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深紅)의 안타레스(Antares)
그는 길게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얼굴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심을 한 듯 가볍게 굳어져 있었다.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나 묻지 않을 수는 없군요. 어째서입니까?”
그는 물었다. 그 이유를 전혀 짐작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로 그런 이유인지. 자신이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는 그런 이유로, 저 사람은 스스로 그녀에게서 지워지기를 원하는 것인지를.
“답은 간단합니다.”
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가지고 있어야 좋을 것 없는 기억이니까.”
그 답은 너무도 짧고 냉혹해 오히려 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어째서?”
그는 천천히 되물었다.
“그 분을 사랑한 게... 아니었습니까?”
“......”
언제나처럼, 사랑이라는 단어에 그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그는 입술 위로 희미한 미소를 떠올리며 담배갑에서 새 담배 한 가치를 꺼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니라는 말은 한 적 없습니다.”
딸깍대는 소리를 내며 지포 라이터가 한 번 열렸다 닫혔다. 순간 일어났던 불길에 비친 그의 얼굴에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사랑이라. 물론 사랑합니다. 그 애가 아니었더라면 그 놈을 죽이려는 생각 같은 건 평생 하지 않고 살았을 겁니다. 또 모르지요. 나 또한 그 놈처럼, 밤마다 룸살롱을 전전하며 계집들 속옷 들추는 재미로 살고 있을지도. 사내라는 건 결국은 다 그렇고 그런 족속들이니까.”
그는 동의를 구하듯 빙긋 웃으며 이 편을 넘겨다 보았다.
“하지만 그건 내 얘기입니다. 그 애도 그럴지는, 그건 알 수 없는 일이지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 애에게 나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그냥, 한 집안에 살면서도 자기를 강간하지 않는 사람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는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리며 입술 사이에 물었던 담배를 떼어내고 그 틈으로 희미한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 집은, 그 집과 관련된 모든 건 그 애에겐 악몽이고 지옥입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겠지요. 내가 특별히 그 애에게 상처를 준 기억같은 건 없습니다만, 글쎄요. 나 또한 이미 그 애에겐 그 집의 일부로밖에는 기억되고 있지 못할 테니까. 그런 이상은, 나 또한 그 애에게서 사라져야 할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희미한 고통의 흔적이 그 눈매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 내가 한 모든 일들이.”
“속단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만류하듯 중얼거렸다.
“자신이 아닌 남의 추억을 마음대로 지워 달라는 부탁 같은 건 들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 얘기를 듣고 그럴 만 하다고 생각했기에 승낙한 겁니다. 그런데, 이건.”
그는 한동안 뒤를 이을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괜시리 자신이 초조해져 가볍게 입술을 깨물던 그는, 결국 하던 말을 완전히 끝맺지는 못했다.
“옳지 않습니다, 이런 건. 그 분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건 당신도 모르지 않습니까. 만약에 그 분 또한 당신을 사랑했다면...”
“그랬다면 더더욱 지워야겠지요.”
그는 나직하고도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 속에 배인 강렬한 위압감은 차마 그 뒤로는 아무런 대꾸도 붙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일전부터 느끼던 겁니다만, 당신 상당히 제멋대로군요.”
까닭없는 화가 치밀어 그렇게 말해 버렸다. 그는 천천히 팔짱을 끼고 어깨를 벽에 기댔다.
“불쑥 찾아와 달갑지 않은 일을 억지로 떠밀더니, 이젠 남의 마음을 함부로 재고 판단하겠다는 겁니까?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그 아가씨의 자유입니다. 당신을 잊을 건지 말 건지를 결정하는 것도 그 아가씨여야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봐요.”
그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여자가 사랑하기엔 너무 위험한 인간입니다.”
“......”
그는 망연해져 입을 다물었다. 그저 가볍게 미간을 찌푸린 채, 착 가라앉은 눈으로 재떨이 속을 나뒹구는 몇 개의 담배 꽁초들을 훑어보고 있는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지 않다고, 이건 뭔가 크게 잘못 되어가고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어쩐 일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급작스러운 생각은 아닙니다.”
그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처음 이 곳에 와서 당신에게 안타레스의 이야기를 꺼낸 날부터, 그 이전에 당신의 이야기를 어딘가에서 들었을 때부터 해 왔던 생각입니다. 아니, 아주 오래전에, 그 애를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입맛이 쓴지 그는 반 이상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그리고 묵묵히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불쑥 해보는 말 같은 건 아닙니다. 애프터 서비스 같은 걸 해달라고 떼를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그냥 그렇게 해 주시죠.”
“......”
여전히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지명을 받고 교과서를 읽어내려가는 어린 학생처럼 또박또박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 애가 모두 잊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더러운 놈에게 당했던 모든 일들을, 그 사람 사는 냄새라곤 조금도 나지 않는 무덤 속 같은 집에서의 모든 일들을 말입니다. 그러자면 나 또한 자연히 잊혀져야겠지요. 그 뿐입니다.”
