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재촉하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그 비에 길섶 응달진 곳에 군데군데 남아있던 잔설(殘雪)이 맥없이 녹아버린다. 그렇게 겨울은 가고 있다.
우리 부부가 분당에 사는 아들집을 다녀오는 길이다. 전철에서 내리니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다. 주변에 우산을 살만한 곳도 없고 큰길을 건너야 택시라도 탈수가 있다. 일기예보를 듣고 혹시나 하고 넣어온 우산 하나에 가까스로 두 몸을 의지한 채 물보라가 뽀얗게 일고 있는 아스팔트 위를 건너고 있다.
작은 공간 안에서 몸이 부딪히며 걷다보니 집에서와 다르게 남편의 체온이 새삼 따듯하게 느껴진다. 비를 맞으며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보는 것이 얼마 만인가. 가슴속에 늘 간직하고 지냈던 40여 년 전 그 날의 일이 떠오른다.
그 날도 예상치 않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친구 결혼식이 끝나고 갑자기 비가 내려 서성거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앞에 있는 짚 차에 나를 강제로 태웠다. 친구의 친척이라 안면은 있었으나 둘이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차안에는 그 남자의 친구가 운전석에, 옆에는 낮선 여자가 앉아 있었다. 차가 달려 창덕궁 앞에 섰고 그 남자는 어디론가 달려가 임시로 파란 하늘색 비닐우산 두 개를 사 가지고 왔다.
그 비닐우산은 대나무 살에다 얇은 파란색 비닐을 덮고 하얀 굵은실로 얼기설기 엮어 만든 것이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펄럭거렸고, 세찬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우산은 거꾸로 뒤집혀 속살을 다 드러낸 채 부서져 버리는 부실한 것이었다.
젊은 남녀 두 커플이 하늘색 비닐우산을 하나씩 쓰고 아무도 없는 비원 안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걸었다.
비 오는 날, 한적한 고궁의 고요는 유혹적이었다. 나뭇잎에 빗방울 듣는 소리, 빗물이 비닐우산에 통통 떨어지면서 내는 청아한 소리, 마른 땅을 적시면서 내는 흙냄새, 하늘이 보이는 투명한 비닐우산 위에서 빗방울이 모였다가 흐트러지기를 반복하며 알 수 없는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 게다가 비닐우산 아래서 나란히 걸으며 자기 옷 젖는 줄 모르고 우산을 내게 기울이며 걷고 있는 낮선 남자의 듬직한 어깨, 그 모든 상황이 그랬다.
비닐우산의 인연으로 일년이 지난 뒤 그 남자와 결혼을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가 쓰고 있는 우산에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져서 비를 철철 맞은 때도 있었지만 우산을 벼리지 못하고 누덕누덕 고쳐서 쓰곤 하였다. 내게 닥친 삶이 힘들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는 우산 속은 모두가 행복해 보이고 부러워서 자주 곁눈질을 하였다.
종종 내가 힘들게 잡고 있는 실망스러운 누더기 우산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학교가 끝나고 대문을 들어서며 엄마를 찾는 아이 셋을 위해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숙제 봐주고 몽당연필 깎아서 다 쓴 볼펜깍지에 끼워 필통 그득히 채워주느라 잡념을 가질 틈 없이 바쁘고 즐거워 우산을 놓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내가 아이들 키우느라 바삐 지나는 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여자들의 사회진출이 크게 늘었고 사회각층에서 성공한 여자들의 이름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면서 나에 대해 회한이 들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내 모습은 모두가 남편의 책임이고 나는 이 가정을 위해 모든 것을 참고 살아온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난봄이었다. 그 날도 그와 같은 불평을 하며 방에서 나오는데 “나는 안 참은 줄 알아”하는 작고 힘없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 순간‘아 그랬었구나 나만 참은 줄 알았는데, 차라리 당당하게 큰소리라도 쳤으면...’ 가슴이 찡하며 눈물이 핑 돌았다.
아들의 혼사가 정해지고 신부집에서 예단이 들어오던 날, 친척들이 모두 돌아가고 우리 부부만 덩그마니 앉아 있었다. 나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어머니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손자가 어느새 커서 장가를 간대요. 이런 날 어머니가 계셨으면 얼마나 좋아 하셨을까요?”
옆에 있던 남편이 젖은 목소리로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아이들 잘 키우고 어머니 모시느라 수고했어” 하며 내 손을 꼭 쥐어주던 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많이도 참았구나 세상물정 모르고 어눌한 마누라 때문에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우산 씌워주느라 자기 몸 젖는 남편의 입장은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싱크대의 수돗물을 틀어놓고 한참을 훌쩍거렸다.
언젠가 ‘부부란 세상의 비를 함께 맞으며 사랑과 노력으로 세상 풍파 헤쳐 나가야한다’라고 쓴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실제로 내 경우, 여자는 남편이 씌워주는 우산 밑에서 비를 피하면 된다는 도식적인 생각으로 많은 세월을 흘려보냈다.
이 비가 그치면 화사한 봄날이 올 것이고, 만일 비가 다시 온다면 나도 우산을 같이 바쳐 들고 환히 웃는 날을 기대해 본다.
우리 부부는 오래 전 그 날처럼 여전히 함께 우산을 쓰고 길을 가고 있다.
옛날보다 체중이 많이 불어난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느라 남편의 한쪽 어깨가 40년 전보다 더 많이 젖어 있음이 다를 뿐이다.
<목요수필 회원>
22호 (2006.3.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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