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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연재소설] Time to Remember (1) - 박미정

Prologue: 어머니

어머니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었다. 유달리 검은 옷을 즐겨 입던 어머니는 퍽이나 여윈 분이셨고, 덕분에 그다지 크지 않은 키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키가 큰 듯 보였었다. 목 위 턱 아래까지 올라오는 차이나식 칼라에 손목을 지나 손등을 덮은 가느다란 소매가 달린 공단 블라우스와 프릴이니 레이스니 하는 것 한 줄 달리지 않아 실루엣이 똑 떨어지는 긴 롱 스커트를 즐겨 입으셨다. 표백이라도 된 듯 흰 얼굴을 그런 검정 일색인 옷 사이로 파묻은 채, 어머니는 기쁨도 슬픔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린 듯한 눈으로 언제나 거기 그렇게 앉아 계셨다.
오르골. 그리고 그런 어머니의 앞에는 오르골 상자가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 일색을 한 어머니와는 달리, 하얀 칠이 되어 있고 군데군데 금박 장식이 되어 있던 그 오르골 상자는 언제나 어머니가 앉아 있던 화장대 위 손닿는 곳에 그린 듯이 놓여 있었다. 길고 여윈 손을 움직여 어머니가 뚜껑을 열면, 그 속에서는 언제나처럼 똑같은 처량하면서도 맑은 음색이 흘러나와 어린 귓전에 가득히 고여 왔다. 제목도 모르면서 버릇처럼 흥얼거리던 그 멜로디가 ‘사랑의 기쁨(Plaisir dꡑamour)’이라는 것을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였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랑의 기쁨이라는 것은 오로지 제목일 뿐, 실은 사랑이 떠나간 비탄을 노래한 곡이라는 것을 안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였다.
그 오르골 상자 속에는 반지가 들어있었다. 목걸이도 팔찌도 귀걸이도 아닌 오로지 반지만이. 그 속에 든 반지들은 모두가 본(本)이 매끈했고 커다랗고 색깔이 고운 보석이 박혀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는 꺼내 보기도 힘든 다이아몬드도 있었고, 짙푸른 빛깔이 한 여름 바다같은 사파이어도 있었다. 태양같은 루비도, 눈물방울같은 진주도 있었다. 그 속에 담긴 반지들의 빛깔과 광채는 여자가 아닌 나조차 매혹시키곤 했었다. 제법 나이를 먹어, 바깥에서는 여자아이들의 치마를 들추고 멀찌감치 달아나는 장난을 치며 친구들과 낄낄거리던 국민학교 3학년 남짓 무렵까지도, 나는 어머니의 눈을 피해 까치발을 하고 화장대 위를 더듬어 오르골 상자를 열고는, 그 속에 담긴 반지들을 꺼내 놓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던 것이다. 예쁘다. 그저 그 생각 뿐이었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예쁜 물건들도 있구나. 역시나 사내애여서일까. 껴보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다만 그 빛깔과 광채와 모양들이 내 어린 눈을 매혹했던 것이다.
생각건대 어머니가 특별히 그 오르골 상자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실제로 몰래 상자를 열고 그 속에 든 반지들을 구경하다가 소리없이 등 뒤로 다가선 어머니의 긴 그림자에 흠짓 놀라 뚜껑을 닫고 얼굴을 붉힌 적이 몇 번 있었지만, 어머니는 결코 그런 일로 나를 꾸짖으신 일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웬일인지, 그 상자는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는 물건인 양 여겨졌었다. 그 속에 든 것들이 어린 내가 보기에도 퍽이나 귀해 보였던 탓이기도 했지만, 가는 허리를 곧게 펴고 화장대 의자에 앉아 아무런 표정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오르골 상자를 열어 그 속에 담겨진 반지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던 어머니의 표정은 가끔은 섬짓할 만큼 무표정했던 탓이었다.
가끔 새 식구가 늘어나 있을 때가 있었다. 사업상 일로 오래 집을 비우시던 아버지가 돌아와 며칠간 계시다가 다시 나가시고 나면, 어김없이 오르골 상자 속에는 못 보던 녀석 하나가 들어와 있게 마련이었다. 새로 생긴 반지는 대부분의 경우 전에 있던 것들보다 더 큰 보석이 박힌 더 비싸 보이는 것들이었고 나는 또 며칠 동안 그 새로운 장난감에 정신이 팔린 채 몰래몰래 어머니의 방으로 숨어들곤 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어쩐 일인지, 어머니는 단 한번도 그 숱한 반지들을 끼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의 왼손 약지에 걸린 것이라곤 오래되어 이제 광택마저 낡아버린 가느다란 금 실반지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유달리 검은 옷을 즐겨 입던 어머니의 전신에서 단 하나 제 색깔을 지닌 물건이기도 했다. 왜 저렇게나 크고 아름다운 것들을 두고 저런 후줄근한 반지만을 끼고 다니는 것인지 때로는 견딜 수 없이 궁금했지만, 언제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면 묻지 못하고 말았다. 더러는 잊었고, 더러는 내키지 않았고, 더러는 무서워서. 무엇이 무서운 것인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청백(靑白)의 시리우스(sirius)

