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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안개 때문에 - 박순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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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룩, 호루룩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하 여사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완장을 찬 남자가 달려와서 하 여사 일행을 찰깍 찰깍 카메라에 담는다. 올 것이 왔구나. 피할 사이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도대체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오? 당신 같은 사람들은 이 산에 쓰레기를 무더기로 버리는 사람보다 더 나빠요. 오늘 밤 그리고 내일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시오. 당신들의 뻔뻔한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자녀들에게도 보라고 연락들 하시오. 보통 사람들이 뉴스로 나가는데 그게 보통 일이요?”
호루라기 소리와 남자의 높은 언성에 등산객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이 산을 하 여사 일행을 보기 위해 온 것처럼 곁에 와서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한심하다는 표정이고 더러 연민 어린 시선을 던지는 사람도 있다. 같이 온 사람들은 어느 사이 슬슬 달아나고 하 여사만 붙잡혀 있다.
“이 산에 왜 왔소?”
아 이게 내가 무슨 대단한 상을 타서 매스컴에 오르기 위한 기자와의 인터뷰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 여사는 그 와중에도 엉뚱한 생각을 한다. 참 재수 없다. 왜 나만 붙잡고 늘어지는가? 하 여사는 암만 생각해도 혼자만 붙잡혀 있는 게 억울했다. 남들보다 몸이 굼뜨기를 한가, 이 산에 오자고 주동을 했는가, 죄로 말할 것 같으면 일행 다섯 명중에서 제일 가볍거늘 하루 일진이 나쁘다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 누구 죄가 가볍다고 따질 때가 아니고 재수가 없다고 한탄할 일이 아니다.
하 여사는 잔머리를 굴려 본다. 그러나 뾰족한 묘안이 없다.
남자들은 젊은 여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는데 나에게 젊음이 남아 있는가 어디.
남자들은 얼굴 예쁜 여자에게 약하다는데 내 얼굴 어디가 예뻐야 말이지.
언변이 좋으면 이 난처한 사태에서 헤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솜씨는 또 수, 우, 미, 양, 가중에서 가 일 것이니.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 부러웠던 시절이 하 여사에게 있었다. 과일가게를 하는 친구네 집은 늘 돈에 허덕이며 빚을 쓰곤 했다. 어느 날 친구 엄마와 채권자간에 한바탕의 싸움이 벌어졌다. 당연히 돈을 갚아야 할 친구엄마의 목소리가 낮았는데 때마침 친정 온 친구 고모의 큰 소리에 주객이 전도된 듯 채권자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만 했다고 하 여사 친구는 고모 자랑을 침을 튀겨가며 했다.
“말이지 우리 고모가 얼마나 말을 잘 하는지 정신머리 은행에 저당 잡혔나? 하며 대더니 찍 소리 못하잖아”
그때 하 여사는 그 고모가 얼마나 우러러 보였든지. 앞뒤 어떤 말이 있었는지 알 바 없고 그저 정신머리 은행에 저당 잡혔나 하는 말이 어떻게 갑자기 튀어 나왔는가 그것만 신기했다.
말 한마디에 천 량 빚도 갚는다지 않는가. 친구고모라면 이 상황에서 정신머리 은행에 저당 어쩌고 하는 저속한 말이 아닌 고상한 말로 흥분해 있는 이 감시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하 여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 여사는 친구 고모가 아닌 어디까지나 말주변 하나 없는 하 여사일 뿐이다. 입은 굳어버리기라도 한 듯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때 침묵은 금이 아니라고 여겨져 더듬더듬 한 마디 한다.
“벌금은 얼마든지 낼 테니 사진 찍은 거 삭제해 주세요”
고작 한다는 소리가 메모리 삭제다.
등산을 한다. 천둥소리를 떠올리는 천동계곡의 요란한 물소리와 울창한 숲 속에서 들리는 온갖 새소리와 등산로를 걷는 사람들의 힘찬 발걸음으로 여름 산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비록 등산 코스는 다르지만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 부임 시 올랐다는 신령스러운 산 소백산이다.
