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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연재소설] time to remember (4) - 박미정

청백(靑白)의 시리우스(sirius)
그러고 보니 왼손 약지였다. 약속의 반지를 끼는 곳. 그렇다면 그 반지를 그 여자의 손에 끼워 준 것은 아까의 그 사람이라는 얘기가 되겠는데. 아마 시가의 책정이 거의 불가능할 성 싶은 그런 반지를 주고받은 사이에 가 있는 그런 균열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아까 추측한 대로 일말의 감정도 없이 그저 필요에 따라서만 혼약한 사이라면야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긴 하겠지만, 글쎄. 그는 다분히 회의적인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류 계급의 물을 먹고 자란 자들이 정말 무서운 것은 바로 그런 점이다. 그들은 자신의 진짜 마음 따위는 자기 자신조차도 모르는 곳 깊숙이 파묻어 버리고 자신이 지금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그 필요에 따라서만 평생을 살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 그들 또한 젊고 어리기는 해도 그런 환경에서 자라왔을 텐데.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좀 더 일찌감치 그녀를 외면하고 안으로 들어가 버리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 아름다운 녀석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 반지에 얽힌 그들의 이야기쪽에 좀 더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낀다.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는 중얼거렸다. 모든 아름다운 것에는 다 제 나름의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보석도, 물건도, 심지어 사람조차도. 아름다운 보석과 그 보석의 주인으로 손색이 없는 여자라. 어쩌면, 자신이 추측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는 소매에 찔러져 있던 커프스 하나를 빼내어 문의 경첩 사이에 끼워넣었다. 손잡이를 놓음과 동시에 자동으로 닫히게 되어 있던 문은 그 덕분에 반 뼘 정도가 열려 바깥의 소음이 안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들어왔다. 살짝 밖을 엿보니, 방금 남자 화장실을 빠져나간 그녀가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하고 바깥 벽에 기대어 연회장 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핸드백을 가지러 간 약혼자를 기다리는 것일까. 그 얼굴은 더없이 무표정했다. 차라리, 입에 담기 힘들 정도의 상소리를 뱉아내던 아까의 그 얼굴이 나아보일 정도로.
그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열린 문 뒤로 가만히 등을 붙였다. 그리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여기 있어.”
여자는 힘이 빠진 손을 들어 남자가 건네주는 핸드백을 건네 받았다. 희게 날염한 악어 가죽을 무두질해 만들고 금박을 칭한 체인 끈이 달린 자그마한 핸드백이 무엇이 그리 무거울까만은, 기운이 없는 손엔 그나마도 무거웠던지 핸드백은 제법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져 여자의 허리께에 한번 부딪혔다.
“어서 화장이나 고쳐. 얼굴이 엉망이군.”
“...네.”
여자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대서가 아니라, 그렇게밖에 대답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듯한 그런 목소리였다. 선생님의 지시에 답하는 학생의 목소리도 저렇지는 않을 것이다. 단순한 정략 약혼은 아닌 것일까. 왜 저 여자는, 저렇게나 남자의 한 마디에 꼼짝도 하지 못하는 것일까.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찰칵. 라이터를 돌려 켜는 소리가 난다. 순간 당겨진 불빛에 남자의 얼굴 윤곽이 뚜렷이 잡혔다. 후우. 길게 뿜어진 연기는 제법 독한 여운만을 남긴 채 엷고 넓게 퍼져 주위의 공기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져갔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있으면, 그 땐 용서하지 않겠다고.”
“......”
여자는 멈짓했다. 아이라인을 그리던 손이 딱 멎어버려 눈꼬리 가까운 부분의 라인이 순식간에 보기 흉하게 뭉쳤다. 그녀는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들었던 손을 내리며, 가만히 눈을 돌려 곁에 선 약혼자를 바라보았다.
“...잘못했어요.”
“듣기 싫어.”
남자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눈에 띄게 목소리가 커지거나 말투가 거칠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목소리 속에는 듣는 이를 긴장하게 하는 날카로운 적의가 배어 있었다.
“매번 이런 식으로 나를 실망하게 해놓고, 그 잘못했다는 말 한 마디면 다 용서될 거라고 믿는 건가?”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닥쳐.”
남자는 짤막하게 내뱉었다. 여자는 자신이 지금 화장을 하던 중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듯, 희게 드러난 어깨를 가볍게 떨며 둥글고 큰 눈을 깜박였다. 두 손을 만지작거리고 타는 입술을 핥아 축이며, 그녀는 제법 한동안을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죄송해요... 제발.”
“......”
“저는... 그러니까, 저는...”
“빌어먹을.”
남자는 손을 들어 입에 물었던 담배를 힘껏 바닥으로 동댕이쳤다. 타고 있던 불똥이 바닥에 닿아 한참이나 다시 튀어오르며 허공에 흩뿌려졌다. 화풀이라도 하듯, 그는 바닥에 떨어진 반도 채 타지 않은 담배를 맵시 좋은 구두 끝으로 짓이기듯 밟아 문질렀다. 표면을 싼 흰 종이가 갈가리 찢겨져 나가고, 그 속에 든 담배 가루가 파편처럼 이리저리 튀어 흩어졌다.
