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던 한여름의 열기가 식어 가는가 했더니 어느새 풀벌레 울음이 드높아가고 있다. 고향에 내려갔다가 한낮에 입을 연 귀뚜라미 노래 소리에 이끌려 스적스적 문밖을 나섰다. 가을은 말없이 다가와 우리들 눈앞에 황금벌판을 펼쳐놓고 알곡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려준다. 어김없이 이행되어온 시간의 열차를 타고 제몫을 다해 생의 마지막 잔치를 벌리는 모습이 황홀하다. 청명한 하늘을 드리우고 탐스럽게 익어가는 붉은 사과는 한낮의 열기로 속살을 단단하게 익혀가고 있고 꽃가지를 피워 문 감나무는 풍성한 계절을 노래하고 있다.
밤나무 옆을 지나자니 발밑에서 무엇인가 “툭!” 하는 소리가 들린다. 알밤이 추락하는 그 소리는 제 존재를 알리려는 또 하나의 파격 음을 던진다. 벌어진 가시밤송이 사이로 발그레한 볼을 내밀고 있는 똘방똘방한 생명들이 눈부셔 고것들을 얼른 손에 쥐고 윤기 흐르는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잠시 대견스러움이 인다. 구김살 없이 이 계절의 광채를 펼치며 풍만한 웃음을 던져주는 튼실한 모습....., 지난여름은 혹서 끝에 찾아온 태풍의 위력에 모두 두려워 떨었다. 집중적으로 강타한 수마의 공습은 몇몇 지역을 여지없이 초토화시키고 집 잃은 수재민들은 아직도 망연자실한 채 한숨만 쉬고 있다. 그럼에도 내 손 안에 놓여있는 이 빛나는 생명들은 무서운 시련을 참고 견딘 인고의 얼굴을 무던히도 보여주고 있질 않는가.
저마다 승리의 깃발을 들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거침없이 서 있는 풍만한 나무들이 자랑스럽게 보인다. 이 계절을 저마다 풍미하고 서 있는 저 당당하고 용감한 자태들. 그곳에 달린 실과들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결실을 이룬 보람 때문이리라. 조심스럽게 내면의 성숙을 단근질 하며 부지런히 육질을 단련시킨 모습과 고운 빛깔로 물들기 위한 자기 결실의 이미지가 아름답지 아니한가.
가을 들녁에는 우리들의 가슴을 훈훈하게 하는 풀꽃들이 지천으로 깔려있다. 들녘을 걷다보면 실크 빛 머풀러를 날리며 은빛 날개를 세운 억새가 춤을 추고, 음습한 골짜기를 빼곡히 덮은 고마리와 자줏빛 물봉선이 군락을 이룬 완만한 능선, 안개꽃처럼 피어있는 아기 망초와 공지를 메우고 있는 붉은 여뀌들, 그 속에서 유독 애잔한 빛깔로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쑥부쟁이, 구절초가 해맑다.
가을꽃에서는 속세에 물들지 않는 청순미가 흐른다. 가을 풀꽃에서는 우리들 심층 속으로 잔잔히 흐르는 그리움의 물결이 인다. 봄꽃은 혹한을 이겨내느라 안간힘을 다한 놀라움이 깃들어 있고 여름 꽃은 정열의 광기를 피워낸 암팡진 모습이 보이지만 가을꽃에서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의 아쉬움을 달래는 서러움이 보인다. 그래서 고운 꽃잎에서는 쓸쓸함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멀리서 외곽으로 난 도로변으로 열을 지어 늘어선 가로수를 보게 되었다. 아직은 이른 계절이건만 고르게 줄지어 늘어선 은행나무들 중에서도 가정먼저 물들고 싶어 제 몸을 달구는 영혼이 있었다. 다른 나무들은 모두 푸른빛을 띠고 있는데 유독 혼자만 노랗게 물들어 가는 나뭇잎이 의심스러웠다. 너무 열정적으로 살아왔기에 조로의 현상이 빨리 온 탓일까? 아니면 남보다 한발 앞서서 계절을 맞고 싶은 우월감 때문에 조급증을 낸 것일까?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시간을 앞지른 생명은 삶의 마감도 먼저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빨리 큰 나무는 그만큼 일찍 조숙해지니 빠르다고 좋아할 것도 아니고 더디다고 조급해할 필요도 없는 듯 하다. 주어진 인생길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분배되는데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계획하고 실천해 나가느냐에 따라 생의 길이가 달라진다고 본다. 대나무는 36주 동안 자라면 제 키의 성장수명이 다한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가하면 평생을 자라도 앉은뱅이인 채 머무는 나무도 있다. 수목의 성장도가 나무의 삶 전체를 대변해 주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처럼 사람도 정신없이 뛰다보면 앞 뒤 볼 것 없이 외곬의 인생을 살면서 목적지에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경험과 체험을 통해 인생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면서 폭넓게 살다가 뒤늦게 쫓아오는 사람도 있다.
인생은 잘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나 못살았다고 하는 사람이 다를게 아무것도 없다. 대단하게 이뤘다면 무엇을 이루었으며 잘 살았다고 하면 어떻게 산 것이 잘 산 삶인가. 인생의 내리막길에 서면 아웅다웅 했던 시간도 모두 부질없어 보인다고 한다. 삶에는 어떤 정답이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않는가. 결국 빈손으로 왔던 것처럼 빈손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현재 내 앞에 있는 일,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그날그날을 빈틈없이 사는 일이 가장 잘 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튀지도 쳐지지도 않는 보편적인 삶이 가장 행복한 길이란 것을 어렴풋이 터득하게 된다.
가을 들녘에 서면 삶 안에서 가식의 허울을 둘렀던 옷들을 하나하나 벗게 된다. 자연이 던져준 말을 곱씹으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누렇게 익어가는 이삭들 속에 농부의 피땀 흘린 손길을 느끼며 감사하게 되고 단단하게 익어가는 열매들을 충만하게 가꿔준 자연의 혜택에 감사하게 된다. 가을 풀꽃들의 해맑은 웃음은 정들었던 사람들을 그리워하게 하고 시리도록 파란 하늘은 내 심성을 맑히는 거울이 되어준다. 울긋불긋 새 옷을 갈아입는 단풍들과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의 넋을 쫓아 천천히 들녘을 거닐어 보라. 그러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 지는 것을 느낄 수있다.
무엇을 숨기랴 이 아름다운 계절에...., 바람에 이끌린 무희의 손을 잡고 쑥부쟁이 춤추는 들녘으로 나가보라. 거기 우리의 삶을 일깨워줄 신비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거기 내 모습이 온통 나신이 되어 발가벗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을 들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되면---.
29호 (2006.1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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