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조금은 위로받은 불행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녀의 생(生) 또한 위로 받지 못한 불행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 구(李 玖) 씨의 전 부인 줄리아 멀록 여사, 미국의 한 건축사무실에서 만난 여덟 살 연하의 동양 남자는 그녀에게는 빛이고 어둠이었다. 그러나 어둠은 끝내 빛을 삼키고 그녀는 버려진 이방인이 된다.
1958년 미국에서 결혼하고 1963년 남편을 따라 한국에 온 뒤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해 온 그녀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되는 나라에서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것도 황손의 대(代)를 잇지 못하는 것은 큰 죄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국인인 그녀를 마땅치 않게 여겼던 종친(宗親)들은 이혼을 종용했고 결국 1982년 헤어졌다. 아무도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주지 않는 황세손비는 그렇게 홀로 남아 궁핍과 외로움을 견뎌야 했다.
서울의 한 외국인 임대주택에서 10년 넘게 바느질과 영어교습을 했지만 가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1995년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그녀는 미국 하와이의 친정집으로 돌아갔다. 2000년 가을 잠깐 서울을 찾았던 그녀는 5년 뒤 남편과 자신의 얘기를 다룰 영화 관계로 다시 서울에 왔다가 남편의 별세 소식을 듣는다. 몰락하는 작은 나라 조선의 왕자를 사랑했기에 그의 비극조차 온몸으로 끌어안아야 했던 여인은 이제 팔순의 할머니가 되어 먼저 간 남편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당신(나와 헤어진) 그동안 행복했나요? 안 행복했나요?” 죽기 전 남편을 만나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다고 한다. 결국 모든 세상일은 부질없고, 무심하게 떠나 돌아오지 않는 강이 되고 만다.
한때 ‘마누라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웃는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울고 싶은 남자들’, 가정의 외딴섬, 평범한 가장(家長)들의 비애도 심각한 모양이다. 목멘 ‘홀로 아리랑’처럼···, 경국대전에 자식이 부모의 역모를 신고할 경우 수사하지도, 처벌하지도 않는다는 조항이 포함돼 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에서 이렇듯 보호해야 할 가치를 존중했다. 그러나 요즘의 자식, 그것은 모계사회로 지향하는 ‘등 돌린 애물단지‘로 비유된다. 황혼이혼의 급증도 같은 맥락이다.
어느 인도 여행기 ‘성스런 죽음’의 한 대목이다.
쌓아올린 장작더미 불길 속에 사람의 주검이 보인다. 채 타지도 않은 시체들을 나무막대기로 뒤적거리는 사람들의 표정은 무심하다. ’툭‘하고 타다 남은 다리 하나가 떨어지자 개가 물어간다. 쫒거나 뭐라는 이도 없다. 얼마 전까지 숨쉬고 살았을 주검은 그렇게 2시간 남짓한 시간에 재가 되어 갠지스 강에 뿌려진다.
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1954)'에서 마릴린 먼로가 저음으로 쓸쓸히 부르던 노래가 겹쳐진다. 삼라만상,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가족’이란 소중한 단어다. 이런 관계마저 저버리는 어리석음은 범치 말아야 할 일이다.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저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김광섭의 ‘저녁에’
세상살이가 쉽지 않기에 ‘돌아오지 않는 강’에서 ‘세상은 슬픈 거라며, 한 없이 서러운 거라며‘ 지난 세월이라도 부여잡고 그녀가 그리워한 것도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김종윤
12호 (200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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