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홍(深紅)의 안타레스(Antares)
“그럴 리가 있겠어요? 전 아버지하고 아주 사이가 좋지 못했어요. 만일에 오빠가 그런 바보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 안에 있는 경찰들이 분명히 저를 살인범으로 체포해 갔을 거에요. 저런 인간 따위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심심찮게 하고 다녔으니까요.“
순간 그녀의 목소리 끝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래서 그랬을 거에요. 분명히. 제가 그렇게 말하니까, 아마 그래서 이런 짓을 해 버렸을 거에요. 틀림없어요.“
툭. 그녀는 손에 들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그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얼굴이 굳어지고 뺨이 붉게 상기되는가 싶더니, 곧 눈 속으로 글썽글썽 눈물이 맺혀든다.
“저 때문이에요. 제가 그렇게 만든 거에요. 제가 오빠를 그렇게 만들었다구요. 다 제 탓이에요.“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변화가 지나치게 극적이어서 그는 잠시 멍해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유롭게 담배를 입에 문 채 자신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사람을 일러 바보라고 빈정거리던 방금 전까지의 그녀와 모든 게 다 자기 때문이라며 울먹이는 지금의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저 같은 것,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게 나았어요. 그랬다면 다 좋았을 거에요. 아버지도, 오빠도, 그러니까, 저 같은 건.“
흐느끼는 사이 사이 한 마디씩 토막토막 이어지지 않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울먹였다. 거짓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버지에게 당했던 그 숱한 폭력마저도 자신의 탓인 양 자책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 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같은 종류의 폭력을 당해 온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세니까. 망각과 적응. 그 두 가지야말로 약자의 무기다. 싸우고 버티어 무언가를 바꾸어낼 자신이 없다면,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리든가 적응해 버려야 한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가슴 속 한 구석에나마 바싹 마른 자존심 한 가닥을 세워놓고 죽어도 굽히지 않으려 하다가는 자기 자신마저 스스로의 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십상이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그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녀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숨기려는 듯 고개도 들지 않고 손수건을 받아 펼치고는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가 본 그녀의 모습은 이런 것이었던가 보다. 그는 씁쓸히 입맛을 다셨다. 여동생이 없다. 그러나 여동생이 있다면, 그것도 이런 여동생이라면. 그리고 이런 아이를 그토록이나 짓밟은 것이 다름 아닌 내 아버지라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어서, 그는 그 일련의 생각들을 떨쳐 버리려는 듯 힘껏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가씨 잘못이 아닙니다.“
“...당연하죠.“
그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미소에 눈이 마주친 순간, 혼백이 얼어붙는 느낌이 났다. 눈이 까맣게 죽어버린 채 입술만을 움직여 짓는 그녀의 미소는 잔뜩 뒤틀려 있었다.
“그건 내 탓이 아니에요. 누가 그런 짓을 하랬다고. 하긴 오빠가 원래 좀 멍청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가 멍해져 있는 사이 그녀는 바닥을 내려다 보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썅. 아까운 담배 한 가치 그냥 버렸잖아.“
“......“
다중인격이라는 말이 떠오른 것은 어째서였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앞서 한 생각은 틀렸다. 이 여자는 망각하지도 적응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결국, 힘없고 나약한 스스로를 떼어내어 조롱하고 멸시함으로서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거다. 해리성 인격 장애(Dissociative ldentity Disorder)라고 하던가.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잊는 게 나을 거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말이 진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그녀는 핸드백을 열어 담배갑을 끄집어냈다. 그러나 그 속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음을 발견한 그녀는 가벼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가느다란 손으로 우악스레 담배갑을 구겨 내던졌다. 팔짱을 끼고 초조한 듯 벽에 기댄 채, 그녀는 짜증이 나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말투로 끊임없이 욕을 섞은 말들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 뺨에는 가느다란 경련마저 일고 있었다.
