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백(蛋白)의 스피카(Spica) -上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벗은 몸을 보이고 말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이 든 이상 또 그럴 수는 없다는 그 태도가 그의 마음에 들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코아 줄까? 맛있는 녀석이 하나 있는데.”
“왜 하필이면 코코아에요?”
“단 것 좋아하지 않나? 여자애들은.”
순간 소녀의 눈 속에 가벼운 불똥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코코아 안 먹어요. 맥주 있어요?”
“이 봐.”
“맥주 있으면 맥주 주세요. 없으면 물이나.”
소녀는 고집스레 말을 맺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한동안 가만히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만난지 몇 시간 밖에 안되는 짧은 순간 동안 벌어진 몇몇 일들이, 천천히 하나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을 느끼며 그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옷 입어. 니 블라우스는, 뭐가 좀 묻어서 세탁기에 담궈 놨으니까 그렇게 알고.”
제아무리 되바라진 목소리로 달려들었든지 간에, 역시나 어린애는 어쩔 수 없는 어린애였다. 자신도 남자치고는 그다지 크다고는 할 수 없는 체구였지만, 자신의 셔츠를 입혀놓고 보니 어깨선이 어깨 밑으로 한 뼘은 쳐지고, 소매는 두어번을 걷어야 겨우 손목에 맞았다. 아빠의 파자마를 걸친 일곱 살배기 아이같은 몰골을 한 채, 소녀는 소파 위에 무릎을 끌어안은 채 앉아 낯선 눈으로 티 테이블 위를 가만히 훑어보고 있었다.
“춥지는 않아?“
“네.“
“뭐 마실 거라도 줄까?“
“맥주 달라고 했잖아요.“
소녀는 고집스레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그는 엄하게 혀를 찼다.
“그렇게 마시고, 또 술타령이냐?“
“......“
순간 소녀의 얼굴에 찔끔하는 기미가 스쳤다. 야단맞는데 익숙한 얼굴이다. 늘 야단을 맞으면서 자랐다기보다는, 엄한 집안에서 자란 아이인 것 같다. 무엇이 잘못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는 한동안 말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훌쩍 몸을 일으켰다.
“술은 안 돼. 알아서 갖다 줄 테니까 얌전히 먹어.“
그는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통수 너머로, 소녀의 새된 목소리가 날아와 꽂혔다.
“코코아는 싫어요! 죽어도 안 먹어요.“
소녀는 말간 유리잔 안에 담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딸깍 소리를 내며 접시를 놓고 그 위로 잔을 내려놓았다. 꿀 냄새와 섞인 짙은 레몬향이 확 밀려들어왔다.
“마셔. 레몬타임(Lemon Thyme)이야.“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그는 설명하듯 덧붙였다.
“숙취에 좋은 허브차야. 아가씨들 피부 미용에도 좋고.“
“......“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선뜻 찻잔을 손에 쥐었다. 맥주 아니면 안 먹겠다던 아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갔는지, 잔 밖으로 밀려나오는 따뜻한 차의 온기에 손을 부비며 향을 맡고 있는 그 모습은 오히려 퍽 만족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맥주가 먹고 싶은 게 아니었지. 그는 가만히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코코아가 싫은 거였어. 그것만 아니라면, 뭐든 다 괜찮았던 거야.
“그나저나.“
실은 커피를 마시고 싶었지만 오로지 자기 혼자 먹자고 새로 커피를 내리는 것도 귀찮았던 탓에 그냥 함께 우려낸 레몬타임 티를 마시기로 했다. 잔을 들어 입에 댔다 내려놓으며 그는 물었다.
“집에서는 걱정 안 하시나?“
“말해놓고 나왔으니까 괜찮아요.“
“밤새도록 술 먹고 길거리 쓰러져 있겠다고 말씀드렸단 말이야?“
“미쳤어요?“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렸음인지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며 혀를 낼름 내밀어 보였다.
“친구집에서 자고 오겠다고 얘기해 놨어요. 집안끼리 아는 친구라서. 뭐 괜찮을 거에요.“
나름 용의주도한가. 그는 눈을 깜박였다. 그 사이 그녀는 홀짝대며 차를 몇 모금 들이키다가, 문득 끌어안았던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는 자연스레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많이 연습을 한 듯 그 태는 꽤 자연스럽기는 했지만, 교복 치마 아래로 희게 드러나는 허벅지가 새삼 난처해 그는 속으로 가만히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먹을 만 해?“
“네. 맛있어요. 향도 좋고.“
“먹을만 하다니 다행이군.“
그는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코코아를 싫어하지? 알레르기라도 있나?“
“.....“
순간 소녀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알레르기 따위의 문제가 아닐 거라고 처음부터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아직 자신의 속내를 완전히 감추는 법을 익히지 못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그 표정은 너무도 적나라한 것이어서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냥 싫어해요. 그 뿐이에요.“
그녀는 고집스레 대답했다.