“이래서 난 네가 싫었어. 알고 있나? 이래서 난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단 말이야.”
“...오빠.”
“닥치라고 했어!”
참다 못한 듯, 남자는 버럭 고함을 질러 여자의 입을 막아 버렸다.
“오빠? 그래, 오빠. 넌 그게 딱 맞았어. 알아? 네 말 따위, 듣는 게 아니었어. 너 따위가 아무리 할 수 있다고 징징거리며 매달려도, 그 말 따위는 듣는 게 아니었어.”
남자는 날이 선 표정으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런 주제에 시키지도 않은 약혼녀 노릇을 하려 들다니.”
문 밖에서는 망연한 침묵이 흘렀다. 아이라이너를 손에 든 채 굳어버린 여자는 금새 울음이라도 터뜨릴 듯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고 남자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발에 짓이겨진 담배의 파편들을 내려다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죄송해요."
여자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미 아까도 똑같은 말을 한번 했었지만, 지금의 말은 방금의 틀에 박힌 말과는 어감이 조금 달랐다. 가슴 속에서부터 사무쳐 나오는 회한에 그녀의 목소리는 상당히 많이 떨리고 있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잘할게요. 그러니까..."
"시끄러워."
그러나 남자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15분 주겠어. 그 안에 그 볼썽 사나운 화장 고치고 술냄새 풀풀 풍기는 입이나 헹구고 들어오시지. 또 한 번 면식도 없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널브러져 있는 꼴이 내 눈에 띄면, 그때는."
남자는 제대로 말을 맺지 않았다. 그것은 말꼬리를 흐린다기보다는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알고 있지? 라는 무언의 반문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러나 지금까지 수 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엿들은 것으로도 그 뒤에 숨은 말이 무엇일지 짐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말 뒤에 생략된 것은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의 잔혹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나중에 와."
지독하게 고압적인 태도로 말을 끝낸 그는 몸을 돌렸다. 저벅저벅. 날렵한 구두가 마감재 위를 디디며 낭랑한 발소리를 낸다. 그 발소리가 남자 화장실 출입문 앞을 지나갈 무렵, 그는 가볍게 숨을 죽였다. 그리고, 마치 누군가 이 안에 있는 것을 눈치라도 챈 양 발소리는 천천히 멎었다.
"......"
문득, 자신의 약혼녀가 술에 취해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꼴을 본 낯선 자에 대한 생각이 나 버린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조금 열려 있는 화장실 문에 대한 의심인 건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귀한 댁 자제이긴 한 모양이니, 누군가 방금의 일을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은 어쩌면 격에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행복한 모습만을 보이고 살아야 한다는 건 일종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가질 수 없는 지위와 부와 명예를 소유한 대신, 그들이 가진 숱한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들을 죽이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을 선망하는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그 모습에 대리만족을 느끼고 살아갈 테니까. 방금의 그 다분히 속된 행동을 엿본 사람이 있지 않을까 저 사람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불과 수 초에 불과한 시간동안 이런 생각들이 그의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딱 멎어버린 발소리는 한동안 그 앞에 멎은 채 가지도 오지도 않았다. 그는 등을 문에 붙인 채 가만히 오른 손으로 문의 안쪽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왼손을 펼쳐 경첩에 끼워 둔 커프스의 아래에 댔다. 아마 문을 열어 보겠지. 그러면.
"......"
휙. 바로 그 순간, 문은 제법 격렬하게 안으로 밀어 열렸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문 뒤에 등을 댄 채 숨을 죽이고 있던 그는 밀려나는 문의 움직임에 따라 크게 앞으로 한발 디디며 문과 벽이 만드는 작은 공간 속으로 가볍게 몸을 숨겼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문이 열리는 서슬에 크게 벌어진 문의 경첩 사이에서, 끼워져 있던 커프스는 미리 펼쳐 기다리고 있던 그의 왼손바닥 위에 안전하게 떨어졌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
확인이 필요했을까. 그는 한참동안이나 문을 열고, 화장실 곳곳을 가만히 쏘아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자, 짐짓 헛기침 소리를 내며 문을 놓았다. 저벅대는 발소리가 점차 멀어져 갔다. 별 것 아니었지만, 그래도 식은땀이 나 그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예의, 밀어서 열고 놓으면 저절로 닫히는 문이었던지라 그가 만일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아버리면 그때는 고스란히 존재가 탄로 날 상황이었으니까. 뭐, 안으로 들어와 문 뒤에 붙어 있는 사람이 없는지 살펴보는 꼼꼼한 사람은 그다지 흔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커프스 버튼을 쥔 왼손바닥 안으로 순간 배어난 땀이 가볍게 맺혔다.
후우.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땀이 밴 손바닥을 자켓의 소매에 가볍게 문질러 닦고, 그는 능숙한 솜씨로 소매 끝에 다시 커프스 버튼을 끼웠다. 15분이라고 했던가, 빨리 나가봐야 할 것 같다.

박미정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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