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ubject	[단수필] 아치울의 봄 - 이춘미

엊그제 까지도 찬바람이 나뭇가지에 머무는가 했는데 아치울의 봄은 어느새 화사한 빛으로 내 곁에 와 있다.
아직은 잎새를 피우지 못해 앙상한 느티나무 가지 끝에 걸린 보름달이 창 밖에서 기웃거리며 기어이 나를 불러낸다.
집밖을 나서니 온통 눈이 부시다. 나직한 산등성이 양쪽 비탈에는 흰 눈을 뿌린 듯 하얗게 배꽃이 피어있다.
꽃가지 사이로 달은 수줍은 듯하면서도 요염한 배꽃의 자태에 흠뻑 젖어 있다. 애절한 그리움을 억누를 길이 없어 꽃 속으로 깊이 몸을 숨긴 달빛이 정겹다.
기품 있고 우아한 배꽃은 많은 묵객들의 혼을 앗아 갔듯이 오염함이 오히려 고고하다.
사람들에게 부대끼며 살아온 내 삶들이 저만치 무리 진 꽃 사이로 되살아난다.
화해의 방법에 익숙하지 않은 너와 나의 삶의 방법들이 이제는 무섭도록 싫다. 자신을 양보하지 않은 무지는 늘 그 자신을 더 큰 고통으로 이끌고 간다는 진리를 나 자신은 깨닫지 못하면서 타인에게 강요하는 모순들, 화해는 또 다른 한쪽의 피해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생의 한 부분인 것이다.
두고 온 세월의 앙금들이 회한이 되어 나를 감싸 돈다.
소유에 집착한 인간들의 욕망이 자연 앞에서면 한 낮 부질없는 허상일 뿐인데 사람들은 자연을 배우지 않으려 한다.
사람에게는 그 마다의 그릇이 있다. 자신의 그릇에 넘치는 내용물을 요구할 때면 그릇은 넘치게 마련이다.
그 그릇을 나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다. 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홀로가 되어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을 모르는가.
많은 이웃들과 어우러져 살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사랑은 아니다. 기쁨과 슬픔을 나누어 가질 때 즐거움과 고통을 분담할 수 있을 때 무연(無緣)의 타인과도 사랑이 교감된다. 인간의 마음도 비움으로 해서 채워진다는 단순한 진리를 거역하고 가진 것에 처절하게 집착하는 인간들의 욕망이 자연 앞에 서면 한 없이 부끄러워진다.
흰 달빛은 지금 은은한 빛깔로 배꽃에 담겨있다.
채 피우지 못한 꽃망울을 어루만지며 꽃술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만개한 꽃들을 달빛과 어우러져 자연의 공평한 섭리에 순응한다.
나는 내가 가졌던 숱한 것을 털어버리고 더 가벼워진 무게로 아치울 마을로 옮겨 온지도 벌써 손가락이 몇 개나 접어지는 세월이다.
보름달은 이제 하늘 높이 떠 있다. 조금은 작아진 달 속에서 옥토끼는 아직도 방아를 찧고 있구나.
순백의 꽃들은 떠나가는 달빛을 아쉬워하며 마지막 정념으로 요염하다.
자연의 흐름은 아쉬움과 희망을 반복하며 우주만상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들 또한 그 자연의 미미한 존재임을 나는 지금에서야 깨달은 어리석음이 부끄럽다. 더 가짐도 없이 더 잃은 것도 없는 것을 왜 나는 지금까지 소유하려 발버둥 쳤던가?
달빛을 등지고 걷고 있는 내 그림자가 눈물로 젖어있다.

이춘미

7호 (2005.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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