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추위가 물러간 4월의 아침, 창밖을 보니 온통 회색빛이다.
간 밤 어지러운 꿈속을 해매인 터라 머리가 띵하다. 답답한 가슴에 맑은 공기를 기대하며 창문을 활짝 열었으나 혹 하고 탁한 바람이 쏟아져 들어온다.
황사에 농무까지 끼어 눈앞이 흐리다.
날씨, 냄새, 분위기는 문득 그와 똑같았던 과거의 어느 한 지점으로 나를 데려다 놓을 때가 있다. 마치 <M.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과자 냄새에 취해 옛날로 돌아가는 것처럼...... 그것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린시절 일수록 오히려 선명해짐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황사라는 용어를 우리나라에서는 1954년부터 사용되어왔다고 하나 매스컴이 그리 발달되지 않아서인지 요즘처럼 온 국민이 다 알도록 빈번하게 쓰여 지지는 않았다.
그 즈음에도 봄이면 항상 어수선한 바람이 불었다. 뿌연 하늘에 입안에서 흙먼지가 어석어석 씹혔다. 분명 그것이 황사바람 이었으리라
사월의 이런 하늘, 입안에 시큼한 먼지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날이면 언제나 그날이 떠오른다. 4월, 바람, 신맛, 이 세 가지는 언제나 나를 사월혁명 거리로 데려다 놓는다.
1960년 4월 19일 지루한 7교시 마지막 수업시간, 내 짝과 신가루(비타민c)를 책상 밑에서 몰래 손가락에 찍어 먹고 있었다. 온종일 교정 밖이 어수선하다 했는데 갑자기 폭포와 같은 합성이 교실창문을 밀고 들어왔다. 무엇인가가 큰 일이 터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하 후 같은 방향 끼리 짝을 지어 가라는 선생님의 훈시에 따라 집이 돈암동인 나는 정릉에 사는 친구와 동행하기로 하였다.
교문을 나서니 대중교통은 이미 두절되었고 치안은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학생들의 합성과 태극기의 물결로 흥분에 찬 거리는 질풍노도와도 같은 바람이 밀려 다녔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었다. 행진하는 택시와 버스 지붕위에는 경찰들이 쏜 총에 부상당한 학생들이 즐비하게 누워있고 그들을 덮은 태극기는 흘린 피로 붉게 물들여져 있었다. 머리에 띠를 두른 남녀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그들 옆에 서서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독재정권 물러가라”
그것은 부패와 부정의 황사바람을 밀어내는 처절한 새바람이었다.
종로경찰서, 민주당사가 있고 경무대(청와대)가 멀지 않은 안국동 네거리는 혁명의 집결지나 다름없었다. 돈화문 쪽에서 학생들의 대열이 거센 파도와 같이 밀려오므로 인사동을 통해서 종로거리로 나왔으나 종로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혁명의 물결에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수밖에 없었다. 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뜨거운 무엇이 치밀어 올랐다.
탕! 탕! 튀는 듯한 총소리가 사방에서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그때마다 길가의 빌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종로3가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총소리가 귓전을 때리는가 싶더니 바로 내 옆을 뛰어가던 한 노인이 검불처럼 쓰러졌다. 서울 나들이를 온 차림인 할아버지는 흰옥양목 두루마기에 맥고모자를 쓰고 있었다. 총알이 다리에 맞았는지 흰 한복 바지위로 피가 흥건했다. 우리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감에 친구와 나는 서로 놓칠세라 쥔 손을 더 꼭 잡고 울면서 길을 걸었다.
날이 저물어가고 있는 종로거리에는 성난 민중들 속에 황사바람이 불고 있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집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허기진 배는 아직도 남아있는 주머니 속의 신가루 봉투로 손이 가게 했다.
험한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성북경찰서가 보이자 안도의 긴 숨을 쉴 수 있었다.
오늘도 창 밖에는 뿌연 황사가 더욱 거세게 불고 있다.
어느 덧 46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그 바람은 그칠 줄 모른다.
그 날을 떠올리니 입 안에는 나도 모르게 신 침이 고인다. 신맛은 단맛을 알기 위한 시련의 맛이라고 했던가?
인간은 더 나아지기 위해 늘 바람을 일으키고 이래저래 우리는 이 바람 속을 헤쳐 갈 수밖에 없는 사공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24호 (2006.5.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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