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여 년간 내 곁에 있었던「팡세」를 잃었다. 마치 둥지에서 오래도록 함께 지내던 비둘기가 멀리 날아가듯 그렇게 사라졌다. 더 읽을 의미도 소멸했기에 어쩌면 그를 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한동안 끈질기게 그를 읽은 이유는 분명하지 않았다. 저 유명한 단장(斷章), 생각하는 갈대 때문이었을까? ‘인간은 하나의 갈대, 자연에서 가장 약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결코 이 구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 파스칼의 「팡세」를 접한 것은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즐겨 참여했던 기독교 모임 호산나 동아리에서 추천한 책이었다. 의미를 모르면서도 열심히 읽었다. 회원의 독후감과 지도교수의 해설을 들었으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지나서 두 번째 그 책을 구입하여 읽은 것은 전방에서 통역장교로 군복무를 할 때였다. 바쁜 일과였으나 틈틈이 몇 쪽씩 음미하면서 읽었다.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비로소 깊은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같은 책을 두어 번 읽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중요한 부분에 밑줄까지 치며 천천히 읽었다.
결국 그 많은 것들 중에서도 특별한 단장 하나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므로 오만한 인간이여, 그대들은 자신이 얼마나 모순덩어리인지 알지어다. 겸손하라, 무력한 이성이여. 조용히 하라, 우둔한 본성이여. 인간은 무한히 인간을 초월하고 있음을 깨달아라. 그리고…신의 말씀에 귀기울이라….’ 바로 이것이었다. 이 단장의 외침이 내 마음 속으로 들어와 가장 깊은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외침을 따르는 그런 순수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이 그 당시 나의 관심사였다.
그때 나는 군부대에서 조금 떨어진 양구읍에서 하숙하며 군복무를 했다. 동네 변두리에 있는 언덕 위의 작은 초가집에서였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검소하고 늘 검정 무명치마를 입었다. 그분의 큰 아들이 나보다 조금 어렸으니 아마도 그때 나이가 50대 초반은 되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여학교를 다녔다고 하며 해방 후 귀환동포로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친척을 찾아 양구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가난했다. 위로 아들 셋, 아래로 딸이 있었으나 조국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해주는 것이 없었다. 아저씨와 큰 아들까지 열심히 일했다. 아주머니, 그분은 돼지와 닭을 기르고 텃밭에 채소를 가꾸며 때로는 시장에서 궂은일도 했다. 양구는 작은 군인도시였으므로 남은 방 하나에 군인들을 하숙시키며 생활비에 보탰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진심으로 그분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벽촌에서 이런 분을 만나다니. 그분은 정말 온유하고 겸손했다. 늘 성경을 읽었으며 조용하고 마음이 깊었다. 신앙생활도 두터웠다. 비록 가난했으나 교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제나 친절했고 군생활에서 방황하고 있는 나를 편하게 보살펴 주었다. 나는 그 가정에서 거의 2년이나 생활하면서 그분의 경건한 분위기를 느끼며「팡세」를 더욱 열심히 읽었다.
그 댁에 와서 처음 맞은 내 생일에 그분은 내게 책 한 한권을 선물했다. 안병욱교수가 지은 「세계대사상전집(2) 파스칼」이었다. 아마도 내가 읽고 있는 「팡세」 때문에 그것을 선택하였던 것 같았다. 그 책 서설(序說)에서 안교수는 「팡세」의 단장 세 구절로부터 고독한 천재적 사상가 파스칼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신음하면서 구하는 자만을 시인할 수 있다’, ‘주여 저를 버리지 마옵소서’ 등이 바로 그 구절이었다. 진정으로 파스칼은 진리를 생각하는 자이고 신음하면서 그것을 추구하였으며 성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선물로 받은 그 책을 볼 때마다 그분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분이야말로 내가 「팡세」에서 가장 좋아했던 단장의 외침을 소박하게 실천하는 실존 인물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하였다. 세상에는 많은 훌륭한 사람들이 있지만 가장 겸손하고 선행을 계속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바로 그분 아니었던가. 나에게 있어서 그분은 성실하면서도 평범한 나의 파스칼이었다. 어느 날 나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고 얘기했다. 놀라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술을 절제하도록 기도드린다고 대답하였다. 그 당시 나는 교회에 같이 나가자는 그분의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또 군인이라는 핑계로 걸핏하면 술을 마셨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갔다. 나는 양구를 떠나 원주와 의정부에서 군대생활을 마저 하였고 전역하여 서울에서 새로운 직장을 다녔다. 그동안 뵙기가 어려웠으므로 이따금씩 그분께 편지를 보냈다. 우리에겐 또 다시 많은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분 가족들이 서울로 옮겨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사 온 집은 서울 변두리의 달동네였다. 모처럼 그 댁을 찾아 만남의 기쁨을 나누었다. 도시로 왔으나 생활이 더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 어려움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의 작은 위로는 그분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 후 아저씨가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고 아들이 남아메리카 어느 곳으로 이민 갔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분의 소식도 뚝 끊어졌다. 마지막으로 그 댁을 방문했을 때 모두 어디로 옮겨갔는지 그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은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사라진 것이다.
오래도록 마음으로 같이했던 나의 파스칼 아니 나에겐 ‘팡세’ 자체였던 그분을 그런 식으로 잃어버렸다. 목이 메었다. 내가 좋아했던 ‘그러므로 오만한 인간이여…’라는 단장의 의미도 퇴색되었다. 읽을 흥미까지 사라져 ‘팡세’에 관한 책들마저 치워버렸다.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최홍식(부산대학교 생활환경대학 학장)
4호 (2005.4.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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