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간다. 매연에 찌든 플라타너스가 울울(鬱鬱)한 척해도 실은 속이 곪아 군데군데 상처투성이인 것을 볼 수 있다. 수많은 곁가지들의 쫑알거림에는 귀를 막아 키틴질 납땜을 했다고 한다. 한 나무에 한 가지씩 사연만 걸어두고 고민해야 할 평범한 일상을 접어두고, 육신의 적신호를 무리하게 받아들이는 나잇살을 불리며 혼돈을 견뎌내고 있다. 아니 낯선 도회의 이방인처럼 두리번거릴 때도 허다하다.
무관심과 관용의 틈새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오가며 삶은 이런 것이라고 달라붙어 말할 배짱도 없지만, 요령 없이 버벅대며 머리통만 굵게 한 건 순전히 글을 만지고부터다.
이상과 묵시의 짜깁기라고 여겼던 글쓰기는 처음부터 나를 왕따시키는가 싶더니 내 속을 너무 빤히 들여다보고 있어 섬뜩할 때가 많다. 무구한 백지를 들이밀며 전생이력을 하나도 빼지 말고 제출하라는 호출을 받은 날부터, 낭만과 이상은 무리수를 두며 고립무원으로 그것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가 있다.아이를 낳지 못한 그에게 친정에서 달여 온 탕의 의미는 절박했다.보생탕, 팔진탕, 천금리어탕.......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어지러운 시커먼 액체에다 자라를 넣어 고운 용봉탕과 붕어즙까지, 그의 뱃속은 탕과 즙으로 출렁거렸다.
솟대위에 걸린, 이제 막 발아된 씨앗 터지는 소리를 밤마다 들으며 20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역꾸역 한 사발씩 들이켜는 처절한 행위.
시커먼 흙탕물에 빠진 몸이 헤어 나오지 못해 손사래를 치며 가위에 눌린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다. 이건 보약도 아니고 치료제도 아니다. 한(恨)에 거덜난 막판 집착이다.
가는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아침마다 괴성을 지르며 자신을 가학하는 행위(?)에 몸 담그는 것이다. 가슴속에는 비장한 적의의 깃발을 꽂아둔 채 기약 없는 희망으로 무쇠통 같은 삶의 스크럼을 향하여 한 번 더 빗장을 지르는 것이다.
시와 글이 자학적인 요소를 빼면 뭐가 남을까.
문학이라는 굴레를 덧씌우기까지 말문을 닫아걸고 아파했던 것들이 내게 아무런 암시를 주지 않았을 때의 그 허망함. 저 놈의 원수 같은 실타래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하고-건드려 봤자 문신투성이인 내 알몸만 들어낸 꼴이 될 테니- 스스로 벗고 있어야 편하다고 우기는 편집증까지 가세했으니. 나를 멀찌감치 세워두고 아집의 유희를 순화시켜 다시 내 안으로 거둬들이는 반복의 퍼포먼스인 줄, 세월이 한참 흐른 후 깨닫게 되었다.
친구가 마셨던 시커먼 물은 아무런 해결책 없이 위벽만 흔들고 열매는 생산하지 못한 고사목 같은 것이었다. 그런 체념과 갈증의 시간들에 천착하다가, 홀대하다가, 긍휼히 여기다가 결국은 끌려 다니며 스스로 온갖 수모를 견뎌내게 만드는 것, 그러나 그 문학이란 것이 혹여 나를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강박감에 사로잡힌 적도 많았다.
버릴라치면 눈에 밟혀 나를 옴짝달싹못하게 만드는 그 저력에 번번이 무릎을 꿇으면서 애증의 화살촉에 몸 데인적도 있었다.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속궁합은 그럭저럭 괜찮겠지 하는 믿음 하나로 서로 붙들고 상처 받으며 위무하고 있다고 보면 제일 정확한 답변이리라.
저녁연기를 올리며 장지문 밖으로 도란도란 말소리가 비어져 나오는 순결한 시간. 까르륵대는 어린 아가의 청아한 음색이 지상에서의 모든 고달픔을 마감하는 그런 시간 안으로 빨려들고 싶다.
나에게 생성과 위로를 주기는커녕 후회와 자책과 번민의 구실을 만들어 주는 것이기에 한 발짝 물러나 외려 착해지고 싶기도 하다.
이젠 나도 문학이라는 사내놈과의 정담에 넌더리가 나는 것일까. 원색적인 감수성과 노련한 치기 같은 건 아예 없이 속없는 아낙이 되어 등허리부터 늙어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물은 흘러도 여울은 여울대로 있다.' 라는 말과 같이 내가 꾀를 쓰지 않으면 언제나 나를 그윽이 내려다보는 빠알간 전구 알 같은 순정도 있다.하지만 글에 침윤되어 가는 동안은 갈등과 혼돈, 고달픔의 원흉인 문학이라는 바이러스에 주체할 수 없이 시달리게 된다.
사물을 주관적, 객관적으로 관찰해야하는 양면성에 내 치밀함의 허가 찔리고, 온 몸에 동력을 켜고 혼신의 힘으로 달려들어도 겨우 설익은 작품에 이름 석 자 걸 수 있으니, 내가 잘려나가지 않고는 행간 한 줄도 사치라는 생각이 든다.
괴테는 파우스트를 통하여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고백했다, 내 순결을 찔끔 건드린 장본인은 바로 문학이기에, 나는 그 요상한 실체가 무엇인지 내 염치로는 백번 모른다고 대답해야 옳을 것 같다.
그러기에 덜 아문 상처를 건드리는 비방의 글 앞에서도 겸손해야 하며, 핍진한 세상과의 소통을 염원하는 글줄에는 정중해야 한다.
(시인, 수필가, 사단법인한국편지가족 대구경북지회장)
19호 (2006.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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