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bject	[수필] 옆집 아저씨 - 이화련

  에프주택으로 이사하길 잘 했다. 공기가 맑고 우체국도 가깝고, 무엇보다 이웃이 좋다. 우리 집은 26호, 맨 뒷집이다. 대문과 뒷담은 각각 골목에 닿아있고 앞에는 28호, 왼쪽으로는 25호가 있다.
마을이 교실이라면 우리 분단은 모두 여덟 집이고 우리 집은 25호와 짝이 되었다. 짝을 참 잘 만났다.
  옆집 내외는 인상부터 좋다. 쉰이 넘었다는데 늘 웃는 얼굴이라 그런지 훨씬 젊어 보인다. 주인을 닮아 그 집 마당도 푸르고 싱싱하다.
봄이면 쑥갓이며 상추가 탐스럽게 자라고, 똑같은 꽃이라도 그 마당에 핀 것은 더 붉고 환하다.
  그들은 인정이 있다. 이웃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주저 없이 달려온다. 특히 그 집 아저씨는 남의 일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다. 몇 년 전 세찬 비로 우리 집 지붕이 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알아봤다.
그 날은 비바람이 어찌나 심한지 나무가 넘어질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저씨는 지붕에 올라가 보겠다고 했다. 위에서 쏟아진 물이 부엌 천장을 부수고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이면 남편이 직장 일로 멀리 가 있을 때였다.
  가장이 부재중인 이웃을 위해 의연히 일어선 그를 모두들 말렸다. 이미 캄캄해진 뒤였고 천둥 번개까지 요란했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살펴보자고 했지만 아저씨는 슬그머니 나갔다. 그가 옥상의 배수구를 막은 공을 치워 준 덕분에 집안으로 들어오던 물이 제 길을 찾았다.
  겪어보니 그 집엔 없는 게 없다. 호미, 삽, 전지가위, 사다리…. 우리도 웬만큼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옆집에 대면 아직 멀었다.
무슨 일이 생겨서야 생각나는 물건이, 우리 집에는 없는 그런 게 그 집엔 있다. 내가 물난리로 허둥거릴 때 아저씨가 들고 온 비닐 포장도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비닐로 물길을 내어, 부엌 바닥으로 쏟아지는 빗물을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25호 창고에 있는 보물 같은 그것들은 칠칠치 못한 옆집 때문에 더욱 빛이 난다. 적어도 일 년에 한두 번은 우리 집을 위해 진가를 발휘한다.
언젠가 붙박이 찬장이 내려앉았을 때도 그랬다. 찬장을 지탱하던 못이 부러졌는데 주저앉듯 밑으로 똑바로 떨어져서 다행히 그릇만 몇 개 깨졌다.
하지만 그걸 도로 벽에 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두 짝을 이어 붙인 몸체를 들어올리기도 버거웠다. 부엌가구 대리점에 연락했으나 일손이 달려 사람을 보낼 수 없다고 했다.
  꼼짝없이 새로 사야 하나? 가족과 친구들은 그러는 게 낫겠다고 했지만 나는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래 돼 낡긴 했어도 크게 부서지지 않은 걸 버리려니 아까웠다.
  우선 찬장을 밖으로 치워놓았다. 마침 옆집 아저씨도 마당에 나와 있었다. 그를 보는 순간 갑자기 희망의 등불이 켜지는 듯했다.
다가가 인사를 건넨 다음 혼잣말을 했다. 속이 상해 못 살겠다고, 잊을 만하면 일이 자꾸 터진다고, 멀쩡하던 찬장이 떨어질 게 뭐냐고…. 아저씨는 귀가 밝았다. 건너 와 찬장과 부엌을 훑어보고 가더니 망치를 들고 왔다.
망치는 우리도 있었지만 손가락만큼 굵은 목과 벽에 덧댈 모나무 따위는 모두 그 집에서 나왔다. 몇 번의 못질로 찬장은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아저씨 신세를 진 일은 또 있다. 어느 날 누가 우리 집 담벼락 옆에 차를 댔는데 하도 벽에 바짝 붙여서 작은 방의 창문을 막아 버렸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차 주인이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났다. 그냥 내가 참았어도 되는데, 그러기엔 그 날의 불쾌지수가 너무 높았다. 다음부터는 창문을 피해서 차를 대라고 한 마디 했다.
그랬더니 차 주인은 미안하다고 하는데 그의 일행인 듯한 남자가 큰 소리로 욕을 했다. 옥신각신 시끄러워졌다. 나는 분통이 터지겠건만 충청도 양반인 남편은 들어가자며 내 옷자락을 끌었다.
그때 아저씨가 나왔다. 누가 남의 동네에 와서 행패냐고 호통을 쳤다. 다부진 체격에 목소리가 쩌렁쩌렁한 사나이가 내 응원군으로 등장하자 상대는 금방 기가 죽었다.
누군데 참견이냐고, 한풀 죽은 소리로 물었다. 아저씨가 한 걸음 다가서며 대답했다. 옆집이라고, 옆집에 사는데 어쩔 테냐고….
  당연히 아저씨는 인기가 많다. 마을에서 대청소라도 하는 날이면 여자들이 서로 아저씨를 불러댄다. 그 시간에 다른 일이 겹치는 부인 대신 나온 아저씨는 청일점이다.
우리로서는 대환영이다. 여자들이 들고 나온 고만고만한 빗자루들 틈에서 아저씨의 큼직한 싸리비는 단연 돋보인다. 우리가 허리 아프도록 종종거릴 때 그의 빗자루가 몇 번만 쓸고 지나가면 골목이 멀끔해진다.
  그는 소문난 애처가다. 그 덕을 나도 좀 본다. 옆집 남자가 애처가라고 우리 집 남자도 애처가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아저씨는 부인이 험한 일 하는 걸 못 본다. 주민들이 돌아가며 하는 마을 공용 쓰레기통 청소도 그 집은 부인이 안 한다.
23호와 24호, 25호와 26호, 이렇게 두 집씩 짝을 지어 청소하는데 우리 차례가 되면 옆집에선 아저씨가 나온다.
그런 일을 하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우리 집 남자는 나를 내보내고, 나도 별 불만 없이 아저씨를 돕는다.
  그러다 요즘은 우리 집도 남편이 나간다. 썩 달가운 얼굴은 아니지만 아저씨가 집 앞으로 쓰레기통을 끌고 오면 선선히 일어나 나간다.
애처가 옆에서 몇 년 살다 보면 그 흉내라도 내게 되나 보다.
  이래저래 나는 옆집이 고맙다. 이사 한번 정말 잘 했다.


14호 (2005.10.27)



list


prev	[시] 하, 이 가을에 - 류영구	kbnews

next	[시] 할매와 라마 - 구광렬	kb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