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기 바쁘게 천변을 거닐다가 집에 들어와서 아침밥을 짓는다. 짓는다고 하기보다 어젯밤 남긴 것을 차려먹는다. 맛이 어떻고 영양이 어떻고 그런 것 들은 한갓 타령이요 사치이다. 과체중에 시달리고 있어서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히 줄이고 잊고 지나간다.
조식은 토마토 두 개와 인절미 두 개로 때운다. 낮에는 밥 한 그릇, 저녁은 흰죽 한 그릇 그렇게 식단이 고정되었다. 반찬은 주로 김치이다. 음식쓰레기도 부담스럽고, 다른 반찬을 만들지 않는 것은 남는 것이 싫어서이다. 버리기도 아깝고 다 먹어치울 수도 없고 제 때 처치를 못하여 썩는 냄새를 맡으며 황당할 때가 많았다.
이왕 자취를 하는 김에 음식 솜씨를 익혔으면 하는 것도 소망이나 말뿐이다. 된장찌개를 잘 끓인다거나 지짐을 잘 붙이는 것도 쉽지 않다. 입으로는 다 할 것 같아 젊은 날 아내의 솜씨를 타박한 것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중학생 때 우리 동네에서 자취하는 친구 셋은 한반이었다. 사는 곳은 각자 달랐지만 한방을 쓰면서 공동취사를 했다. 방세는 삼등분할 지불하고 때가 되면 각자의 쌀자루에서 한 공기씩 염출하여 한 솥에 넣고 밥을 지었다. 반찬은 저마다 집에서 가져온 밑반찬을 찍어 넣었다. 신선한 야챗국이나 생선조림은 못 먹었다. 그리고 토요일은 어김없이 집에 갔다. 집에 가서는 그동안 못 받은 사랑을 듬뿍 받았다. 방안에 옹기종기 정렬해 놓은 쌀자루, 세 개의 책상, 조금은 답답하였지만 그래도 다정하였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생활,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자유분방한 것이 좋아보였다. 나는 그것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언젠가는 그래봐야겠다는 소망을 갖고 살았다.
내게도 그런 행운이 찾아왔다. 직장에서 소임을 마감하고 한 이태 쯤 집에서 놀았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꽤 긴 세월 동안 가르치는 일에 시달렸으니 남은 여력은 있어도 그것이 싫었다. 글 쓰는 공부도 싫었다. 하면 뭣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증 같은 것이었다. 지적 허무주의라고 내가 이름 붙였다. 실컷 놀고 나서 조금 마음이 바뀌었다. 생활의 변화를 갈망하였다.
서울의 변두리에 셋방을 얻고 자취에 들어갔다. 대학에 다닐 때 가보지못한 곳을 두루 찾아다니며 즐겼다. 무시엔 작품을 쓰고 맛있는 집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길이 너무 멀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시외버스를 타는 것이 힘들었다. 비가 오는 날은 정말 기분이 엉망이었다. 비에 젖은 몰골을 차창에 비춰보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가? 허무와 고독감에 잠을 못 이루었다.
방세를 더 얹고 서울시내 전철이 닿는 곳으로 옮겼다. 아침에 일어나서 천변을 거닐기도 하고 더러 산에도 가보고 조금씩 생활에 생기가 돌았다. 한데 나를 아는 친구들이 왜 공기 좋은 낙동강 변을 두고 소음과 먼지투성이인 서울에서 고생을 하느냐? 물을 땐 난감하였다. 그러나 내 나름의 답이 준비되어 있다.
서울에 공부방을 내었다고, 사람이 나이가 들면 산사를 찾아가서 수양을 하거나 그런 쪽으로 마음이 기울지 않은가. 그처럼 나도 마음공부를 하기 위하여 다만 장소가 다를 뿐인 나만의 공간을 찾았다고. 한적한 산사보다 서울에 공부방을 내고 상주하면서 가족이 있는 낙동강 변과 복잡한 도심을 오가는 것이 더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많다. 이것이 오히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에 더 접근해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 한적해서도 안 되고 너무 복잡해서도 안 되는 ‘동과 정’의 경계를 적당히 넘나드는 이 행복의 순간들이 그림자처럼 조상되리라.
오전엔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얼마 전에 새로 시작한 중국어 공부도 하고 그런대로 생활이 빡빡하다. 오후엔 낮잠도 자고 고궁에도 가보고 전시회도 가본다.
무엇다도 일찍 잠자리에 든다. 밤 2시, 먼동이 틀 때 까지 뭘 할 것인가? 예전엔 그렇게 전전반측 잠이 안 오는 병도 앓았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눈만 감으면 절로 잠이 온다. 눈을 뜨면 맑은 정신이다. 못다 한 일들을 미친 듯이 한다.
나는 지금 혼자서 고난에 찌들었던 지나간 삶을 복습한다. 아니 다가올 삶을 예습한다. 아내는 입버릇처럼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워 자기가 먼저 갈 행운을 달라 한다. 한 평생 고생만 시켰으니 그것만은 양보하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내가 없을 때의 삶을 연습하고 있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노인시설에도 가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아있는 젊음으로 살고 싶은 이 욕망만은 지키고 싶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리라. 아니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고 남을 것도 없다. 지금 나는 無念無想의 뒷골목 길을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다.
16호 (2005.1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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