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을 굴러온 바람소리가 문턱에 온 겨울을 알린다. 앙상한 나뭇가지로 스산한 들녘이 스치면 내 마음의 들녘에도 스산한 물결이 일어난다. 햇살 따뜻한 통나무집 창가에서 김이 나는 차 한 잔을 나눌 다정한 사람이 이맘때면 그리워진다.
반목과 갈등으로 얼룩졌던 한 해의 시간들이 화해의 약속도 하지 못한 채 뉘엿뉘엿 저물고 있다. 저물어오는 나의 가슴에도 형언할 수 없는 허전함이 몰려온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인간은 넓은 바다 한가운데의 외로운 섬’이라는 그 쓸쓸한 명제를 이겨낼 재간이 없는 것 같다. 아니 늙어갈수록 더욱더 그 명제 앞에 나약해지는 허허로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을 찾는다.
‘사랑’이라는 낱말이 풍기는 그 말맛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 겨울철 따뜻한 이불 속 같은 포근함이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달려온다. 나도 모르는 어떤 구원의 힘이 불끈 솟아난다.
사랑의 따뜻함과 사랑의 주고받음만이 내 고독의 갑옷을 조금씩 벗겨줄 것 같다. 사랑이 이 세상 최고의 어머니라는 것을 노년에 이르러 더욱 실감하게 된다. 나는 그 사랑이라는 어머니 앞에서 철없는 아이가 되어 영원히 응석을 부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맘껏 매달려도 나를 뿌리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전능한 해결사, 나는 나의 마지막 생애까지 그 어머니에 기대어, 어머니의 보호 속에서 편안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살아가는 세월 동안 순수 나 혼자만의 존재로 이루어지는 시간이 얼마나 될까? 모두가 수많은 관계들 속에서 내가 이루어진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부부가 되고, 그들 사이에서 아이들이 태어나 부모자식 관계가 되고, 또 형제자매와 이웃사촌의 관계로 이어진다. 인간의 생애는 이렇게 관계와 관계의 그물에 얽혀 한 바다를 헤엄쳐가는 것이다. 때로 마음의 문을 잠그고 돌담을 높게 쌓기도 하지만, 결국 나와 너의 ‘관계’로 성장하고 성숙하게 된다.
미국의 시인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은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이렇게 노래했다.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관계는 사랑이다. 모든 아름다운 인간관계는 사랑이 바탕이 된다.
소중한 사랑의 감정을 잘 조율하여야 인간관계가 성공할 수 있다. .
때로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나누어야 할 때, 갈등과 반목과 괴로움을 나누고 말 때가 있다. 이때 우리는 우리 사이에 흐르는 강물을 다시 성찰해보아야 한다. 무엇이 우리의 언덕 사이에서 출렁이는 그 강물을 메웠는지, 무엇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했는지, 서로의 잔으로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않았는지를. 자신에게는 지혜로웠지만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이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예언자 지브란은 말했다.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 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참된 인간관계는 함께 서 있으되 너무 가까이 서 있지 않는 것이다.
서로의 인격을 나누며 아름다운 교향악으로 울려 퍼질 수 있는, 하늘 바람이 우리 사이에서 춤추게 하는 그 아름다운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사랑을 다스려가는 사랑의 기술을 가슴으로 배워야 한다.
시인이면서 예언자인 지브란은 인간의 관계에 내재하는 또 하나의 냉엄함을 가르쳐준다. 가치 있는 것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듯, 사랑의 가치도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현명해지듯이, 관계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을 터득해갈 수 있다.
무조건 가슴을 연다고 사랑이 오는 것은 아니다.
관계의 비밀스러움 속에 아름다운 관계도 자라고 있다.
아름다운 관계 속 그 사랑을 나는 영원히 누리며 살고 싶다.
(수필가, 경북대 명예교수)
17호 (2005.12.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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