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백(蛋白)의 스피카(Spica) -上
“오랫만에 오시는군요.“
바텐더는 미소지었다. 능숙한 솜씨로 진이니 보드카니 하는 것 따위를 몇 온스씩 재어 쉐이커에 넣고 흔들며, 그는 한 켠으로 허리가 날씬한 Liqueur Glass를 준비하고 그 속에 스트로 따위를 꽂아 넣었다.
“많이 바쁘셨나 봅니다?“
“그다지요.“
그는 웃었다. 능숙한 바텐더가 일하는 모습은 지켜보기만 해도 재미있다. 그는 한동안 넋을 놓고 쉐이커 속에서 따라진 진홍빛 액체가 한 잔의 발렌시아(Valencia)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냥 정신이 좀 없었다고 할까.“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시겠지요 라고 답하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바텐더는 날렵한 솜씨로 얇게 저민 오렌지를 맵시있게 꽂은 발렌시아를 저 편에 앉아있던 한 여자에게 밀어 건넸다.
“그렇더라도, 물 섞은 칵테일 한 잔 정도 마실 여유는 지니고 사셔야지요.“
바텐더는 싹싹하게 말을 걸어왔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쓴 O. 헨리가 칵테일 얘기도 썼다는 거 알고 계십니까? 거기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오지요. 어느 선원이 몇 가지의 술을 사서는 태평양의 어느 섬에 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큰 돈을 벌었지요. 그런데 어느날 그 섬에 금주령이 떨어진 겁니다. 술을 지니고 있는 자는 큰 벌을 받을 상황이었지요. 이 선원은 가지고 있던 술을 모두 큰 술통 세 개에 쏟아 부어 담고는 그 길로 도망쳤습니다. 후에 그 술통 속에 아무렇게나 섞은 술을 맛보니, 세 개 중에 두 개는 인간이 먹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지만 마지막 하나에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을 내는 칵테일이 담겨 있었답니다.“
그래서요 라고 묻는 대신, 그는 미소를 지으며 바텐더를 바라보았다. 다음 순서로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만들기 위해 드라이 진과 보드카를 따라 재며 그는 말을 이었다.
“선원은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평생을 그 칵테일을 재현해 내는데 바쳤지요. 하지만 급하게 도망치느라 아무렇게나 술을 섞어 넣었기 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얼마만큼이나 섞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더랍니다. 그래도 어떻게, 비슷하게까지는 만들었지만 꼭 그 맛은 나지 않더라는 것이죠.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더 넣어야 그 맛을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그는 어느날 해답을 찾았답니다. 빠진 재료는 바로 한 잔의 물이더라는 것이죠.“
“하하.“
자신의 이야기가 손님의 웃음을 자아내는 것을 지켜보며 바텐더 역시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칵테일 바의 바텐더라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지만, 이 사람 역시도 범상한 사람은 아니었다. 바텐더와 손님이라는 다분히 사무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무언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법도 한 그런 사람. 그는 바텐더가 건네는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받아 들고 한 모금을 마셨다. 입 속에 퍼지는 홍차의 맛이 서늘하다. 홍차라고는 한 방울도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물이라, 그렇군요.“
그는 중얼거렸다. 실제로 물을 타는 칵테일 같은 것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다. 설령 있었다고 하더라도 O. 헨리가 살았던 그 시절과 지금은 조금 부풀리자면 100년 가까이나 차이가 지니까, 그 땐 있었더라도 지금은 없어졌을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그 발상 하나만큼은 퍽이나 재치있지 않나. 그는 짐짓 글라스를 입에 대어 차가운 칵테일 한 잔을 넘겼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작은 것이라.
칵테일을 마신다는 것은 사치중에서도 완벽한 사치라고 그는 늘 생각해 왔다. 그것은 사물이 제 효용을 다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사용되는 것은 무조건 사치라는 그의 상당히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에 기인한 것이었다. 술이라. 술은 취하라고 있는 것이 술이다. 그런데 마셔봐야 취하지도 않고 기분만 애매하게 만들 따름이라니, 그러니 사치인 게다. 이런 가치관은 그의 것이기 이전에 그의 아버지의 가치관이었다. 의절 아닌 의절을 하고 거의 남처럼 살아가는 지금조차도, 그런 아버지의 가치관만은 어쩔 수 없이 남아 그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엘리베이터 앞에 쓰러지다시피 주저앉아 끙끙 앓다시피 신음을 흘리고 있는 이 소녀는 사치가 아닌 그 목적 그대로의 술을 마음껏 향유했음에 틀림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마셨는지 잔뜩 풀려버린 다리를 아무렇게나 내뻗고 엘리베이터 앞에 주저앉아 병든 닭처럼 고개를 처박고는 끙끙대며 앓고 있었다. 입고 있는 것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명문 사립 여학교의 교복이 분명했고, 힘이 풀린 와중에도 그것만은 안 된다는 듯 왼손으로 꼭 붙잡고 있는 책가방의 존재를 보아서도 아직 스물을 넘기지 못한 미성년자임에 틀림없었다. 도대체 교복에 책가방까지 든 이런 아이가 어디서 이렇게나 술을 마실 수 있었는지도 의아스럽거니와 경비가 삼엄하기로 유명한 이 오피스텔 안까지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새삼 의문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구겨지다시피 널부러진 소녀의 앞에 주저앉아 그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역한 술냄새가 확 끼쳐와 순간 머리가 어질할 지경이었다. 눈을 뜰 힘조차 없는 듯 고개를 엉망으로 꺾은 채, 소녀는 연신 무어라 알아듣지 못할 말을 웅얼거리며 피식피식 웃기도 하고 끙끙 앓기도 했다. 주정을 할 단계마저 넘어버릴 만큼 마셔버린 모양인데. 그는 난처한 듯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이 애를 어떻게 해야 옳다는 말인지.