후우. 그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없습니다. 내 곁에 그 애가 있는 것과 그 애가 행복한 것. 그것 중에 후자를 택했을 뿐이니까.”
오랜만에 입어보는 상장(喪裝)이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빈소 앞에 머물러, 그는 잠시 긴장된 얼굴로 넥타이며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흔치 않은 봄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 탓일까, 조문객의 수는 그다지 많지는 않아 보였다. 똑같은 검은 수트 차림에 똑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들은, 특별한 체격의 차이가 없는 이상 모두 똑같아 보였다. 결혼식과 장례식 간에 존재하는 재미있는 공통점이다. 그 자리의 주인공과 일면식도 없다 해도, 약간의 연기력만 갖추면 충분히 끼어들 수 있는 자리라는 것.
그는 가벼운 헛기침을 하고 영정 앞으로 나갔다. 향을 꽂아 불을 붙이고 가볍게 흔들자 옅은 불티가 사라지고 한줄기 연기가 그 위로 피어올랐다. 짐짓 공손히 연기 피어오르는 향을 꽂고 몸을 굽혀 두 번 절했다. 살아 생전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채는 이는 없었다. 절을 마치고 나서는 한걸음 크게 뒤로 물러나 가만히 영정 속에 들어박힌 고인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꽤나 믿고 있었을 양자에 의해 총구가 입에 물려지고 그 길로 명을 다했을 사람. 가느다란 눈매가 음험해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나 악랄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 사진을 찍을 때, 그는 알고 있었을까. 이 사진이 자신의 영정으로 쓰이게 될 것을. 고인의 사인이 흔치 않은 것이어서인지 빈소 곳곳에는 정복한 경관들이 어정쩡한 태도로 늘어서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마냥 흔한 일만은 아니라는 것만을 제외한다면 지극히 평범한 빈소의 분위기였다.
“......“
그 곳에 한 여자가 있었다. 빈소에서 제대로 된 표정을 지닌 사람을 만나기는 힘든 일이라손 친대도,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오른 무표정은 다소 과한 감이 없지 않아 그다지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도 대번에 눈에 띄었다. 검은 상복에 받혀진 얼굴은 희다 못해 약간의 귀기(鬼氣)마저 감돌고 있었고 멍하니 내다 앉은 그 모습 속에서는 그 어떤 슬픔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그 곳에 그렇게 앉혀져 있을 따름. 그래야 하는 것이니까. 죽은 사람이 어쨌든 육친이었으니까.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거기 그냥 그렇게 붙박혀 있을 뿐, 그 이상의 다른 이유는 결코 없는 듯이 보였다.
어떠한 확신도 증거도 없었다. 그녀가 그 사람이라는 것.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보는 사람의 시선을 끄는 모종의 힘이 있었다. 그리고 손등까지 내려오는 검은 상복을 입고 처연히 앉아 있는 그녀에게서는, 그 언젠가 그의 이야기 속에서 비쳤던 그 위태로운 느낌이 숨어 있었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관찰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듯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거기 그렇게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입구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 또한 소리없이 그 뒤를 따랐다.
비는 계속 오고 있었다. 봄비치고는 그 기세가 제법이나 사납다.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옷깃에, 우산에 묻어들어온 빗물자국이 복도 바닥 이곳저곳에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봄비라, 장마비도 아닌데도, 보고만 있어도 온 몸이 눅눅해지는 느낌이다.
그녀는 조금만 건드려도 쓰러져 버릴 듯 위태로운 자세로 입구 문에 기대어 바깥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은 옷의 색깔 탓일까. 그녀는 무척이나 여위어 보였다. 옷 밖으로 드러난 손이며 목덜미가 보기 안타까울 만큼 길고 가늘었다. 퀭하게 패인 눈과 핼쓱해진 뺨은, 단지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며칠이나 빈소에서 밤을 지샜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일단 떼어놓고 말을 건네 보았다. 그녀의 반응은 놀라우리만큼 완만하고 느릿느릿했다. 그녀는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느린 동작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누구시죠?“
그 목소리는 놀라우리만큼 맑고 또렷했다. 노래를 부른다면 정말로 아름다울 것 같은 음색이다. 그러나 가늘게 떨려나오는 그 목소리는, 동시에 어딘가 불안정하게 들렸다.
“아버지를, 아세요?“
초선이 물었다. 역시 제대로 짚었구나 하는 생각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그 대수롭지 않은 대답이, 이 아가씨에게는 조금 다른 뜻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닫고는 재빨리 변명하듯 답했다.
“아니, 고인과는 그다지 면식이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는 잠시 망설이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아주 천천히 입을 떼었다.