“자, 여기.“
보다 못해 자신의 담배 한 가치를 건네주었다. 왜 좀 더 빨리 내어주지 않았느냐 원망하기라도 하는 듯, 그녀는 긴 손을 내뻗어 재빨리 담배를 채어갔다. 찰칵찰칵찰칵. 성마르게 라이터를 채근하는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몇 번만에야 담배에 불을 붙인 그녀는 그제서야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돛대를 떨어뜨리다니, 재수없게스리.“
“많이 피십니까?“
“아뇨.“
그녀는 빤히 그를 올려다 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많이 피면 하루에 반갑이에요. 그런데, 안 피고는 못 살아요.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피지 못하면 미쳐버려요. 중독이죠.“
역시나 모두가 자기 탓이라며 울음을 터뜨리던 그 모습이 진짜인가. 많이 피워야 하루에 반갑이라. 어디 가서 담배 피운다는 말을 하기도 차마 민망할 그 정도 밖에는 결국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다는 얘기로군. 그는 눈에 띄지 않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가 얼마나 바보냐면요.“
그녀는 쿡쿡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 집에 그렇게나 오래 살았으면서 아직도 제가 담배 피운다는 걸 몰라요. 제 앞에서는 담배도 피지 않고 말이죠. 정말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니까요.“
그녀는 다 타들어간 담배를 익숙한 솜씨로 탁탁 털어내었다. 그는 홀린 듯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거였을까, 상복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던 그 알 수 없는 관능의 정체는. 그러나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더없이 청순하여 그것이 또한 그를 혼란스럽게 했다. 하나의 몸 안에 여러 인격이 사는 사람의 이야기는 더러 들어본 적은 있었으나 이렇듯 실제로 눈 앞에 보는 것은 또 처음이라, 그는 당혹한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백형께서는, 아가씨를 많이 아끼시던데.“
“아낀다구요? 글쎄요.“
그녀는 피식 웃었다. 가지런히 손톱을 다듬은 손가락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그녀는 아무런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면식도 없는 분에게 제 이야기를 다 할 필요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거 하나만은 말씀드릴게요. 저는 그 아낀다는 말 같은 건 믿지 않아요. 사람이란 건 누구나 다 제 생각만 하면서 사는 걸요.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아낀다는 건, 그건 립 서비스에요.“
그녀는 도전하듯 턱을 앞으로 내밀고 그를 올려다 보았다.
“오빠도 마찬가지죠. 저를 아끼는 사람 같은 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아버지도 그랬듯이. 그는 그런 환청을 들었다. 까만 빛을 내며 자신의 눈에 고정된 그녀의 눈 속에서 그런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상처가 너무 깊다. 그는 탄식했다. 하기야, 나약한 자신을 쪼개어 내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다면. 이런 사람의 곁에 강제로 남아있으려는 것은 옳은 선택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입이 말랐던지 버릇처럼 핸드백 속을 뒤지던 그녀는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아마, 방금 야멸차게 구겨 저 편 구석으로 집어던져 버린 자신의 담배갑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잘 생긴 오빠, 담배 한 가치만 더 줄래요?“
그녀는 애교스럽게 웃었다. 그 속에는 어쩔 수 없는 불량한 끼가 묻어났다. 저런 모습이었다면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원래 아무에게나 그렇게 오빠라고 부릅니까?“
“아뇨.“
그녀는 천연덕스레 큰 눈을 깜박였다.
“오빠랑 아는 사이라면서요? 그러니 오빠죠.“
그게 아니겠지. 그는 웃었다. 답답한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담배가 고팠을 게고, 아무리 무엇한들 면식도 없는 남자 앞에서 또 담배를 빌리기가 머쓱하니 해 보는 소리일 테지.
“어서요.“
이제 아주 스스럼없이 그녀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기까지 했다. 그 당혹스럽기까지 한 솔직함이 그를 당황하게 했다. 달라고 떼를 쓰는 물건이 담배만 아니라면, 퍽이나 귀여웠을지도 모르는 그런 행동이었지만.
