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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안개에 묻혀 - 우희정

진종일 안개와 더불어 보낸 하루였다.

어제 오후 나절 나는 황톳물 굽이치는 길을 갔었다. 폭우 속에 길을 나서니 모든 게 그저 희뿌윰 하였다. 비가 걷히면 피서객들이 도로를 점령할 터, 내게는 도리어 오붓한 기회라 생각했다.

골안개 낀 길을 마냥 달렸다. 굵은 빗방울이 함초롬히 연우(煙雨)로 바뀌더니 이내 안개 띠를 두른 산이 길동무를 하자고 했다. 머리에 흰 수건을 질근 동인 산, 허리에 띠를 두른 뫼도 덩달아 쭐밋거리며 나를 따라 나섰다.

바로 어제는 다름 아닌 40대의 끝자락에서 맞은 내 생일이었다. 좀은 스스로에게 호강을 시켜줘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었고 어디 가서 산뜻한 저녁을 먹고 느긋하게 물소리나 들었으면 싶었다. 그런데 생각지 않은 횡재가 따랐다. 골짝마다에서 피어 오른 남기(嵐氣)가 아주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이상향의 나라로 나는 들어서는 듯했으니 말이다. 그리고는 늦도록 까지 안개와 벗하다 잠에 들었던 것이다. 이른 새벽에 깨어났으나 여전히 꿈결인 듯 나는 몽롱하였다.

오리숲 긴 터널을 걸었다. 몇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꽉 차게 내려앉은 안개에 부영하듯 내 몸도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폭신한 감촉의 흙길은 꼬박꼬박 발자국을 뗄 만큼씩만 길을 내주었다. 잘디잔 야생화들이 군데군데 피어 몽환적인 기분을 부추겼다.

한참 동안 현실감 없이 걷다가 우뚝 몸을 일으켜 세우는 일주문과 마주쳤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먼데 풍경도 서서히 깊은 잠에서 깨어난 양 몸을 드러내었다.

안개는 여러 얼굴을 가졌다. 때로는 그지없이 신비하여 몽환적이기까지 하지만 의외의 길에서 맞닥뜨리면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것은 가늠할 수 없는 불투명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어둑새벽, 급한 볼일로 의정부를 지나 양주로 가던 길에 만난 안개는 적잖이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코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가 발목을 마냥 낚아채는 듯했다. 그 어름이 낭떠러지임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더욱 모골이 송연하였다. 밝은 대낮에도 굽잇길에 널브러져 있던 자동차를 가끔 목격한 터라 더 무서웠던 것 같다. 지나는 차라도 있으면 길잡이를 삼을 수 있었으련만 아무리 첫새벽이라고는 해도 어찌 그리 적막하던지.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 오래도록 차 속에 갇혀 있으면서 그 즈음 내 삶의 여정과 몹시도 흡사하여 퍽 우울했던 기억이다. 그날의 안개는 불확실이었고 한량없는 장애의 길이었다.
반면에 가슴 애잔한 안개도 있다.

해무 짙은 어느 날의 뱃고동소리를 나는 영영 잊지 못한다. 안개가 몰려와서 온통 바다도, 세상도 다 지워버린 날이었다. 나는 막막히 방파제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어디에선가 무적(霧笛)소리가 들렸다.

부우~ 부우….

길을 잃은 배가 먼 바다의 어디쯤에서 슬피 울었다.

심금을 울리듯 애달피 토해내는 소리가 해미와 어우러져 애련지정을 불러일으켜 가슴께가 서늘하였다. 그 소리야말로 내가 서 있는 곳이 난바다의 한군데라 사방을 알 수 없는 오리무중임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했다.

부우~ 부우….
‘너는 어디에 있느냐.’
육지에서도 안타까운 소리가 퍼져나갔다.
부우 부우….
‘내가 여기 있다.’

한참만에 안개 속에서 돌연히 몸체를 드러내던 배가 방금 본 일주문과 흡사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길을 잃은 나를 향해 울려줄 등대가 있다면, 굽도 젖도 할 수 없는 곳에 서서 간절한 심정으로 소리칠 때 그날의 무적처럼 응답해 줄 그가 있다면 가끔은 안개에 묻혀도 좋을 것 같다.


48호
2008.6.25

우희정
월간문학 편집위원, 도서출판 소소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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