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설악산 쪽으로 여름휴가를 떠난 아들 녀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쯤에 아들내외는 내려오고 우리는 올라가고 백암온천에서 하루를 보내자고 한다. 아들 내외의 깊은 생각도 고맙지만 세 살 난 손녀재롱이 눈앞에 삼삼하여 아내도 쉽게 동의하였다. 서둘러 콘도를 예약하고 점심때가 지나서 짐을 챙겨 출발하였다.
출발할 때 흐리긴 했어도 비는 오지는 않았는데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빗방울이 굵어졌다. 백암온천은 동해안 7번 국도를 따라 해변을 끼고 올라가다가 평해 에서 온정 가는 지방도로를 택해야 한다. 30리나 되는 호젓한 시골길이지만, 이 때쯤이면 백일홍이 길 양쪽에 만발하여 오가는 길손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길이다.
굽이굽이 돌아서는 골짜기에는 항상 물이 흐르고, 병풍그림 같은 소나무가 수려한 경관을 이루어 보면 볼수록 다시 보고 싶은 백암 가는 길이다.
지금은 비가 많이 내려 이런 경관을 볼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쉽다. 바람까지 세차게 불어 한 치 앞도 안보며 차마다 비상등을 켜고 거북이 운전을 하였다. 콘도에 도착을 하여 아들과 통화를 하니 아직도 강원도와 경상도 경계 지점에 있는 휴게소라고 한다.
우리 부부는 방을 정한 뒤 아들내외가 올 때까지 온천물에 목욕부터 하기로 했다. 비가 많이 오는 탓인지 넓은 목욕탕안에 손님이라라고는 두서너 명밖에 없었다. 오랜만에 느긋한 온천욕을 즐길 수 있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도 비는 한결 같았다. 아내는 아직 한참은 더 있어야 올 것 같아, 이불장에서 요를 꺼내 펴는 순간 무엇이 방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아주 작은 상자와 흰 봉투였다. 작은 상자에는 꽤나 큰 진주알이 박혀있는 반지였고, 봉투에는 현금 47만원이 들어있었다. 퇴실한 손심이 꼭꼭 숨겨놓고 그냥 가버린 물건이라 짐작이 되었다.
“이 돈이면……?”
견물생심이라 했던가? 순간 욕심이 생겼다. 맥박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가슴까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얼굴에 열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창문을 열었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비는 바람까지 합세하여 아까보다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내리다 못해 방안에까지 작은 물방울이 날렸다. 시원한 바람에 열이 좀 내리는 것 같기도 했다. 도둑심보나 양심이 다 순간적인 것 같았다. 아내는 그 때까지도 올라오지 않았고, 나는 마음이 변하기 전에 프론트로 내려갔다.
먼저 반지와 봉투를 내려놓고 직원에게 신고를 했다. 씁쓰레한 기운도 남아았지만 마음이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직원이 이래저래 확인을 해보더니 우리가 묵는 507호에 오늘 퇴실한 손님이 없다면서 담당 직원이 올 때까지만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정중히 부탁했다. 직원과 나와의 대화를 들었던지 다른 손님들이 너무 좋은 일 하신다며 칭찬 한마디씩을 건넨다. 어떤 아주머니는 진주알이 이 정도 크기면 값이 꽤 나간다며 다시 한 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의 심장 뛰는 소리는 간 곳 없고 화사한 마음이 얼굴에까지 피어올라오는 것 같았다.
마침 아들 며느리도 도착을 하였다. 오늘따라 손녀의 눈망울이 더 맑아 보인다. 많은 시선을 받으니까 어깨가 으슥해지며 담당직원과의 대화도 무척 부드러워진다. 전산 기록을 이래저래 찾아보더니 마칠 전에 퇴실한 고객이 있다며 직접 통화를 해보라며 수화기를 건네준다. 자신은 잃어버린 물건이 없는데 일행 중에 혹시 있을지도 모른다며 너무 고마워했다. 나의 인적사항과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반지와 봉투를 자랑삼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손녀와 기분좋게 뽀뽀를 하였다.
그때서야 아내는 목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아들 내외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여보! 진주알이 이 정도로 크면 꽤 비싸지?”
의기양양하게 반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아내가 탁자위의 물건과 이브자리를 보더니
“벌써 이불 깔았어요? 제가 이불 속에 넣어 두었어요.”
아주 태연한 목소리다. 너무 황당해서
“현금이 얼만데?”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얼마긴 47만원이지.”
아내의 의아해하는 눈빛에, 아들내외의 볼이 터질 것 같은 웃음이 한꺼번에 내게로 몰려온다.
이상윤
8호 (2005.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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