지루하다. 그 원천적인 감성까지 어찌할 수는 없다. 어깨가 비좁을 정도로 사람이 북적대는 이 속에서는 따지고 보면 제법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선은 그것이 친절하게도 눈 앞 잘 보이는 곳에서 일어나 주지는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가물어 물이 줄어버린 웅덩이 같은 이 곳을 날쌔게 헤치고 다니며 그런 가십 거리들을 찾아낼 만큼의 기력이 지금의 자신에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 새삼 실망하며 그는 짐짓 어깨를 으쓱 들어올리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루한 것을 견디지 못해 시작한 일 때문에 이런 지루함을 겪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퍽이나 재미있는 아이러니가 아닌가.
쟁반을 받혀든 채 종종 걸음으로 곁을 지나치는 웨이터를 불러세우고 목이 긴 칵테일 글라스 하나를 집는다. 눈이 아프도록 휘황한 불빛 아래 잔 속의 푸른 액체가 새파랗게 빛난다. 아아, 어디 이만한 놈 하나 없을까. 그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가만히 잔을 입술에 대었다. 빛깔은 썩 그럴 듯 하더니 맛은 빛깔을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가끔, 망령이 든 눈이 다른 오감(五感)중 사감(四感)을 속이는 일도 없는 건 아니니까. 요컨대, 빛깔 하나만으로도 참아줄 만 하다 라고 생각하며 그는 뜻없이 잔 속에 든 액체를 빙글빙글 돌렸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진 자리부터 반 조금 못 미치게 담긴 블루 마가리타(Blue Margarita)가 그 손길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군데군데 푸른 얼룩을 남겨 놓고 있었다.
“...라면서요?”
“글쎄, 그렇다더군요 바깥양반의 말로는...”
“처녀 아이의 행실이 그래서야 원. 도대체 요즘 젊은 아이들이란...”
저편 옆쪽, 몸만 잘못 돌렸다가는 뺨에 입술자국이라도 날 것 같은 거리에서는 나이 지긋한 두 부인이 한담에 열중이다. 부인들의 수다란 머리가 아프다. 그네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패턴은 세 가지 정도다. 제 자랑이거나,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아니면 둘이서 함께 제 3자를 헐뜯고 있거나. 이 옆의 부인들께서는 아무래도 세 번째 경우인 모양이지만. 지금 도마위에 올려놓여진 그 ‘젊은 처녀 아이’의 죄목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뻔하다.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 띄었거나, 지나치게 공부를 많이 한 탓에 빨리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한다거나, 혹은 장래를 약속한 사이라고 온 세상에 소문난 사람과 결혼하지 못했거나. 절반은 어이가 없고 절반은 우습기도 해서 잠시 바라보고 있었는데, 둘 중 한 사람이 그 시선을 느낀 것인지 퍽이나 우아하게 눈썹을 치켜뜨고 뭐 할 말이라도 있느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아, 실례했습니다. 두 분, 연배에 비해 너무 고우셔서 라고 말하기라도 하는 양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고 공손한 태도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자 그제서야 그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번진다. 어느 댁 영식(令息)이신지 예의도 바르셔라 라고 감탄이라도 하는 듯한 눈길이 머리부터 발 끝까지를 한 번 훑고 지나간다. 아무리 그네들의 목소리가 귀에 질리더라도, 다시는 그 편을 바라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는 누군가의 약혼식이었던 것 같다. 남의 약혼식에 와서 정작 주인공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한 구석에 틀어박혀 칵테일이나 홀짝대고 있다니. 그러나 본래 이런 자리란 늘 그랬다. 다른 이름을 걸어 놓고, 그 명목을 빌어 자리에 모여 즐기는 것은 다른 이들이다. 새삼 숨이 막혀 그는 고개를 빼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깨를 드러낸 드레스 차림의 여자들, 숨이 막히도록 턱까지 단추를 채우고 넥타이를 맨 남자들. 이 약혼식장 어딘가에 사제 폭탄이라도 하나 묻혀있다면 이 나라의 귀족들 중 절반이 넘는 수가 사라질 텐데. 그 황건단(黃巾團)이라든가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기회를 왜 사용하지 않는 것일까. 푸른 칵테일 한 잔을 입 속에 머금은 채 그는 조금은 냉소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하긴, 그런 이들에겐 쉽지 않을까. 이 곳에 접근하는 것 자체도.



연신 입 속을 비집고 나오려는 하품을 참는 것만도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긴 눈초리 끝으로 희미하게 눈물이 맺히고 그러다 못해 지그시 머리가 아파오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밖에 나가 찬 바람이라도 맞고 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한참 전에 비우고도 미련이라도 남은 듯 만지작대고 있던 칵테일 글라스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아 버린 후, 그는 연신 실례한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좌우로 날렵히 어깨를 돌려 가며 약혼식장을 빠져 나와 화장실로 갔다.
쏴아아. 거칠게 수도꼭지를 틀고 재킷의 소매를 대충 걷어붙인 후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손을 담갔다. 더러운 것을 만지지도 않았고 딱히 덥거나 땀이 난 것도 아니었지만, 웬지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비누를 집어 한참을 문질러 거품을 내기까지 했다. 문지르고 문지르고 또 문질러 거품의 입자가 새하얗게 부서져 나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수도꼭지 아래 손을 대었다. 밑으로 떨려져 나가는 비누 거품의 느낌이 부드럽다.


24호 (2006.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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