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靑白)의 시리우스(sirius)
“...이 봐.”
한 달음에 화장실 안으로 발을 디디는 사람은 역시나 생각하던 대로 이 여자의 일행인 모양이다. 다소 거칠게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주저앉은 여자의 손목을 잡아 일으키며, 그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추태지?”
아야. 순간 여자가 새되게 비명을 질렀다. 술에 취해 흐느적대고는 있었다지만 그 비명 소리 속에는 진짜 아픔을 느끼는 듯한 기색이 배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자의 손목을 제법 우악스럽게 잡아 일으키는 그 손놀림은, 전적으로 당황해서 그러는 것 같지는 않다.
“놔...”
이미 한 풀 죽은 목소리로 여자가 중얼거렸다. 도저히 아까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욕지거리를 뱉아낸 그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목소리였다. 무언가 꺼림칙한 기분이 되어, 그는 가볍게 한 발 뒤로 물러서 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한 쌍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남자는 짧게 물었다. 그 목소리는 짧고 간결했지만 그만큼 격했다. 당황이라기보다는 분개에 가까운 목소리. 그는 이미 버틸 힘조차 잃은 채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와 잡힌 여자의 팔목을 홱 잡아당겨 그다지 크지도 않은 키의 여자를 바싹 가슴 앞까지 끌어당겨 붙였다.
“지금, 뭐라고 했지?”
“......”
“다시 묻지. 지금 뭐라고 했지?”
“......”
여자는 순식간에 겁에 질렸다. 그렇지 않아도 취한 눈이 이리저리 불안하게 흔들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불안정한 그 시선은 망연히 자신을 잡아 일으킨 남자의 얼굴로 향했다가, 그 어깨를 지나 어렴풋이 그에게로 날아들기를 반복했다. 장난도 아니고, 그토록이나 취한 와중에 제정신일 리가 없다. 남자의 등 뒤에서 이 촌극(寸劇)을 지켜보던 그는 가볍게 혀를 찼다. 본능적으로 겁먹고 있군. 길이 그렇게 들어버린 여자야.
“놓으라...구요.”
“......”
겁에 질린 목소리로 여자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동안 죽음과도 같은 침묵이 흐르고, 탁 소리와 함께 남자는 조금은 팽개치는 듯한 동작으로 여자의 손을 놓았다. 그 서슬에 여자는 몇 발이나 뒤로 비틀비틀 밀려나 화장실 벽에 등을 가볍게 부딪혔다. 힘을 잃고 늘어뜨려진 팔목에는 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얼마나 마신 거지? 도대체.”
“많이 마시지는...”
“그런데 남자 화장실에 들어올 정도로 취했나?”
“......”
여자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취기가 거짓말처럼 가셨다. 그녀는 잡혀 있던 팔목을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 변화가 너무 극적인 것이어서, 그는 잠시 무어라 입을 여는 것도 잊고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세수나 해. 화장이 엉망이야. 설마, 그런 꼴을 하고 밖으로 나올 생각인 건 아니겠지?”
“......”
여자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무언가 대답을 했다. 자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 대답에 만족한 듯 남자는 차갑게 굳어졌던 얼굴을 아주 조금이나마 풀었다.
“됐어, 나중에 이야기하지. 이러고 있는 꼴 누가 보면 곤란하니 여자 화장실로 옮겨.”
“...네.”
더없이 고압적이고 딱딱한 그 말투는 이상하리만큼 귀에 거슬렸다. 술에 취해 바닥에 엎어져서는 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욕지거리나 내뱉아대는 저 아가씨도 난처하지만, 남의 눈이라고는 아랑곳도 않고 여자를 저렇게 다루는 저 사람도 과히 보기 좋지는 않군. 그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리깔아 스스로의 옷 매무새를 한번 훑어보고는 세면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 동작은 본의 아니게, 여자 쪽으로 쏠려 있던 남자의 주의를 이 편으로 돌리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아, 실례했습니다.”
굳어있던 인상이 풀리고, 거짓말처럼 느긋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 얼굴이 너무도 딴판이어서 잠시 흠짓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연약한 여자를 함부로 다루는 막돼먹은 인간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지금 저 얼굴을 보니 평소 그렇지 않은 사람이 순간 대단히 화가 나서 그런 행동을 했던 것이 아닐까 스르르 연민이 느껴져 버릴 정도로.