하 여사는 아침을 김밥 꼬리만 먹어서 일찌감치 배가 고프다. 마지막 화장실이라 쓰여 있는 간이매점에서 선 채 동동주 한 잔씩 나누어 마시고 옹달샘의 차가운 물도 마시고 옥수수와 토마토, 오이를 먹으며 오르고 또 오른다. 동자꽃, 짚신나물꽃, 미나리냉이, 참취꽃, 마타리 물봉선화 등 귀엽고 예쁜 야생화들이 하 여사 시선을 잡아끈다. 어찌 그냥 가랴. 꽃 접사를 하느라 하 여사는 자꾸 일행에서 쳐지게 되었으나 J가 하 여사보다 산을 더 못 올라 그런 다행이 없다. 나무 계단이 나오고 계단과 계단 사이사이 질경이가 무성히 자라 그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아, 이게 무언가? 밧줄을 쳐놓은 계단 양쪽으로 분홍색을 띄기도 한 보랏빛 꽃,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앙증스레 예쁜 꽃은 그 이름은 예쁘지 않은 노관초란다. 안개가 자욱히 깔린 그 환상적인 꽃길을 하 여사는 “아 좋다.” 라는 짧은 탄성만 지르고 더 말을 못한다.
소백산은 구병산 같은 칼바위가 없다. 월출산처럼 올랐다가 내렸다가 반복하며 쇠사다리를 건너는 일도 없다. 밧줄을 타고 내리거나 오르는 곳은 더욱 없어 1,439미터의 고산이지만 그리 힘들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러나 굴곡 없는 산행은 지루함을 준다. 그런데 아름다운 야생화와 힘차게 흐르는 맑은 계곡이 그 지루함을 달래 준다. 몇 백년 동안 소백산 큰 산을 지켰을 기둥 움푹 파인 큰 고목 주목, 그 우람함에 하 여사의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높이 오를수록 안개는 더욱 짙다. 몇 미터 앞만 뿌옇게 보일 뿐 사방은 안개 또 안개다. 살갗을 마구 파고드는 찬바람에 등의 땀이 식으며 한기가 느껴진다. 오늘 기온이 30도가 넘는다 하지 않았는가. 소백산 기온 차이가 여름에도 이렇게 클 줄은 하 여사는 생각 못했다.
야생화를,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하 여사와 빠르게 산을 오르지 못하는 J 때문에 7시에 시작한 산행이 실제로 안개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정상 비로봉을 눈앞에 둔 시각이 10시 반이다. 비로봉을 향해 앞서 오르는 하 여사를 J가 부른다. 답답하다는 표정이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노관초 거기 밧줄을 타 넘고 들어가자는 것이다.
J는 배앓이를 잘 한다. 배앓이에 이 노관초가 잘 듣는다며 들어가서 퍼뜩 뜯어서 나오자는 것이다. J는 노관초 때문에 왔으나 하 여사는 사실 소백산 등산이 목적인지라 내키지 않았다. 짙은 안개 때문에 노관초가 어디까지 얼마나 뻗쳐 피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하 여사는 목가적 노관초 군락을 디카에 담고 싶은 생각만 간절하다. 밧줄 앞에 서서 하 여사 자신이 당할지도 모를 일을 상상하고 있다.
.같이 왔으면 같이 행동해야 하는 법 하 여사도 결국 밧줄을 타 넘고 일행 뒤를 따라 초원으로 들어간다. 노관초 몇 포기 잘라 나온다. 비록 바닷물을 한 동이 퍼내 듯한 양이지만 너도나도 야생화를 채취하면 산은 어떻게 될 것인가. 산에 있는 꽃은 산에 두고 봄으로 그 산이 더욱 아름다운 법 야생화는 보호되어야 하지 않는가. 산 사랑의 실천을 못한 양심의 가책을 하 여사는 느낀다.
호루라기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카메라에 찍히지도 않았다. 하 여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리 없는 J는 안개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볼록해진 배낭을 가리키며 하얗게 웃는다.
여전히 바람은 겨울처럼 차갑게 불고 안개는 주위 경관을 막은 채 뿌옇다. 하 여사는 힘주어 발걸음을 비로봉을 향해 옮기고 있다. 덜 덜 덜 떨며.
15호 (2005.1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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