“좋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보시다시피 두어가치 정도밖에 안 핀 녀석입니다. 다 드리죠.“
“오빠 멋쟁이.“
그녀가 찡긋 눈웃음을 쳐 보인다. 이것 참. 아까 잠시 본 그 숫기없는 아가씨의 행동이라고는 아무래도 생각이 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골랐다.
“대신에,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뭔데요?“
“안타레스, 가지고 계시죠?“
“......“
순간 그녀의 얼굴이 뜨끔 굳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입가에 띄운 미소를 흐리지 않은 채, 그는 최대한 친절하고 상냥하게 말했다.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 직업이 보석을 만지는 것이라서요. 백형에게서 얼핏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주인을 뵙게 되었으니, 한번 보고 싶을 뿐입니다.“
“......“
그녀는 순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표정이 단지 낯선 사람에게 귀중품을 내어 보이는 것이 내키지 않아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알아차렸다. 그녀는 주저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아요.“
그녀는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잠시 흔들리던 그 얼굴 위로, 오기에 가까운 오만함이 피어올랐다.
“담배 한 갑 값치고는 비싸지만, 까짓 거.“
여느 여자들이 목걸이를 풀 때 흔히 그렇게 하듯이 그녀는 고개를 위로 쳐들더니 두 손을 목 뒤로 가져갔다. 레이스 하나 달리지 않고 매끈하게 재단된 소매가 위로 들리자, 검게 광택이 나는 시폰 소재 밑으로 가슴의 윤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녀의 별 것 아닌 움직임 하나하나에는 이상하게도 남자의 눈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좋은 걸까. 그는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외모와는 상관없이 어딜 가나 남자가 따르게 마련인 그런 종류의 사주라는 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예쁘장하기까지 하단 말이지.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친딸도 아닌 데다가, 오히려 부인이 저지른 불륜의 결과인 이 아가씨가 아버지 슬하에서 온전하게 자라는 것이 더 어려웠겠다는 잔혹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거에요.“
한참만에야 목걸이의 걸음쇠를 풀고, 그녀는 그의 코 앞으로 무언가를 쑥 들이밀었다.
“이게 그 안타레스에요.“
“......“
오히려 그녀의 손길을 피하듯, 그는 가볍게 고개를 뒤로 빼어 조금 뒤편에서 그 루비를 바라보았다. 대번에 적포도주, 장미, 피 따위를 떠올리게 하는 그 빛깔은 무언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붉었다. 연마된 결을 따라 가지런히 맺혀드는 광채는 분명 아름다웠지만 웬지 불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크기는 대강 25캐럿 정도. 명성에 비해 그다지 크다고만은 할 수 없는 크기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 내부에 자리한 여섯 방향의 성채(星彩)였다. 스타 루비(star ruby)였나. 그는 중얼거렸다. 스타 루비라고 하면 색깔이 어둡고 투명도도 떨어지게 마련인데, 저렇게 붉은 빛깔에 성상까지 품고 있다니.
“놀랍군요.“
그는 중얼거렸다.
“이렇게 붉은 스타 루비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만.“
“네?“
“이 것.“
그는 능란한 솜씨로 초선의 손에서 목걸이를 가로채었다. 커다랗게 매달린 펜던트 부분을 손바닥 위에 펼쳐 놓고, 흐릿하게 들여다 보이는 별 무늬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루비 중에서 내부에 이런 결정형이 보이는 것을 특별히 스타 루비라고 부릅니다. 이런 결정이 있는 것들은 대부분 적보라빛이 나거나 투명도가 떨어지게 마련인데, 안타레스는 전혀 그렇지가 않군요.“
“그런가요.“
그녀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좀 비싼 것이라는 얘기는 들었어요. 뭐 그런가보다 했죠.“
“선물 받으신 겁니까?“
“네. 아버지한테서.“
순간 그녀의 얼굴 위로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이 스쳐갔다. 그는 가만히 입을 다물고 그녀를 주시했다. 섣불리 말을 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딸이 아니라.“
그녀의 입술이 지그시 일그러졌다.