“제 약혼녀가, 무언가 대단한 실례를 범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
약혼녀라.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부부라고 하기엔 두 사람-좀 더 정확히는 여자 쪽-의 나이가 너무 젊어 보이고 오누이라고 하기에는 여자의 눈에 어린 두려움이 너무 크다. 약혼한 사이 정도가 꼭 맞겠군. 그것도 사랑해서가 아니라, 집안의 필요 때문에 억지로 맺어진 그런 사이. 바깥에 수태 득시글거리는 저런 인간들처럼 말이지. 그렇다고 한다면야 남자의 태도가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사랑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낯을 세워주는데 소용 있어 함께 있는 여자가, 엉망으로 술에 취해 남자 화장실에 널부러져 있는 모습을 귀빈들 앞에서 보인대서야. 조금은 냉소적인 기분으로, 그는 곱지 않은 눈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다지.”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그는 빙긋 웃어 보였다. 이런 세상에. 저 웃음이란. 그는 가만히 혀를 찼다. 아무리 봐도 어느 편이 진짜이고 어느 편이 가식인지 구분해 내기가 힘들 지경이다.
“화장을 고치는 것도 좋습니다만, 좀 부축해서 바깥으로라도 데리고 나가시는 게 어떨지. 많이 취하신 듯 보입니다만.”
순간 남자가 여자를 돌아보았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여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차라리 비명을 지르듯 새된 목소리로 그의 말을 거부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무렇지 않아요. 별로 취하지 않았어요. 화장을... 그래요. 화장부터 고쳐야겠어요. 술같은 건 많이 마시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어요.”
부탁이에요. 제발,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줘요. 남자의 어깨를 사이에 둔 채 바라본 여자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안 돼 보인다면, 제발 그렇게 어설프게 편들지 말아요.
“아니야.”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 분의 말씀도 일리가 있군.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겠어?”
“아니라니까요!”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손을 비벼대듯 만지작거리며, 그녀는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화장을 고치러 가야겠어요... 부탁이니까, 제 핸드백이나 좀 가져다 주세요.”
“......”
이것 보라는 듯 남자는 천천히 돌아보았다.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띤 얼굴. 그러나 그 눈 속에는 일종의 의기양양함 같은 것이 깃들어 있어 그를 어이없게 했다.
“...그러지.”
남자는 문을 밀어 열고 바깥으로 나갔다. 저벅대는 발소리가 제법 멀리까지 멀어져가자, 그녀는 낮은 신음소리를 내며 무너지듯 벽에 등을 기댔다. 순식간에 취기가 다 달아나 버린 듯 그 얼굴은 멀쩡하다 못해 조금쯤 창백해져 있었다.
“...아가씨?”
어쩐지 걱정이 되어 불러 보았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구두 끝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흰 새틴 드레스에 맞추어서 고른 듯한 윤이 날 만큼 매끈하게 닦은 흰 구두. 그녀는 밀랍인형처럼 굳어버린 얼굴을 한 채 그 곳에 그렇게 망연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실례... 했어요.”
아까와는 딴판으로 완전히 풀이 죽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던진 채, 그녀는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기껏해야 5분 남짓한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곰곰이 되씹어 보며 그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망연히 서 있었다. 세면대를 짚고 덜 잠근 수도꼭지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들여다보며, 그는 마지막 마주친 여자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그 속에 어린 슬픔과 절망의 기색이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여 그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일까. 그는 고민했다. 신경 쓰지 않자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긴 했다. 나이 어린 아가씨가 연회에 나와 분위기에 취해 너무 많은 술을 마시고, 취중에 한 마디쯤 그런 무례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것. 그저 그렇게만 생각하고 손 끝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며 자리로 돌아가면 아무런 일이 없을 터였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것이라고만은 볼 수 없었던 그 지치고 피곤한 눈동자를 떠올리자 아무래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것. 그녀의 왼손 약지 손가락에서 반짝이던 푸른 다이아몬드를 떠올리자 의혹은 더욱 견고히 굳어졌다.
“......”
그림 - 이은경
26호 (2006.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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