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결혼한 새댁이었을 때였다. 신혼집은 동해안의 한 귀퉁이인 방어진에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서면 푸른 바다가 그림처럼 내려다보이는 집이었다. 산 밑, 언덕배기에 있는 아파트는 찻길에서 너무 멀어 늘 헉헉대며 올라가야 했다.
그 높은 곳까지 월부 책장사며 행상인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이 현관문을 두드리면 나는 언제든지 문을 열어 주었다. 집에 온 손님은 물론이고 동냥 온 거지에게도 밥상을 차려주던 친정의 오랜 내력 때문이었을까. 수많은 장사꾼들이 우리 집을 다녀갔다. 김을 팔러 다니는 아줌마도 있었고 신혼살림에 필요 없는 커다란 대바구니를 팔러 온 할머니도 있었다. 설문지 조사를 핑계로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나로 하여금 그림책을 사도록 만든 야무진 아가씨도 만났다. 전도를 위해 찾아오는 교인은 내게 책자를 권했고 어떤 스님은 불사(佛事)를 위해 시줏돈을 받아갔다.
나는 그들을 즐겁게 맞아들이고 성의껏 이야기를 들었으며 형편에 맞추어 물건을 사주었다. 때론 그들의 푸념어린 신세 한탄을 들으며 눈물을 지은 적도 있었고 살림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도 했다.
그 멀고 외진 곳까지 찾아온 사람들에게 물 한잔이라도 대접해 보내려 애를 썼다. 그 해 여름, 나는 미숫가루를 꽤 많이 탔던 것 같다. 그 시절의 나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의심이 없었다. 그들을 믿었고 다행히 모두들 내게 도움을 준 셈이었다. 당시에는 사놓고 아무 필요가 없던 바구니였지만 지금 얼마나 요긴하게 쓰는지 모른다. 그리고 원색의 고운 그림책은 딸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태어나서부터 읽어준 그 동화책을 시작으로 딸은 책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현관 밖에서 벨을 누르는 사람을 함부로 집에 들이지 않게 되었다. 찾아오는 장사꾼의 말에 대꾸하는 시간도 아까워하고 전화로 만나는 세일즈맨조차 꺼리게 되었다. 그들의 전화를 받으면 나는 먼저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본다. 전화가 생각보다 길어지기도 하지만 상대가 신원을 밝히면 대충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 냉정함에 스스로 놀랄 때도 있다.
어제 저녁, 아들이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대화 내용이 상당히 수상쩍었다. 아이는 통화를 하면서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20여분이 지나서야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컴퓨터 학원에서 수강을 권하는 전화라고 했다. 나는 그럴 때면 학원에서 온 광고용 전화를 제때 끊지 못하고 식사 시간이나 다른 일이 지연되는 것이 안타까워 아이에게 핀잔을 주곤 했다.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인 전화를 건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배려도 냉정하게 버려야 한다고 강요한 것이다. 그리고 외출할 때마다 아이들에게 문단속을 시킨다.
신혼의 나처럼 벨을 누르는 모든 사람을 친절히 응대하는 아이들에게 함부로 문을 열어주면 안된다고 말한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사람에 대한 불신을 자꾸만 주입시키는 것이다. 어느새, 나는 어떤 경우에라도 피해를 입거나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는 생존의 논리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잔인한 일은 아이들의 따뜻한 품성을 감싸주기보다 웃음거리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우리 동네 피자집은 피자를 배달할 때마다 스티커를 한 장씩 준다. 스티커가 일곱 개 모이면 공짜로 피자 한 판을 먹을 수 있다. 다 모인 스티커를 들고도 아들과 딸은 좀처럼 피자집에 전화를 걸지 못한다.
그 심리를 유리알 들여 보듯 환히 알고 있으면서도 아이들 대신 전화를 해주고 잘난 척 유세를 부리곤 했다.
그 때마다 아이는 무엇이 잘못인지 납득하지 못한 채 막연히 강해질 것을 다짐한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 강해지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그래서 순수한 마음은 점점 타인의 감정에 무디어져 가고 계산적이 될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손해 보지 않으려 하기에 나누고 베푸는 삶의 아름다움을 지나쳐 갈지도 모른다. 자로 잰 듯 빈틈없는 생활은 또 여유를 잃은 채 살아가게 되지 않겠는가.
변해버린 나의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해 보곤 한다. 아이들의 그 여린 심성이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진짜 큰 힘이 될지도 모른다고.
아이들이 대학생이 되면서 저들에게 필요 없는 전화는 요령껏 해결하고 쿠폰을 쓰는 일도 거리낌이 없어졌다. 교육의 힘일까, 퇴행의 속도가 세대를 내려가면서 더 빨라지는 것 같아 서글퍼진다.
사공정숙
11호 (200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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