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신문
 

 

 
 

 

    홈 / 문화 / 문학

subject [연재소설] time to remember (13) - 박미정


단백(蛋白)의 스피카(Spica) -上

“어린 여자애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화장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길 학수고대하지만, 정작 어른이 된 여자들은 화장 따위 하지 않고 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지. 왜 그럴까? 어른에게 화장이란 건 그냥 일상일 뿐이기 때문이야. 그건 마법소녀의 마술봉같은 변신 도구도 아니고 아프로디테 여신의 케스토스(Kestos)도 아니지. 그냥 얼굴 위에 덧쓰는 가면일 따름이니까. 어른이 된다는 건 그런 거지. 마찬가지로.”
그는 언제나처럼 미소를 지으며, 그러나 실은 상당히 냉막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속옷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섹시해 보이기 위해 속옷을 생략하고 다니는 여자들은 영화나 소설에서만큼 그리 흔치는 않거든. 그런 걸 어설프게 흉내낸다고 해서 어른으로 보이지는 않아. 다리를 꼬고 앉는다고 해서 섹시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달콤한 코코아를 싫어하고 맥주를 찾는다고 해서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도 아니야. 한 사람이 어른이냐 아니냐는 그런 유치한 것들로 판가름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스무살 생일이 지났느냐 아니냐로 어른과 아이가 갈리는 것이 웃기다는 아가씨의 말처럼 말이지.”
그 목소리는 유유했고 동시에 나직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말이 무색하게도 마주 앉아 그 말을 듣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순식간에 핼쓱하게 질리다 못해 창백해졌다. 방금 전까지도 기세 좋게 목청을 높이던 그 입술이 힘없이 다물어지고 검은 눈동자에서는 순식간에 총기가 빠져나가 멍하게 질렸다. 그 길지 않은 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가진 모든 생기를 다 빼앗긴 것 같았다.
“......”
소녀는 천천히 찻잔을 잡았던 손을 무릎 앞으로 거두어 모았다. 그는 조금은 안스러운 듯한 눈으로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너무 아픈 말을 한 건가?”
“......”
소녀는 빨리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천천히 고개가 내저어졌다. 아주 천천히.
“...아니에요. 어차피.”
그녀는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한참만에야, 차마 못할 말을 뱉어내 버리기라도 하듯 짤막하게 말을 이었다.
“다 사실인 걸요 뭘.”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크지 않은 어깨가 순식간에 버틸 힘을 잃고 아래로 하염없이 늘어졌다.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그녀의 그 한 마디는 자그마한 파장을 몰고 왔다. 말을 던져낸 직후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공기를 감당하기가 힘들었음인지, 그녀는 자그마한 입술을 몇 번 잘근잘근 깨물다가 이윽고는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런 그녀에게는 더 이상의 어떤 힐책도 비난도 마땅하지 않을 것 같아, 그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웃기죠?”
소녀는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무릎 위에서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웃기고, 바보 같죠? 그럴 거에요.”
“그런 말 한 적은 없는데.”
“구라 치지 말아요.”
소녀는 볼멘 소리로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기운이 없었다.
“이거 어쩔 수 없는 어린애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뭘.”
”아니라니까.“
그는 미소지었다.
“오히려, 아까 어설프게 핏대 올리며 대들 때보다 훨씬 어른스럽다고 생각중인데?”
그제서야 소녀는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검고 둥근 눈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긍정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른이란 건 떼를 쓰지 않는 거다. 떼를 쓴다는 건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고 투정을 부리는 것만을 말하는 건 아니야. 사실과 다른 것을 무조건 우겨대는 것도 떼를 쓰는 거라고 할 수 있는 거고. 아까 네가 한 말들은 떼쓰는 거였어. 지금은, 아니지.”
“......”
소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이나마 그 눈동자 속의 흔들림이 가라앉고 차분함을 되찾고 있었다. 좋은 징조다. 그는 한동안 그런 그녀의 모아쥔 손 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어봐도 될까? 왜 그렇게나 어른이 되고 싶은 건지.”
