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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연재소설] time to remember (2)- 박미정

청백(靑白)의 시리우스(sirius)
“완전 배었군.”
고개를 돌려 어깨쯤에 코를 들이대 본다. 짙다 못해 역하기까지 한 오 드 퍼품(eau de perfume)의 냄새가 울컥 치밀어 올라온다. 한가지라면 차라리 낫겠는데, 그다지 궁합이 좋지 못한 서너가지의 향수 냄새가 한꺼번에 뒤섞여 핑하고 머리가 내둘러올 지경이었다. 아아 젠장. 그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연신 물기 덜 가신 손으로 어깨며 자켓 곳곳을 신경질적으로 털어 냈다. 속물의 냄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 또한 크게 다를 것 없다는 자괴감에, 그는 한동안이나 손을 멈추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탕. 그때였다. 제법이나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흠짓 놀라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 소리를 뱉았다. 활짝 열려진 문 밖에 선 것은 여자였다. 순간 외려 자신이 여자 화장실로 잘못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는 재빨리 눈을 돌려 엉망으로 밀어붙여진 화장실의 입구에 붙은 표찰을 확인했다. Men이라는 짧은 글자를 확인한 후에야, 그는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여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듯 심통이 난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오히려 시비라도 걸려는 듯한 기세로 턱을 쳐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 기세가 너무도 당당하여 그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자신이 없는 듯한 눈으로 다시 한 번 화장실 문의 표찰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여기는... 남자 화장실입니다만.”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용감하게 발을 들어 화장실 안으로 한 발을 떼어놓았다. 그 발에 신겨진 구두는 굽이 매우 높아 언뜻 보기에도 7 센치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는데, 웬지 위태하다 생각이 드는 순간 그녀는 고스란히 발을 삐끗하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이... 이것 보세요.”
연회장에 오는 여자들-그것도 젊은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녀의 옷차림 또한 어깨가 다 드러난 이브닝 드레스 차림이었고, 덕분에 바닥에 주저앉은 모양을 보고서도 어디를 어떻게 잡아 일으켜야 할지 잠시 막막하여 그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무릎을 숙인 채 그녀를 들여다 보았다. 어깨가 가늘게 들썩이고 신음소리에 가까운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격하게 느껴지는 것은 짙은 와인의 향. 이 여자 취했나. 그는 표가 나게 미간을 찌푸렸다. 당혹이 가라앉고 점차 냉정을 찾은 그의 눈은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자, 일어서 봐요.”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참입니까? 여긴 남자 화장...”
“...치워.”
여자가 격렬하게 중얼거렸다. 때아닌 반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속에 스며든 적의. 그는 흠짓 놀라 여자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역시나, 이 곳에서 이런 그림을 보이고 있었다가는 무슨 오해를 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그는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다.
“자, 아가씨?”
그러나 그녀는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상처입은 짐승과 같은 눈을 허공을 향해 치뜬 채 한참동안이나 그를 올려다 보던 그녀는, 제법 휙 소리가 날만큼 거칠게 그의 손을 밀쳐내었다.
“치우란 말이야 씨발...!”
그녀는 으르렁거렸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그 입술에서 튀어나온 욕설 때문이 아니라 목청이 찢어지는 듯 갑자기 높아지는 그 목소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탁 쳐낸 손이 빗맞아, 아주 뿌리쳐지지는 않고 어설픈 각도로 돌아가다가 짐짓 그렇게 허공에 얼어 있었다. 거칠어진 숨소리를 씨근거리며, 그녀는 잔뜩 날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뭘 봐? 씹...”
다시 한 번 짤막한 욕설을 뱉아내며, 그녀는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입술을 쓰윽 문질렀다. 예사롭지 않은 빛깔의 립스틱이 적나라하게 흰 뺨 쪽으로 밀려나며 마치 멍이라도 든 듯한 자국을 남긴다. 도대체 무엇에 그렇게나 화가 난 것인지, 물기 젖은 바닥에 퍼지고 주저앉아 흰 새틴 드레스 자락이 널부러져 군데군데 구정물 자국이 남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그녀는 어깨를 들먹거리며 적의에 찬 눈으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쏘아보았다.
“...이것 참.”
적반하장도 이만저만이지. 남자가 남자 화장실에서 손이나 씻으려고 했던 게 저런 쌍소리나 들어야 할 만큼 잘못한 일이란 말인가. 차분하던 눈매 끝으로 짜증이 배어났다.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술에 취한 여자를 제정신으로 상대해 이길 수 있는 남자가 있을까. 그것도 저런 식으로 술에 취한 여자를. 괜히 여기서 말을 보탰다가는 이상한 오해에 휘말려들기 십상이라는 생각에 그는 움찔했다.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려 들려고 온 것은 아니란 말이지.
