오랜 세월동안 물건을 넘겨 온 그 친구라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그 친구가 이런 시간에 하릴없이 남의 집 따위나 돌아다닐 리는 없는데. 그치지 않는 의혹에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뭐, 아무리 짐작하고 생각해 본댔자 헛수고다. 결국 답은 집 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는 결심한 듯 가볍게 입을 다물었다. 기분이 좋은 듯 가볍게 위로 던져 올리던 홍차 팩을 손에 꽉 쥔 채로, 그는 다소 긴장된 걸음걸이로 집 안으로 들어섰다.
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손잡이를 잡아 돌려보면, 늘 그렇듯 소리 없이 열리고 만다. 그는 웬만큼 오랜 시간 집을 비우는 게 아니라면 문을 잠그지 않고 나다니는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집 안에 웬만한 보석상의 컬렉션만큼의 귀중품들을 두고도 말이다. 워낙에 방비가 잘 되어 있는 오피스텔인 탓도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그의 부주의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겨있지 않은 문을 열 때마다, 저 집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내가 힘들여 일해 장만했더라면 이런 안일한 태도는 취하지 못했으리라 스스로 씁쓸한 미소를 띠게 되는 것이었다. 쉽게 얻은 것, 쉽게 나가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일까.
“......”
문을 열고, 그는 잠시 선뜻 집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한 채 망설였다. 그는 끊임없이 그 손님이라는 존재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 또한 관리인에게 용무를 말하고, 나를 기다리기 위해 이리로 올라왔겠지. 습관처럼 문을 열어보다가, 뜻밖에 문이 열려있으니 안으로 들어간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이 손님은 그다지 예의바른 사람은 아닌 모양이군.
투덕대는 소리와 함께 신발을 벗어놓고, 그는 가볍게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분명히 누군가 있었다. 거실의 중간 쪽,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보기 좋은 그 곳에 일부러 배치해 둔 소파에 걸터앉아 가만히 밖을 내다보고 있는 낯선 그림자 하나가 눈에 띈 것이다. 뒷모습만으로 사람을 알아보는 것은 본래 쉽지는 않은 일이라지만 얼핏 보이는 그 뒷모습은 더더구나 눈에 설어 그는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붙박혀 선 채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아야 했다.
“오셨습니까.”
오히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먼저 입을 열어 물어왔다. 그제서야 무언가 바뀌어도 단단히 바뀌고 말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천천히 발을 옮겼다. 낯선 방문객은 주인의 등장에도 소파에 묻은 몸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바깥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실례지만.”
그는 입을 열었다. 무언가, 이런 종류의 게임에 아주 능숙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딘가 자신의 그것과도 닮은, 그러나 자신과는 비할 수 없이 위험한 느낌이었다. 그는 조심스런 시선으로 탐색하듯 방문객의 실루엣을 훑어내려갔다.
“저와 면식이 있으시던가요?”
“그럴 리가.”
여전히 바깥을 내다보는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는 답했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남에게 기억을 남겨두지 않는다고 하던데.”
“......”
그는 가볍게 입술을 오므렸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예사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상당히 위험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건 간에. 그는 가볍게 팔짱을 끼고 천천히 벽에 기댔다. 한동안 깊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휘돌아 지나갔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한참만에야 입을 열어, 그는 딱 잘라 물었다. 어설픈 말장난 같은 것은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느낌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 정직한 질문에 오히려 허를 찔렸는지, 이번에는 상대편에서 한동안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합니다.”
“아니,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내가 당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니까. 추억을 훔치는 괴도...라는. 그리고, 내겐 그 사실만이 중요하니까.”
그는 벌떡 일어섰다. 그는 상당히 키가 컸고 딱 벌어진 체격의 소유자였다. 거구라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로 다져진 듯한 체격이라고 해야 할까. 그에게서는 장신에게서 느끼기 힘든 유연한 호전성이 느껴졌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이 낯선 손님에게서 느껴지는 위험한 느낌이 짙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의뢰를 하나 하지요. 가져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의뢰?”
“당신이라면 알 듯도 싶은데. 심홍(�Q)의 안타레스(Antares)라는.”
그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이름이야 당연히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의뢰라는 다소 생경한 단어가 그의 신경에 거슬려 왔다. 그는 최대한 예의바르고 부드럽게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에게 그것을 훔쳐다 달라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요.”
“거절한다면?”
“그럴 수는 없을 겁니다.”
