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버스가 막 삼성서울병원 앞을 지나려는데 빨간 신호등이 켜진다. 무심코 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70세 정도로 보이는 노인이 온몸을 양쪽 목발에 의지하고 가로수 옆에 서있다. 마치 나이든 배우 유동근의 미래 모습 같다. 멋있게 나이든 모습이다.
몹시도 낯이 익다. 누구더라? 한참동안 내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생각이 나질 않는다. 그 남자가 택시를 잡는다. 목발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택시 안으로 들어가는 옆모습을 보니 아, 그 사람 김 소령. 그제야 머리에 떠오른다. 그러나 2차선 버스 안에 앉아있는 내가 내릴 수도 없고 그 사람은 이미 택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초록 신호등으로 바뀌자 택시는 미끄러지듯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나는 77육군병원 간호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손목에 관등성명의 팔찌를 찬 월남 부상병들이 후송되어오고 있었다.
척추에 부상을 당해 하반신 마비환자를 비롯해 대부분이 중환자였다. 총탄이 날아다니는 월남전에서 부상한 군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치료해주고 있는 군의관이나 간호장교가 조금만 눈에 거슬리면 눈을 부릅뜨고 부하 다루듯이 호령하곤 했다. 피해의식 때문이었을까? 그 사람 김권수 소령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우리는 불쾌했지만 그들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느 날이다. 김 소령이 심한 감기에 걸렸다. 하루에 세 번 복용하라며 하루 분 약을 주었는데 그는 그걸 한꺼번에 다 먹어버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화를 냈더니 그렇게 독하게 먹어야 감기가 확 떨어지지 않겠느냐고 한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기가 막혔다. 그러나 걱정 말라며 자기는 언제나 그랬어도 이상이 없었다고 호탕하게 웃는다. 다음부터 나는 번거로워도 김 소령에게만큼은 시간에 맞춰 약을 갖다 주고 그 자리에 지켜 서서 꼭 확인하곤 했다.
야간근무 때였다. 새벽 2시경, 하루 네 번 복용하는 약을 투여하려 김 소령 병상 곁으로 갔다. 사병들은 큰 병실에 단체로, 장교는 따로 개인병실에 입원해있었다. 김 소령이 땀을 뻘뻘 흘리며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열이 40°가 넘었다. 그리고 급히 당직 군의관에게 달려가 처방을 받아 얼음 마사지를 해주는 등 응급치료를 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나를 불러 수고했다며 월남에서 가져온 과자를 한 아름 주었다. 모두가 포장은 그럴듯했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성의는 고마웠지만 나 뿐 아니라 한결같이 다, 맛이 없다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네들은 월남에서 그렇게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을 먹고 살았구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는 친하게 되었다.
자기는 나와 같은 광산 김 씨 수(洙)자 항렬이고 나는 용(容)자니까 내 조카뻘이라고 반가워했다. 김 소령은 서울 토박이였다. 나에게 나중에 서울에 오면 꼭 만나자고 주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는 다리 하나를 허벅지까지 절단해 의족을 했다.
그가 수도육군병원으로 떠나고 얼마 안 있어 의병제대를 했다는 편지가 왔었다. 그동안 나도 육군병원을 그만두고 직장을 옮겼다.
그러저러 30여년이 흘렀다. 30년이면 1세대다. 아무리 가깝게 지냈던 사이도 30년이 지나면 그렇게 사람의 기억도 희미해지는 모양이다. 그러니 반세기만에 만나는 남북 이산가족들도 가슴에 명패가 붙지 않으면 부모자식간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리라 생각된다.
3호선 전철 안에서였다. 어떤 여인이 낮이 익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상당히 미인이다. 예쁜 얼굴이어서 내 눈에 띄었나보다 생각했다.
그 여자가 양재역에서 내려 차창밖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제서야 어머나, 내가 그토록 찾고 싶어 했던 주 양 언니가 아니던가. 옛날보다는 살이 쪄보였고 얼굴에 주름이 졌어도 주 양 언니가 틀림이 없었다.
주 양 언니는 육군병원에서 함께 근무했고 나의 룸메이트였다. 성이 주(周) 씨 이고 나이가 나보다 서너 살 많아 그냥 주 양 언니라고 불렀다. 육군병원이라는 울안에 갇혀 지내는 젊은 군인, 사병이나 장교 모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몇 안 되는 처녀들인 우리에게 관심이 많았다.
주 양 언니는 예뻐서 연민의 편지를 많이 받았다. 우리는 서로 비밀이 없이 터놓고 얘기했다. 어떤 병실에 누구, 어떤 부서에 근무하는 기간사병이 보낸 것이라며 필체와 내용을 보며 웃고 또 답장을 해줘야 할지 말아야할지를 고민하기도 했다.
그녀가 결혼을 하고 나보다 먼저 육군병원을 떠났으나 그 뒤로도 오랫동안 왕래를 하고 지냈다. 후에 서울로 간다며 나를 찾아 왔었다. 어디 병원에서 다시 근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끊겨 행여나 하고 그녀가 살았던 친정인 영산포 역장관사를 찾아가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버지도 직장을 이미 그만둔 지 오래였고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찾을 길이 없었다. 풍문에 결혼생활이 원만치 못하다는 소식까지 들렸는데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렇게 만나보고 싶던 그녀를 바로 눈앞에서 놓치고 나는 다음 역에서 내려 급히 반대편 전철로 갈아타고 양재역에 내렸다. 인파를 뚫고 이리저리 찾아보았다. 혹시나 근처에서 뒷모습이라도 보였으면 좋으련만 어디에도 그녀의 모습은 없었다.
울컥 눈물이 솟았다. 나도 자기를 얼른 알아보지 못한 것이 실수였지만 그도 또한 그렇다. 서로 눈이 몇 번이나 마주쳤었는데 그도 왜 나를 못 알아보았을까. 지금도 나는 양재역 부근에서는 혹시나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있다. 아득히 멀어져간 그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지척에서 서로를 몰라보다니.
방금 지나친 김 소령도 마찬가지다. 아쉽고 서글프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옛날이 그립다. 김 소령은 여태껏 그렇게 불편한 몸으로 평생을 살아 왔었구나 생각을 하니 또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혹시 지금까지도 그 상처를 치료받으러 병원에 다니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온다.
21호 (2006.2.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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