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여자는 봄을 타는가.
올봄도 예외 없이 꽃길을 달리는 여행길에 올랐다. 정성껏 준비한 음식을 나누며 차안은 더없이 화기애애한데, 바람에 너울거리는 청보리 밭이 고향들녘을 닮아 정겨운 창밖 풍경에 나는 줄곧 시선을 보내고 있다.
멀리로 가물가물 서해바다가 희뿌연 안개에 젖어 있다. 젊은 날 수많은 발자국을 남겨 놓았던 그 바닷가를 함께 걷던 사람들은 어디서 이봄을 보내고 있을까? 세월의 순리를 따라 늙어가고 있을 얼굴들이 문득 보고 싶어진다.
해거름 울창한 삼나무 숲과 어우러진 빨간 동백꽃의 마중을 받으며 대흥사경내에 이르렀다. 우리 일행이 하룻밤을 묵게 될 곳은 학승들이 기거하는 강원(講院)으로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커다란 방이었다.
여행객의 해우소 출입을 위해 켜져 있는 전등 불빛이 둘레의 먹빛 어둠 한쪽을 밝히며 산사의 밤은 깊어가고, 이야기꽃을 피우던 여흥시간이 지나자 모두들 정갈한 이부자리에 잠을 청했다.
아직은 미명, 산중의 고요를 흔드는 스님의 예불소리에 잠을 깼다. 깊은 산 새벽공기가 가슴까지 시원한 경내를 돌아본다.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의 대웅보전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대웅전도 좌측 백설당에 걸려 있는 추사의 편액(扁額)도 세월을 보듬고 길손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경내 당우들에 걸려있는 현판 글씨를 쓴 당대의 명필가들은 가고 없지만, 삶이 머물렀던 흔적들이 나를 엄숙한 무상에 젖게 한다.
표충사를 지나 동다실 전통찻집 앞에 잠시 멈춰 섰다.
초의선사가 다산선생. 추사선생과 더불어 차를 마시며 은거하던 차(茶)문화의 성지(聖地) 일지암을 어우르고 있는 고사(古寺)대흥사의 분합문 꽃창살이 동쪽 능선으로 솟아오르는 햇살을 받아 더욱 (燦然)하다.
앳된 모습의 스님이 합장하며 곁을 지난다. 세상을 등지고 구도자의 길을 걷고 있을 어느 여인의 청춘의 봄처럼 저 스님에게도 혹시 상처 입은 봄날이 있었을까? 모퉁이를 돌아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세월저편으로 잊혀진 그녀를 생각했다.
아침식사 후 주지스님이 특별히 마련한 녹차대접을 받았다. 선하게 살라는 스님의 화두는 술술 막힘없이 이어졌고, 방문 기념이라며 손수 쓴 글씨도 선물로 받았다. 종교가 지향하는 길은 결국 하나이며 종교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참 종교인이 될 수 있다고 한 법정스님의 말씀이 불씨처럼 살아나 귓가를 맴돈다.
난생 처음 먹어본 사찰음식, 부처님이 모셔진 방에서 쉬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지난밤 일을 생각하며 내가 믿는 종교 추구하는 삶의 고정관념으로 행여 자기 편향적으로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자아를 돌아본다.
사춘기의 감성에 젖어 거닐던 꽃길도, 탄성을 자아내게 했던 고운 빛의 노을도 흐르는 시간 속에 잡아둘 수는 없는 일, 행복의 전이를 느끼게 했던 봄날은 또 그렇게 가고 있었다.
아쉬움을 남긴 채......
권영자
5호 (2005.4.1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