“백형(伯兄)과 면식이 약간 있습니다만.“
“......“
순간 그녀의 얼굴에 드러난 흔들림이 제법이나 격렬하여 그는 자신이 무언가 실언이라도 한 게 아닌가 싶어 움찔 놀랐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검고 깊은 눈 속이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오빠...를 아세요?“
“예, 약간은.“
“지금 어디 있죠? 지금 어디 있어요?“
“아가씨.“
“지금 어디 있어요?“
그녀는 절규하듯 고함을 쳤다. 그 목소리 끝이 쨍하고 갈라져 귓전에 울린다. 그녀는 떼를 쓰듯 그의 소매를 잡아 거칠게 흔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에도 미련이 없다는 듯 착 가라앉아 있던 검은 눈동자 속으로 딱 부러지게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가 격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가르쳐 주세요. 오빠는 어디 있죠? 네? 어디 있냐니까요?“
“아가씨.“
그는 다정히 그녀를 부르며 자신의 소매를 잡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건, 저도 모릅니다.“
“거짓말!“
“정말입니다.“
그는 부드럽게, 그러나 엄숙하게 말했다.
“며칠 전에 잠시 얼굴은 보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모릅니다.“
“......“
어떤 방식으로든 잠시나마 생기를 되찾았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절망감에 굳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툭 소리를 내며 잡았던 소매를 놓은 그녀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래요...?“
그녀는 서글프게 되물었다. 순간 그녀가 그토록이나 애타게 그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지 짐짓 궁금해졌다.
“별 일... 없죠? 오빠요.“
“별 일이라니요?“
“그러니까...“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고 망연히 눈을 깜박거렸다.
“다쳤다든지, 술을 아주 많이 마시고 있다든지, 잡혔다든지...“
마지막 말 쯤에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머리 속에 든 생각을 떨쳐버리려는 듯 그녀는 꼭 주먹을 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런 일은, 없죠?“
“그럴 겁니다.“
그는 답했다.
“제가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으니까요.“
“다행이군요.“
그녀는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핸드백을 열어 담배갑을 끄집어 내더니, 한 대 피우겠다는 양해를 구하는 것도 생략한 채 한 가치를 입에 물었다.
담배 피우는 여자를 눈꼴스러워하는 속좁은 남자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앞에서 담배를 무는 여자에게 불을 붙여줄 정도의 유연성은 지니고 있음을 믿었다. 그러나 눈 앞의 이 여자가 담배를 꺼내 물었을 때 뭔가 지독하게도 당혹스러운 느낌이 목구멍 속을 치받아 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여자여서가 아니라, 담배라는 그래도 조금은 불경스런 물건과는 도무지 뒤섞일 수 없을 것 같은 가녀린 생김새의 소유자라는 점에 기인할 것이다.
딸깍. 흘끗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 옆모습은 보기 드물게 매혹적인 것이어서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내젓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은 담배의 탓이라기보다는 그 갸름한 턱선과 가느다란 손가락 덕분이었지만. 속눈썹이 긴 눈을 지그시 내리깔고 길게 담배 연기를 뱉아내는 그 옆모습은 같은 여자들로 하여금 담배를 피는 여자는 우아해 보인다는 그릇된 환상을 심어줄 수도 있을 법한 그런 모습이었다.
“오빠가... 그런 거라고 그러더군요.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녀는 나직하게 말했다. 그 말은 상대를 마음에 두고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마치 혼자 뜻없이 중얼거리는 혼잣말처럼 들렸다.
“믿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신지.“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표정은 마치 밀랍으로 빚어 만든 인형을 연상케 했는데, 입고 있는 검은 상복이 어쩐지 그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녀가 입고 있는 검은 투피스는 깃이 높아 턱 바로 아래까지 올라오고 소매가 길어 손등을 덮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옷 밖으로 드러난 살이라고는 무릎 아래 종아리 약간, 그리고 희디 흰 얼굴과 긴 손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검은 옷 사이에 파묻힌 그녀는 기묘하게도 더욱 육감(肉感)적으로 보였다.
“아뇨, 믿어요.“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내뱉듯 중얼거렸다. 너무도 거리낌이 없어 잔혹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그 말투에 비해,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가녀리고 무표정할 따름이었다.
“믿는다기보다는.“
그녀는 담배 연기를 입 속에 한가득 머금은 채 가만히 입술을 열었다. 여느 무신경한 남자라면 알아챌 수도 없을 만큼 색깔이 엷은 립스틱을 바른 입 속에서부터 흐릿한 담배연기가 그 호흡을 따라 가만히 흘러나왔다.
“오빠 말고는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없으니까.“
후우. 그녀는 제법 깊숙이 담배 연기를 빨아들였다가 길게 내뿜었다. 이런 사람인가. 그는 순간 가벼운 혼란을 느꼈다. 그의 이야기 속에 살아있는 그녀는 그저 여리고 가냘픈, 그래서 명색 아버지라는 사람에게서 그런 상처를 받고도 그저 그 자리에 붙박혀 선 채 눈물만을 흘리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옆자리에 버티고 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빠는 바보에요.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렇게나 온 세상에 쫓겨다니게 될 걸 모르지도 않았을 거면서.“
순간,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요 라고 되물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을 하는 사람의 표정이 너무 담담하고 자연스러워 그게 당신 때문인 것을 정녕 모르느냐는 말 같은 것은 아무래도 나오지 않았다.
“백형을 원망하고 계시는 것 같군요.“
“제가요?“
그녀는 서두르지도 않고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31호 (200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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