“......”
소녀의 뺨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었다. 말하지 않겠다고 강하게 입을 다문 품세는 아니었지만, 역시나 그 혼자의 힘만으로 말을 꺼내기엔 아무래도 힘에 부쳐 보였다. 자존심이라. 그는 말없이 눈을 깜박이며 앉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자존심일 수도 있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는 그런 건. 때로, 저 나이 때의 자존심이란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그 무엇이니까. 이 편에서 먼저 어느 정도 눈치채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고백과 인정은, 실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른 것이니까.
“맞춰볼까?”
“......”
“혹시.”
그는 조심스레 소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른을 사랑하고 있어?”
“......”
소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리고 그의 얼굴도 따라서 굳어졌다. 일단은, 지금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건 결코 지금의 상황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게다가 어쩌면 그것은, 원조교제 등의 파괴적인 형태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이 아이의 행색으로 보아 돈 한푼을 위해 그런 짓을 할 아이는 아닌 것 같긴 했지만, 사람이 그릇된 사랑의 저주 속으로 몸을 던지는 건 꼭 돈 때문만은 아닌 경우도 많으니까. 특히 저 나이 때라면.
“그 사람이.”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네가 아직 어려서 안 되겠다고 한 건가?”
“...대놓고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어요.”
소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말도 못 꺼내 봤으니까요.”
“그런데?”
“그냥, 내 생각이에요. 어리니까 안 된다고 할 거라는 거.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내 나이만 보고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거라는 거.”
소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홱 고개를 들었다.
“내가 불만인 건요, 그래요.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시킨다고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제가 아무리 그 사람 좋아해도 그 사람도 저 좋아하라는 법 없는 거구요. 그런데 그 이유가, 다른 게 아니고 단지 내 나이라는 거, 난 그게 미치도록 싫어요. 단지 내가 어리다구, 날 사랑할 수도 있다는 생각 한 번 해 봐 주지 않는 그런 거 있잖아요. 난 그게 억울해요. 나도 사람이고, 나도 여잔데. 아직 스무살 안 지났다는 그 이유만 가지고 난 여자 취급도 받지 못해요. 난 그게 억울하다구요.”
소녀는 격렬하게 거기까지를 내뱉듯이 말해버린 후 입을 다물었다. 그 기세가 짐짓 사납기까지 해서, 그는 잠시 망연히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진정하라는 듯 손을 내저어 보이며 천천히 물었다.
“글쎄, 말이나 한 번 해 본 거라면 몰라도 전적으로 아가씨 생각이라면 그건 또 모르는 거 아닐까?”
“아니에요.”
그녀는 고집스레 내뱉었다.
“갓난쟁이 애기도 저 이뻐하는 사람은 알아본대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절 이뻐는 해요. 굉장히 이뻐해요. 그런데 그 뿐이에요. 그 이상은 아무 것도 없다고요. 그래서 화가 나는 거에요.”
“친한 사람인가보지?”
그가 물었다. 저 나이때 흔히 있는 일로, 말 한마디 해 보지 않고 얼굴만 아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혼자 앓는 경우도 있으니까. 매일 아침 같은 시간 버스 안에서 마주친다거나 하교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늘 같은 곳을 지난다거나 하는 그런 사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인지 소녀는 난처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말을 하지 않기엔 이미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린 것을 깨달은 듯, 가볍게 미간을 찌푸리며 무어라 투덜거렸다. 그리고는 이윽고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요. 절대 안 웃는다고.”
“안 웃어. 약속.”
“진짜?”
“진짜.”
그는 진지하다 못해 엄숙하게 말했다. 그런 그의 표정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제서야 영 내키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소녀는 퍼뜩 대답을 하지 못하고 미적거렸다. 뺨이 상기되는가 싶더니 목덜미까지 붉게 홍조가 올랐다.
“우리 학교 선생님이에요.”



