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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수필] 주지봉의 안락의자 (마성일기.31) - 이일배

두어 주일 마성을 떠나 있었다. 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연수를 받기 위해서다. ‘멀티미디어 활용’에 관한 연수다. 쉽지 않은 내용이지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야였다. 기회가 생긴 참에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연수를 신청했었다. 그 바람에 시장(市長)이 각급 기관을 연두 순시하면서 지역의 기관장들을 만나보려 한다 했건만 그 자리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두어 번의 공무 수행을 위한 출장도 이행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접해 보지 못했던 연수 내용들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매우 흥미롭기도 했다. 그러한 연수중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삶의 터 마성에 대한 생각이었다. 열매와 잎들을 다 떨어뜨린 채 바람의 조각들만 걸려 날리는 사택의 호두나무와 은행나무 앙상한 가지, 그 마당 텃밭에 아내가 지어놓은 조그만 비닐하우스, 아이들이 오지 않아 무거운 정적에 묻혀 있는 커다란 학교, 그 정적을 깨며 개잎갈나무 가지 사이를 이따금씩 푸드덕 날아오르는 새들……. 무엇보다도 눈에 밟히는 것은 해거름이면 어김없이 오르던 주지봉(朱芝峰)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던 가파른 산길, 정상에 올라 땀 그으며 바라보는 마성벌, 오순도순 옹기종기 자리잡은 산자락 곳곳의 동리들, 봄을 기다리고 있는 질펀한 논과 밭들, 그 사이로 몸에 감길  듯한 곡선을 지으며 흐르는 시냇물……. 모를 일이다. 언제 그렇게 정이 들었다고, 떠나 있은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마치 오래된 고향 마냥 눈에 자꾸 다가서는 것일까. 마음은 곧장 사택 대문의 빗장을 풀고 들어서는 것 같고, 주지봉 꼭대기에 꽂혀 있는 높다란 깃발의 손짓을 따라 뻘뻘 땀 흘리며 오르고 있는 것 같다. 삶의 터 마성, 그리고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주지봉 등행 길. 떠나 있어보니 그곳에 내 참으로 깊이 빠져 있음을 알겠다.
연수를 마치고 마성으로 돌아오던 날,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보고는 곧장 주지봉을 향해 내달았다. 주지봉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품을 벌려 나를 맞는다. 좀 가파르긴 하지만, 그래서 숨을 좀 가쁘게 하지만, 그래서 땀을 흠씬 흘리게 하는 주지봉이 좋다. 누가 놓은 것일까. 가풀막 곳곳에는 삼백여 개의 나무등걸 층계가 있다. 그 중 제일 가파른 곳에는 일백 일흔 세 개의 등걸을 잇달아 대어 오르기 쉽도록 해놓았다. 그래서 내가 ‘일칠삼 계단길’이라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어떤 마음으로 이 계단 길을 닦았을까. 혼자만 쉽게 오르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층계를 밟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이 부르는 쾌재를 곧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하나 놓았을 것이다. 층계 수를 헤아리며 오르는 사이에 땀이 등판과 이마에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린다. 무릎에 힘을 주어 마지막 가풀막을 딛고 올라 드디어 정상에 이른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봉우리 위에 전에 없었던 나무등걸 벤치가 하나 덩그렇게 놓여있지 않은가. 맨몸으로 오르기도 숨찬데, 이 높은 곳까지 나무를 짊어지고 올라 이 벤치를 만들었단 말인가. 한 쪽은 바윗돌을 다리로 삼고 한쪽은 등걸을 박아 다리를 세워 몇 개의 등걸나무를 대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일을 끝낸 지가 얼마 되지 않은 듯, 만든 이의 체온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다리도 팍팍하고 숨도 가빠서, 어디 좀 앉아서 땀 닦으며 숨을 고르고 싶을 때, 이런 벤치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만든 이도 주지봉을 오르내리면서 그러한 심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벤치 하나 만들기로 결심했을 것이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낸 마음일지도 모르지만,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이 산을 수없이 오르내려도 이런 역사(役事)를 생각지 못했듯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벤치에 앉아 본다. 불로 소득을 누리는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면서도 가파른 길을 올라오느라 팍팍해진 다리가 시원스레 풀리는 것 같다. 이마와 등판을 적시던 땀이 잦아들며 몸이 가뿐해진다. 세상에 이렇게 편안한 의자가 있을까. 어떤 모양의 안락의자보다도 더 편안한 것 같다. 저 멀리 어느 집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군불을 지피는 연기일 것이다. 따뜻한 방을 생각하며 불을 지피고 있을 것이다. 불 지피는 이가 있어 방이 따뜻해지듯이, 이 벤치를 만든 이가 있어 주지봉이 더욱 아름다워지고 마성이 더욱 따뜻해지리라. 그리고 우리 사는 세상도 더욱 안락해지리라.
내가 연수를 받는다며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어떤 이는 남을 위하여 가풀막 산길에 계단을 놓고, 편히 앉아 땀 닦을 수 있는 의자 만들 나무를 다듬었다. 몇 번의 공무 출장조차 이행하지 못하면서 이수했던 지난 두어 주 동안의 연수,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내 지식의 충전만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참 이기적인 시간을 보낸 것만 같다. 다만, 내가 받은 연수는 허식과 명리를 쫓기 위한 위인지학(爲人之學)이 아니라, 내적인 성취를 바라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는 것으로 자위할 수 있을까.
안락한 이 의자가 정겹다. 이 의자를 만든 이가 사는 마성이 정겹다. 주지봉 정상의 등걸나무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마성벌이 정겹다.♣

(수필가, 문경 마성중 교장)

23호 (2006.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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