그는 미소지었다. 선이 굵고 사내다운 입술이 가볍게 벌려져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베란다를 통해 들어온 햇살에 베레타 92F의 은빛 총구가 싸늘한 빛을 발했다.
“당신에게도 목숨은 하나일 테니까.”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에서 차분히 자신의 심장 어디쯤을 겨누고 있는 그 총구를 바라보았다. 이런저런 시간 끝에 막 끝나가려는 오후의 햇살에 비추어진 은빛 총신은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광채를 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총이군. 우습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손 드는 것은 생략하겠습니다.”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보시다시피 제 손엔 당신을 상대할 만한 무기가 하나도 없으니까.”
“좋으실 대로.”
그는 느긋하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들었건 혹은 그것으로 무슨 짓을 하건, 이 녀석의 반응이 그보다는 더 빠를 테니까. 믿지 못하겠다면, 시험해 봐도 상관없습니다.”
“......”
그 짤막한 말 속에 배어있는 자신에 대한 긍지와 믿음이 고스란히 자신에게까지 잡힐 듯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내두르며 손을 내저어 보였다.
“아니, 아닙니다. 말씀대로 누구나 목숨은 하나 뿐이니까요. 그걸 건 장난은, 무엇이든 사양합니다.”
그는 미소지었다. 원래부터 그의 눈 속에는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지금, 은빛의 총구 앞에 심장을 내맡기고 선 지금조차도. 흘끗 내리깔아 권총을 쥔 상대의 손을 훑어보는 그 눈빛은 평온하다 못해 무감각해 보이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자신의 말이 죽고 싶지 않다는 말 정도로 들린 것인지, 마주 선 상대는 조금은 낮추어보는 듯한 표정으로 긴 눈초리를 차갑게 내리깔며 물어왔다.
“살고 싶다는 겁니까?”
“네. 살고 싶습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요. 그것만이 제가 믿는 유일한 사실이니까 말이지요.”
그는 짤막하게 답변했다. 마주 보는 시선의 움직임 속으로 가느다란 파장이 인다. 그 찰나의 틈 속으로, 그는 재빨리 눈동자를 돌려 마주 선 낯선 방문객을 머리부터 발 끝까지 훑어보았다. 위험한 사람이다. 애초부터 감지했던 그 느낌은, 이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또렷해졌다. 위험하다는 것의 의미는 두 가지. 이 사람의 하는 일이 위험하다는 것과 이 사람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 단연 이 사람은 두 가지 모두에 다 해당되지만.
“저는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 또한 살기를 바랍니다.”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제법이나 긴 정적을 가져왔다. 천천히 다섯 정도를 셀 정도의 시간이 흘렸을 무렵, 낯선 방문객은 굵은 눈썹을 살벌하게 찌푸리며 물어왔다.
“...내가.”
본래도 높지 않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 뒤로 음산하게 깔리는 울림은 듣는 이를 긴장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별다른 눈에 띄는 표정 변화 없이도 마주 선 사람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게 할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죽고 싶어하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은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살고 싶다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분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
하하. 그는 짐짓 소리내어 웃었다. 심홍의 안타레스라. 분명 그는 방금 그 루비(Ruby)의 일을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려 서서히 붉게 타오르고 있는 이 사람의 저 눈동자야말로 그 불길한 보석에 비길 수 있을 것 같군.
“분명 방금 전에, 목숨을 건 도박 같은 것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이기는 했으나, 그것은 분명한 경고였다. 이 이상 신경을 거슬리는 말이 계속될 시에는, 그 때는 뒷일을 보장할 수 없다는 나직하고 차가운 으르렁거림이었다. 그러나 마주선 사람의 그런 눈을 바라보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동요의 빛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이 게임의 룰을 깨달았으니까.
“분명 아까 전에, 제게 뭔가 의뢰할 일이 있다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만.”
어쨌든 간에, 뭔가를 부탁하려고 나를 찾아온 것은 그 쪽이 아니냐는 완곡한 반문이었다. 한동안 두 사람의 시선이 따갑게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그는 투명하지만 무심한 눈으로, 마주선 사람의 얼굴 위를 스쳐가는 복잡한 표정의 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한참만에야 그는 제대로 된 미소를 지으며 단 한 번의 가벼운 손놀림으로 총구를 반대편으로 돌리더니 총을 거두어 포켓 속으로 집어넣었다. 특별히 멋을 부리는 것 같지는 않으면서도 지독하게 손에 익은 물건을 다루는 듯한 노련함이 배어 있는 움직임이어서, 그는 한참동안이나 감탄의 기색을 숨길 생각도 않은 채 그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말이 통하는 분이로군요. 다행입니다.”
