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모는 소달구지에 매달려 낙동강 변 밤나무 숲에 자주 갔다. 그곳 ‘수’ 모래밭에는 수만 평의 밤나무 숲과 땅콩 밭이 있었다. 내 어린 시절 동심은 이랑 끝이 보이지 않는 땅콩 밭과 밤나무 숲이 늘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 푸른 물과 함께 넌출지게 흘렀다.
어린 시절에는 아름드리 무성한 밤나무 모래밭에서 맘껏 뒹굴며 해 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놀았다. 밤꽃은 볼품은 없다. 그러나 벌을 불러 모으는 강력한 냄새 때문에 많은 벌들이 윙윙거리며 우유 빛 빼빼로 막대기 같은 밤꽃을 수도 없이 들락거렸을 텐데도, 어린 나는 여기저기 송이가 저절로 툭툭 떨어져 널려있는 아람을 주워 모으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푸른 생 밤송이를 꺾어서 발로 뭉개어 생밤을 제왕절개 수술하듯 속을 헤집어 꺼내곤 했다. 그러나 밤꽃 향기는 내 기억의 저장고에 갈무리가 되어 있지 않다.
해마다 추위와 더위는 아랑곳없이 학년이 올라가기 전에 학교마다 숨을 고르기 위한 봄방학을 한다. 우리 독서실에도 밤을 낮 삼아 열심히 공부하던 고3언니들의 빈자리를 초등학교 6학년생들이 느닷없이 성숙하게 변한 모습으로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채워준다.
오뉴월도 아닌 2월 정초에 독서실 열람실에 밤꽃 피는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밤꽃은 본의 아니게 피기 시작했으나, 아무리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거나 미모가 뛰어난 학생일지언정 비릿하고 역겨운 냄새 때문에 생래적인 향기마저 맘껏 풍길 수가 없다. 방과 후 야간자율학습에 학원과 개인과외라는 입시지옥에 갇혀 꽃다운 이팔청춘을 담보로 밤꽃의 숨은 비밀은 고이 접어야만 했단다.
이조시대에 가무와 기예가 출중한 어린 기녀(妓女)들은 만 16세만 되면, 고을 원님이나 학식과 지체가 높은 남정네들이 머리를 얹어 줌으로 어른 구실을 할 수가 있었고, 그렇게 함으로 기적(妓籍)에 올라 기생으로 떳떳한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공부는 별로 신통찮으나 내가 보아도 평소에 호감이 가는 미남평의 한 남학생이 있었다. 한번은 내자가 사무실 앞을 지나가는 예의 그 학생을 지칭하면서 영화배우처럼 참 잘 생겼다고 무심코 중얼거렸다. 남자인 내가 보아도 미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당시로는 예사로 들어 넘겨 기분이 불쾌하지는 않았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자가 예전에 한 이야기가 공연히 해본 소리 같지 않다. 밤꽃의 비밀을 알기 때문인 듯하여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등단을 하고 나서 야간 문학 강의를 받으러 다닐 때다. 사무실을 잠깐 비워야 할 경우 사무실을 종종 맡긴 여학생이 있었다. 단정한 용모에 장기간 우리 독서실에 다닌 자매들이다. 모두 귀염성 있고 붙임성이 좋았다. 자기 부친이 중학교 교사이고, 서로 잘 아는 사이기 때문에 평소에 잘 대해 주었을 뿐이다. 한 번은 내가 다른 여학생과 사무실에서 상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목격한 모양이다. 자신들을 외면하고 다른 여학생과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았는지, 뭔가 착각한 자매들은 이층을 몇 번 오르내리며 평소와 달리 무언의 돌출행동을 보이다가 그날부로 짐을 싸 독서실을 그만두고 말았다.
글 잘 쓰고 각종 신문에 많은 글을 게재하는 원장님이 자기들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른 학생도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착각은 자유이겠지만, 봉선화 씨앗주머니를 터뜨리듯 속을 내 보일 수도, 꼭 해명해야 할 일도 아니잖은가. 내 진작 밤의 비밀이라도 알아보았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어서 주제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한 우물 밤낮 오로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다그쳤으니 꼭 잘한 일만 같지 않다. 넓고 환한 세상의 물정을 도무지 모르는 우물 속 개구리처럼 나를 잊고 살았는데 내 비록 나이가 들어도 밤꽃의 비밀을 알고부터 나도 어엿한 사내인 줄 알게 되었다.
어쨌거나 은은하고 향긋한 아카시아 꽃향기는 온 산야에 퍼져 마음의 창을 활짝 열게 한다. 동구 밖 아이들이 소 몰고 오는 오솔길 따라 아카시아 꽃잎이 바람에 날리며 지고 나면 오래지 않아 남의 둥지에 알을 밀어 넣은 자식의 안위가 걱정되어 처량하게 우는 뻐꾸기의 애달픈 비밀을 덮으려고 온 산에 비릿하고 텁텁한 냄새를 풍기면서 밤꽃이 일제히 핀다. 밤꽃냄새는 비릿하면서도 꼭 싫지만 않은 어른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냄새로 슬그머니 다가와 뭔가 숨겨야 할 곡절이라도 있는 양 마음의 창문을 확 닫아버리게 한다. 아카시아꽃향기처럼 젊음을 맘껏 누리며 청춘을 만끽하고 구가해야 할 사춘기 젊은이들을 입시지옥으로 몰아놓고 있는 교육제도가 원망스럽고 얄미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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