“실례했습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그는 바닥에 퍼져 앉은 여자를 피해 걸음을 옮겼다. 나이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 이런 자리에서 술에 취해 남자 화장실에 엎어져 있는 모습 따위가 소문나서 저 아가씨의 앞날에 좋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까 그 마님들같은 할 일 없는 남의 집 아주머니들의 잡담거리로나 쓰이기가 십상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만하면 나도 할 만큼 했다. 그 와중에 생각지도 않은 욕도 두어마디 얻어먹었고 말이지. 그거면 충분하지 않은가. 더 이상 면식도 없는 여자의 화풀이 상대가 되긴 싫었다.
“...야.”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이 쪽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옮기던 걸음이 무엇엔가 걸린 듯 묵직해졌다. 흠짓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제법이나 힘이 들어간 여자의 손이 바지 단 쪽을 눅진하게 부여잡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어지간히나 술에 취한 듯, 그 움직임은 척 보기에도 전혀 두서가 없었다.
“어디 가?”
“이것 봐요.”
“왜? 튈려고?”
헤헤헤. 아까의 그 독기는 다 어디로 갔는지 그녀는 느닷없이 헤실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 갈수록 태산이라는 느낌이 들어 그는 난처한 미소를 띄우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느 집 영양(令孃)이신지, 이런 자리에 저런 차림을 하고 나선 것을 보면 여염집 아가씨는 아닌 것 같은데.
“...아가씨?”
도리없다.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그는 가만히 손을 대어 바지 단을 잡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떼어내었다. 툭 소리가 나고 그 손이 까만 타일을 바른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돌아서서 그 자리에 웅크려 앉아 이미 반 이상 풀려버린 그녀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못 써요.”
“......”
그녀의 얼굴에 새초롬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언가 삐지기라도 한 듯 움찔움찔 입을 삐죽거리며 무어라 말을 하려는 듯 우물거렸지만, 일단 저 스스로부터가 정리가 안 되는 듯 선뜻 입을 열어 무어라 말을 하지는 못한다. 하얗게 분을 바르고 제법 솜씨있게 눈썹이며 아이라인을 손대어 그린 그 얼굴은 이미 엉망으로 번져나간 립스틱만 아니라면 제법이나 여러 사내들의 시선을 끌었을 미인 형이다.
“자,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일어나 보라는 말을 하려는 듯 바닥에 주저앉은 몸을 간신히 지탱한 팔을 가볍게 툭툭 쳤다. 그러나 문득 바닥을 짚은 손에 눈이 갔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 아니 정확히는, 그 중앙에 박힌 작고 파란 보석의 알갱이에 눈이 갔다. 화장실의 형광등빛을 받아 어지럽게 난반사하는 푸른 광채. 함부로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
잠시, 그는 눈 앞에 쓰러진 여자의 존재를 잊어 버렸다. 뭘까. 신기한 빛깔이다. 푸른 빛깔을 내는 보석은 많지만, 저런 광채를 내는 것이 있던가. 얼핏 보기엔 사파이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푸르긴 하다. 아쿠아마린(aquamarine)이라고 하기에는 그 색이 너무 짙고 블루 토파즈(blue topaz)라고 하기에는 클래리티(clarity)가 지나치게 높아 반사율이 상당하다. 게다가 저 커팅 방법은.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브릴리언트 컷(brilliant cut)을 저토록이나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보석이라면 세상에 한 종류 뿐이다. 다이아몬드. 그런데, 저토록 푸른 색깔이라고? 그는 새삼 놀라, 어지러운 듯 고개를 떨군 채 낮은 신음소리를 흘리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
호오. 그는 노골적인 호기심이 담긴 눈으로 여자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의심할 여지없는 다이아몬드다. 그런데도 저 정도의 컬러라니. 역시, 보통 아가씨는 아닌 모양이군. 잠시, 지금이 이 아름다운 물건에 손을 대어도 될 순간인가를 판단하기 위해 그는 섬려한 눈썹을 가볍게 찌푸렸다. 아니, 아직은 아니다. 취생몽사(醉生夢死)중인 이 아가씨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래저래 지금은 때가 좋지 못하다. 혼자 온 것이 아니라면 필경 일행 중의 누군가가 이 아가씨를 찾으러 나올 테고, 그래서 저 반지가 없어진 걸 눈치라도 챈다면. 휘익. 그는 어깨를 움츠리며 가벼운 휘파람을 불었다. 몸이 달아오를 만큼 탐나는 녀석이긴 하지만, 저것 하나와 내 인생을 바꾼대서야 곤란하지 않겠나.
“......”
아닌 게 아니라, 저 편 연회장 쪽에서부터 누군가의 발 소리가 들렸다. 이리로 오는 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뚜벅 걸어오는 발소리는 짐짓 그를 긴장하게 했다. 순간 그 발소리의 주인이 웬지 눈 앞의 이 여자와 무언가 상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쓸데없는 오해를 사서 좋을 것은 없다. 더더구나, 제법 괜찮은 것을 발견한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유난히 또박또박 울려오던 발소리가 눈에 띄게 가까워져 왔다. 그리고 방금의 그 서슬에 활짝 열어 젖혀진 남자 화장실 앞 출구 앞에서 정확히 멎었다.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 하나가, 휘황한 불빛 아래 이 편으로 확 끼쳐져 들어왔다.


그림 - 이은경

25호 (2006.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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