“학생.“
“......“
“이봐요, 학생.“
“......“
“여기서 이렇고 있으면 어떡해? 정신 좀 차려 봐.“
“......“
가볍게 어깨를 잡아 흔들자, 그 움직임에 따라 어깨며 고개가 마구 흔들린다. 그러다가 눈꺼풀이 희미하게 꿈틀거리더니, 힘겹게 눈을 떴다. 몇 번 천천히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낯선 사람의 그림자를 알아 보고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 듯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미간을 한껏 찌푸리더니 고개를 앞으로 꺾었다. 욱. 아차 하고 흠짓 뒤로 물러나기가 무섭게, 몸을 지탱할 힘도 없었던 탓에 소녀는 블라우스의 앞섶에 무언가를 잔뜩 토해내 버리고 말았다. 토사물 특유의 역한 냄새가 확 끼쳐와, 그렇지 않아도 가벼운 술을 마신 속을 확 뒤집어 엎어놓는다.
“......“
그러나 그래놓고도, 역하다는 것을 느낄 의식조차 멀어진 듯 소녀는 다시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흔들거리던 그녀는, 이윽고는 도저히 안되겠던지 아예 등을 기댄 벽에 뒤통수까지를 기대고 온전히 내뻗어 버렸다. 그 꼴이 보면 볼수록 낭패스러워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혀를 찼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얘긴지. 짐짓 짜증이 난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는 체 하고 올라가 버릴까. 저도 모르게 그는 손가락으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저렇게나 취해서 도대체 어떡하려고.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렇게나 술을 마시고 휘청거릴 정도라면 단순히 놀아 보려고 마신 술은 아닌 것 같은데. 하기야 놀면서 술 마시는 사람이 교복에 가방까지 지참할 리는 없지만. 그는 난처한 눈으로 소녀를 내려다 보았다. 어느새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소리없이 문을 열고 사람을 기다렸다.
“......“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결국은 고개를 내저으며 소녀의 손목을 붙잡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소녀를 부축하고 한 발을 엘리베이터 문 사이에 디뎌 문이 닫히는 것을 막으며, 그는 차라리 질질 끌 듯 소녀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어쩔 수 없잖아 라고, 스스로에게 변명 비슷한 말을 중얼거리며.
술에 취한 사람은 제 체중의 서너배는 무겁다. 그의 팔에 질질 끌리다시피 발을 끌며 힘들게 걸음을 옮기는 그 소녀도 그랬다. 게다가 블라우스 앞섶에 묻은 그 오물의 존재만 아니었더라도 어떻게 좀 더 쉽고 편한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었겠지만, 불행히도 그에게는 술에 취해 엘리베이터 앞 복도에 나뒹굴고 있던 이 어린 아가씨를 집 안에 들인 걸로 모자라서 입은 옷마저 버릴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덕분에 그녀를 집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억지로 억지로, 신발도 채 벗기지 못한 채 우선은 뒷덜미를 잡아 질질 끌다시피 소파에 던져 누여놓고 나자 벌써부터 팔 위쪽이 뻐근하게 아려왔다. 그 옆에 주저앉아 담배 한 가치를 붙여물고 몇 번 거친 숨을 고르고 난 후에야 일단 신부터 벗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또래 여학생들이 흔히 신을 법한 단화를 벗겨 현관에 가져다 놓고, 마른 걸레를 가져다 바닥을 문질렀다. 다행히 별다른 것이 묻어나지는 않았다. 신주단지라도 들었는지 좀체로 놓지 않으려던 가방을 빼앗아 소파 곁에 세우고,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블라우스에 묻은 얼마 되지도 않는 토사물에서 나는 코 끝을 거스르는 역한 냄새가 퍼져 집 안 곳곳에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술을 어떻게 마신 것인지 재삼 속이 메슥거려 올 지경이어서, 그는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리고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밀어 열며 짐짓 크게 혀를 찼다.
“......”
소녀는 거의 의식을 잃은 채 소파에 널부러져 있었다. 그런데 또 아예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어서, 끊임없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고 몸을 꿈틀거렸다. 몇 번이나, 제 옷에 무엇이 묻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소파의 등받이 쪽으로 돌아누우려는 태세를 잡는 바람에 그 때마다 그는 기겁을 하고 달려가 그 움직임을 훼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깨를 잡아 누르면 그래도 일말의 의식이 있어 팔을 바둥거리며 뿌리치려 들었다. 새삼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어린 아가씨였다.
밝은 불빛 아래 들여다 본 얼굴은 미운 상은 아니었다. 짤막한 단발에 화장기 없는 얼굴은 이런 모습만 아니라면 퍽이나 그 나이에 어울려 귀여웠을 인상이었다. 그런데 하필 이런 모양새라니. 그는 못마땅함을 이기지 못하고 혀를 찼다. 차라리 가만히 쓰러져 있을 땐 귀찮지는 않더니, 손이 한 번 닿자 그 길로 움찔움찔 몸을 움직이며 가누지도 못하는 몸에 계속 발버둥을 쳐댔다. 그러다가 제 옷에 제가 토해놓은 냄새를 맡기라도 한 건지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며 다시 뭔가를 게워내려고 드는 바람에 그만 빌어먹을 이라고 상소리를 내뱉지 않을 재주가 없었다. 역시 일단 옷은 벗겨야 하는 건가.
“......”
33호
2007.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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