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매서운 삭풍이 불어대지만 봄은 분명 오고 있을 것이다.
아마 사나운 태풍을 몰아왔던 지난 여름의 남쪽 그 어딘가로부터 천천히 천천히 오고 있을 것이다. 꽁꽁 얼어붙은 겨울 속에서 우리는 이렇게 따뜻한 봄을 기다린다.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 어디 봄만이리오. 새해의 첫날, 새해를 보기 위해 우리는 산정과 해안에 선다. 동해의 수평선으로부터 이글거리며 떠오르는 장엄한 해를 보기 위해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긴긴 시간을 기다린다. 그러고 보면 인간의 삶은 기다림의 연속인 것 같다.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을, 올해 보다 나은 내년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기다림이 없다면 세상 살맛이 날까.
초등학생 때는 실컷 놀 수 있는 방학을 기다렸고, 사이다 한 병과 삶은 계란 몇 알을 넣어 소풍가는 날을 기다렸고, ‘우리편 이겨라!’ 외치는 운동회 하는 날을 기다렸다. 새 옷 한 벌 얻어 입는 추석과, 세뱃돈 얻어서 신이 나는 설날을 기다렸고, 산타할아버지가 선물 들고 오시는 성탄절을 기다렸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통지표 받는 날을, 상급학교 합격자 발표를 기다렸고, 기타 치며 노래 부를 수 있는 청년이 되는 날을 기다렸다. 그렇게도 기다렸던 청년이 되어서는 눈매 고운 아가씨를 기다렸다.
꽃비 내리는 공원에서, 수선화 만발한 호반의 벤치에서, 마로니에 잎이 지는 황혼의 거리에서, 함박눈 내리는 날 그 집 앞을 서성이며 사랑을 기다렸다.
결혼 후에는 우리를 닮은 아이를, 그 아이들이 성실한 젊은이 되기를, 향기 나는 숙녀가 되기를 기다렸다.
이제 그 아이들이 짝을 찾아 떠나면서 나는 작은 시골집을 기다린다. 집 뒤로는 푸른 숲으로 이어진 오솔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가면 노송과 거암이 어우러진 산이 있고, 집 앞으로는 송사리 노니는 개울이 흐르고, 누런 호박이 뒹구는 작은 텃밭이 있고, 흰 눈 쌓인 장독대가 있고, 따듯한 아랫목이 있고, 보라색 연기 피어오르는 굴뚝이 있는 그런 시골집을 기다린다.
나는 이제 부자가 되는 것은 기다리지 않는다. 내 이름이 많은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은 더더욱 기다리지 않는다. 다만 허황된 기다림일지도 모르지만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일년에 한 번쯤은 내 옆구리를 찌르며 ‘재미있었어요.’ 라는 인사를 기다린다.
이렇게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참으로 많은 기다림이 있다. 이 많은 기다림 중에 내가 정말 기다리는 것은 정작 따로 있다. 그것은 내 인생의 봄을 기다리는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것을 기다린다는 것은 바보스런 일 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돌아오지 않을 나의 봄을 기다린다.
내게 기다리던 그 봄이 온다면 호반의 야외 카페, 그 벤치에 소복이 쌓인 하얀 눈을 손으로 밀어내고 내 목에 두른 머플러를 그 자리에 깔고, 눈매 서늘한 그녀를 앉히고 낮은 목소리로 ‘엘리자베스 베릿 부라우닝‘의 연시를 들려주고 싶다.
“내 뺨에 흐르는 눈물 / 닦아주고픈 연민 때문에 사랑하지도 말아주세요 / 당신의 위안 오래 받으면 눈물을 잊어버리고, / 그러면 당신 사랑도 떠나갈 테죠 /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 / 사랑의 영원함으로 당신 사랑 오래오래 지니도록.”
나는 이 시를 아주 낮은 목소리로 그녀의 귓전에다 속삭이고 싶다.
그것이 나의 마지막 기다림이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 ‘오직 사랑만을 위해 사랑해 주세요!’라고 속삭여 줄 나의 봄을 기다린다.
(수필가, 수필사랑문학회장 신현식)
20호 (2006.2.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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