그는 가만히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입가로 떠오른 미소는 필경 아까보다는 호의적이긴 했지만, 그 눈매며 뺨 한 구석에 어려 있는 무표정함까지 지워 없애지는 못하고 있었다. 버릇 같은 것일까. 몸에 배어버린 습관 같은 것일까. 그래서 저런 표정이, 늘 저 얼굴 어느 한 구석에 상처처럼 남아있는 것일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저야말로 다행입니다. 실은 상당히 놀랐습니다.”
“그럴 리가.”
상대방은 미소를 띤 입매에 걸맞지 않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마주 쳐다보았다.
“총구 앞에서 그렇게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람은 여지껏 단 한 명밖에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두 번째군요.”
그렇습니까 라고 입 속으로 가볍게 중얼거렸다. 의뢰라. 그 생경한 단어를 가만히 입속으로 중얼거려보았다. 이 사람은 나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단순히 값비싼 보석을 훔쳐내어 돈으로 바꾸는 짓을 하기 위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는 듯이 보였지만.
“그런데, 의뢰라고 하셨는데.”
그는 탐색하는 듯한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안타레스가 필요하시다면 저는 그다지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제가 보석도둑인 것은 사실이지만 제가 노리는 건 보석 그 자체는 아니니까 말이지요.”
별로 합법적인 일을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권총이라는 예사롭지 않은 소지품이 그렇고 풍기는 기운부터가 그렇다. 무언가 그 보석을 손에 넣어야만 할 사정이 생긴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그러나 그의 상념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뭔가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걸 가져다 달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가져가 달라고만 했을 뿐.”
그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아주 엉뚱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지그시 입을 굳게 다물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을 뿐이었다. 애시당초에 도둑에게 뭔가를 의뢰하러 찾아온다는 것부터가 상식에 어긋나는 짓이었으니 석연치 않은 구석이 하나쯤 더 발견된다고 해도 새삼스런 의구심은 오히려 사치스러울 뿐이었다.
“그 말씀은.”
그는 차분한 눈으로 상대를 건너다 보며 물었다.
“이미 안타레스를 가지고 계신다는 뜻으로 들립니다만.”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상대는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말에 동의했다. 순간, 그럼 도대체 왜 나를 찾아온 것이냐는 우문(
��을 던질 뻔 했다. 그러나 한번 더 돌려 생각해 보니 금방 답은 나왔다. 자신에 대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던 이 사람의 말투를 생각해 볼 때, 그는 단순히 보석을 내다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얽혀있는 무엇인가를 떼어버리기 위해 나를 찾아온 모양이다.
“좋지 못한 기억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런 셈입니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눈 앞에 버티고 선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그 은빛 나는 장난감 덕분에 가볍게 놀라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는데, 마주선 장신의 사내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길고 날카로운 눈매는 차갑게 빛나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 드리워진 가벼운 다크 서클(dark circle)과 피곤한 듯한 기색은 그가 상당한 긴장감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임을 느끼게 했다. 조금 선이 굵다 싶은 콧대 밑에 자리 잡은 입술은 말을 하거나 숨을 쉬기 위해 가볍게 벌어질 때마다 숨이 막힐 듯한 관능(�D)을 뿜어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거나 손을 움직이는 사소한 동작 속에서도 검은 수트 속에 숨은 그의 온 몸이 충만한 공격성에 격동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맹수같은 사람이다. 그는 생각했다. 약간 흐트러진 듯한 짧은 머리 사이에는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도 보일 만큼 드문드문 새치가 섞여 희게 빛나고 있었는데, 이 반백발은 또 묘하게 이 잔혹한 느낌을 풍기는 사내에게 어울렸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과거의 기억 따위에 얽매여 남의 도움을 청해야 할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칭찬입니까?”
“물론입니다.”
그는 빙긋 웃었다. 그 또한 서서히 이 알 수 없는 상대가 시작한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빛나는 눈동자는 까맣게 가라앉고, 입술 끝만이 살짝 들려져 서늘한 미소를 머금는다.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칭찬이지요.”
상대는 의혹에 찬 눈으로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돌리고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내 기억이 아닙니다. 남의 기억이죠.”
“아아.”
그는 이제야 알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제서야 그가 한 일련의 수수께끼같은 말들이 한꺼번에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