“마누라에게 주는 기분으로 산 모양이지만요.“
“......“
모르고 들었다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들은 이상 그 말은 예사로이 들리지 않았다. 초경이 있을 무렵부터였다고 하니 어림잡아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고 있는 자의 손으로 농락당해 왔던 것이다. 화대(花代) 대신이라 생각했던 것일까. 어쩐지 안타레스의 붉은 빛 속으로 묘한 슬픔의 기운이 느껴진다. 순간 첫 경험을 치른 후 흰 시트 위로 배어난 처녀성 파열의 혈흔(血痕)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왜 그가 이 보석을 가져가 달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보석이군요.“
“버릇이에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아버지 때문에요. 늘 그걸 걸고 있어야 했어요. 빼놓을라치면 집안이 뒤집어질만큼 야단이 났었어요. 그러다 보니 오늘도 빼놓는다는 걸 잊고 그냥 나와 버린 거에요.“
“......“
주홍글씨. 그는 착잡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존재 자체가 불륜의 증거이며 이젠 패륜의 희생물이 되어버린 그녀에게, 그는 이런 식으로 그 죄과를 각인해 두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잊고 싶으시겠군요.“
“뭘요?“
“뭐든지 간에, 다.“
“잊는다는 거 따위 믿지 않아요.“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 눈매 위로 어린 표독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그랬어요. 마음이라는 건 보물지도와 같은 거래요. 잊는다고 생각해도 사라지는 건 아니래요. 묻어둔 곳을 잊어버린 것 뿐이죠. 가는 길만 기억해 내어 다시 가 보면 언제고 어느 때고 그 곳에 있는 게 마음이랬어요. 그러니.“
그녀는 고개를 들어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잊는다는 것 따위, 믿지 않아요.“
그렇다고 한다면 얼마나 잔혹한 일일까.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스무살이 넘었을 법한 얼굴 위로는, 자세히 보니 꽤나 많은 근심과 눈물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세상 사는 게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그,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읽은 탓인지 그녀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놀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더없이 나직하게 미소지었다.
“아가씨 잘못이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하셨듯이. 당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당신 책임이 아닙니다.“
“......“
그녀의 눈꺼풀이 순간 마법처럼 굳어졌다. 눈동자 속의 초점이 사라지고 그 상태 그대로 멍하게 질려가는 것을, 그는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던 한 여린 영혼을.
“자.“
그는 날렵하게 한 발 앞으로 걸음을 옮겨 그녀의 멍하게 질린 눈동자에 살짝 입술을 댔다. 순간 움찔 굳어지던 몸의 반응이 꽤나 격렬했던 것은, 그것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일까. 그리고 그 기억들이 하나같이 아프고 힘겨웠기만 하기 때문일까. 순간 싸아하게 마음이 쓰려 왔다. 그는 인형처럼 굳어진 그녀를 그 자리에 둔 채 뒤로 물러섰다. 가만히 주먹 쥔 그의 손바닥 안에서, 루비의 차가운 결정이 그득하게 쥐여져 왔다.
“이제, 잊는 겁니다. 모두 다. 당신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정신병원의 정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꾸밀 필요가 있는 곳이다. 그 곳은 현실 속에 있지만 현실이 아닌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군데군데 파랗게 잎이 돋아난 활엽수를 심고, 빙 둘러친 담에는 빨간 넝쿨장미를 심어 꽃을 올렸다. 군데군데 놓인 조금은 낡은-정말로 오래되어 낡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만든 벤치는 하얀 밀짚모자를 쓰고 긴 스커트에 가디건을 걸쳐입은 소녀가 앉아서 시집을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면 더없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풍경이다. 그리고 그 속에, 사람들이 있다. 꿈을 잃어버린 사람,, 꿈이 지나치게 커져서 그 꿈에 현실이 먹혀버린 사람, 무서운 현실을 피해 꿈 속으로 달아난 사람들이.
32호
2007.1.29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