“마냥 달기만 한 그런 거, 도대체 왜 먹는 건지 모르겠어요. 차라리 설탕물을 마시는 게 낫지.“
“그래?“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코코아를 그렇게나 격렬하게 싫어하는 사람을 본 건 처음이라서, 좀 당황스러운걸. 코코아는 원래 유럽에서는 왕실 귀족들이나 마시는 음료였어. 특히 공주나 여왕 같은 숙녀들이 좋아했기 때문에 숙녀의 음료라고 불릴 정도였지. 지금에야 애들이나 먹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당시엔 정작 애들은 먹지 못했고 어른이 되어서야 먹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지? 코코아의 단 맛이 성적인 부분과 관련이 있다는 미신 때문에 말이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원하기만 한다면 농담도 진담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코코아의 유래에 대한 가벼운 장광설을 한마디 던진 후, 소녀의 얼굴 위로 퍼져가는 당혹한 표정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긴 요즘도 어른들이 코코아를 더 좋아하는 거 같긴 하더라만.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을 때 단 것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거든. 아무래도 애들보다야 어른들이 스트레스 쌓일 일이 많으니까.“
“......“
소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얼어붙었다. 그는 한동안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그런 그녀의 얼굴을 주시했다. 만취, 노브라, 맥주, 어울리지 않게 다리를 꼬고 앉은 지금의 태도. 코코아는 싫어요 라고 앙칼지게 소리치던 그 목소리와 무언가가 하나씩 하나씩 틀이 맞아 가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말해 봐, 꼬마 아가씨.“
그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코코아가 싫은 거야, 아니면 누가 아가씨를 애 취급 하는 게 싫은 거야?“
순간 소녀의 얼굴에는 더없이 복잡한 일련의 표정이 떠올랐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 표정은 어찌 보면 허를 찔린 것도 같고 어찌 보면 나쁜 짓을 하다 들킨 표정 같기도 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표정은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런 표정이었다.
그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런 경우에 있어 가장 나쁜 해결책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볍게 앞으로 몸을 숙인 채 가만히 소녀의 입을 바라보았다. 남의 말을 듣고자 할 때 그가 버릇처럼 취하는 그런 태도였다. 소녀의 시선이 한참동안이나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를 열심히 궁리하고 있는 듯 했다. 아니 어쩌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건지를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아저씨, 설마.”
소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바짝 고개를 쳐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관심 있어요? 그런 걸 다 물어보고.”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
그는 짐짓 유쾌하게 말을 받았다. 그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 삐딱한 미소를 입가로 떠올리며, 그녀는 가시 돋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군요. 하기야 뭐, 술취한 여자애 집 안으로 끌어들여 옷까지 벗겨놓는 남자가 하는 생각이란 건 어차피 뻔하지만.”
“그래?”
그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더없이 느릿하고 여유로운 동작이었다.
“아까부터 말하는 품이 어쨌든 나를 변태로 몰고 싶은 모양이니, 일단은 뭐 그렇다고 해 두지. 하지만 덕분에 알아낸 사실이 한 가지 있지.”
“......”
그녀는 표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어린애들, 특히 여자애들이 가지고 있는 흔해 빠진 착각 중의 하나는 껍데기만 흉내내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거지. 진짜 제 나이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은 채로 어른처럼 화장하고 어른처럼 옷을 입으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그런 거 말이야.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들 생각일 뿐이라는 거지.”
“웃기네요.”
소녀는 이죽거리며 맞받아쳤다.
“자꾸 나이 나이 하는데, 그것도 웃기는 건 매 한가지잖아요. 열 아홉이나 스물이나 틀린 게 뭐가 있어요? 어제까진 애였는데 하룻밤 자고 나서 생일이 지나면 그때부터 어른이라구? 그 하룻밤동안 뭐가 그렇게 달라지는데요? 뭐가 그렇게 바뀌길래 스무살 생일이 지난 사람은 어른이고 못 지난 사람은 애라는 거에요?”
“좋은 지적.”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부 잘하는 학생인 모양이군. 날카로운데.”
“내가 날카로운 게 아니라 아저씨 말이 허점 투성이인 거라고요.”
소녀는 쏘아붙이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새삼 분이 식지 않는지 고개를 돌리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가만히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말이 맞아. 어른이란 건, 스무살 생일 그 하룻밤을 넘기느냐 아니냐 따위로 결정되는 건 아니야.”
그는 전혀 서둘지 않고 일단은 소녀의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사람이 진짜 어른이 되는 건, 더 이상 나이 먹기가 싫을 때야.”
“......”
그 말이 다소 의외였던지 소녀는 검은 단발머리가 가볍게 흩날릴 정도로 격렬하게 고개를 돌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시선을 마주해 강조하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렸을 땐 꿈이 있으니까. 단지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 건 내가 어리고 가진 게 없어서라고 믿으니까. 그래서 어른이 되고 싶어하는 거지.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어보면 느끼지. 그 자리에 와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그냥 그렇게 시간만 갈 뿐이라는 걸. 어차피 그럴 바에는, 그냥 이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게 차라리 낫다는 걸. 그러나 그럴 수도 없다는 걸. 시간은 흐르는 거니까.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No.35
2007.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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