그는 올해 처음 이 학교에 부임했다. 그의 자리는 교무실에서도 가장 구석이었다. 수업이나 기타 용무가 있어 그를 찾아 교무실에 온 사람은 누구나 이사장의 동서뻘 된다는 교감의 앞을 지나고 뾰족한 턱이 야비해 보이는 교무주임의 앞을 지나고 돌아앉은 덩치가 다 자란 곰만큼이나 커다란 학생주임의 앞을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곳에 그의 자리가 있다. 그의 자리에서 몇 발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는 집채만큼 커다란 냉난방 겸용 송풍기가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여름이면 쏟아져 들어오는 찬바람에 저절로 콧물이 날 지경이고 겨울이면 셔츠 소매를 팔뚝 중간까지 걷어붙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후끈하다. 때문에 사시사철 감기를 달고 살지 않을 수 없는 곳이라 목을 많이 쓰는 교사들은 누구도 그 자리에 앉지 않으려 한다. 그 곳에 그의 자리가 있다. 어째서 이 자리가 그의 몫으로 배정된 건지는, 전근 온 지 얼마 안 된 탓에 근무년수가 높은 동료 교사들에게 밀려난 건지, 아니면 스스로 그 곳에 앉겠다고 지원이라도 한 건지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자리는 늘 너저분했다. 결코 작지 않은 책상 위로 놓인 세 개의 책꽂이에는 두께가 제각각인 책들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그런데 그 꽂혀 있는 책들의 분야가 앨빈 토플러의 ‘권력 이동’에서부터 노자의 도덕경에 이르기까지 워낙 두서가 없어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가르치는 교사인지를 의아하게 하는 것이다. 책꽂이 앞으로는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서류철이 한가득 재여 있었다. 그 속엔 수업 내용안이라든지 그가 책임을 맡고 있는 몇몇 과제의 보고서 등 저렇게 팽개쳐 두어도 괜찮은가 싶은 서류들도 몇 개 보였지만 정작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 그렇게 널려 있다. 마치 거기가 제 자리이기라도 한 양. 서류철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책상 위에는 제 자리에 붙어있는 물건을 찾기가 힘들었다. 필기구니 교편(敎鞭)이니 학생들이 제출한 과제물이니 등등이 키를 넘도록 쌓여 있어 앉아있는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유독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조그마한 사진 액자였다. 그 속에는 어떤 여자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드러난 미인은 아니지만 활짝 웃는 얼굴이 예쁜 그녀의 사진은 이 어수선한 책상 한 귀퉁이에 마치 배의 중심을 잡는 닻처럼 고정되어 있었다.
그 자리의 주인인 그는 30대 초반의 키가 큰 남자였다. 사실 그의 키는 그다지 큰 키라고는 볼 수 없었고 보통의 중키를 2, 3 센티미터 넘는데 그치는 정도였지만, 워낙에 살집이 없이 마른 탓에 실제보다 한 뼘 정도는 커 보였다. 어깨며 허리를 조금쯤 앞으로 숙인 구부정한 자세 탓에, 그 느낌이 더욱 강조되어 보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지독하게 눈이 나빴다. 아마 잘 때를 빼놓고는 안경을 벗어내는 법이 없을 것이다. 덥수룩하게 늘어진 앞머리 밑으로 보이는 커다란 검은 사각 뿔테 안경과 가는 세로 줄무늬가 들어간 짙은 회색 양복은 그의 답답한 첫인상을 더욱 강조해 보이고 있었다. 이러한 주위 환경과 각종 오브제들 덕분에, 그는 서른 한 살이라는 본인 스스로의 나이보다 대여섯살은 많아 보였다.
그는 아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는 말수가 적은 수줍은 사람이었다. 특별히 동료 교사들이 그를 따돌린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그를 인정해서라기보다는 그에게서 따돌릴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한 탓일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주제가 무엇이든,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의 말을 경청했다. 예. 그럼요. 저런. 사는 게 다 그렇지요. 그것이 그가 하는 대꾸의 전부였다. 덕분에 사립학원 재단에 흔히 있게 마련인 특정 파벌 간의 알력 속에서도 그는 표연히 중심을 지킬 수 있었다. 아무도 그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지도 않았고, 아무도 그가 상대 파벌로 들어가는 것을 개의치도 않았기에.



“후아...“
상향은 교무실 청소 당번이었다. 오른쪽 귀퉁이에 놓여있던 필통의 위치가 반 뼘만 틀려져도 얼굴부터 붉히며 댁댁거리는 까탈스러운 여선생들의 책상을 피해 달아난 것까지는 좋았는데, 도대체 이 선생의 책상은 어떻게 치워야 좋을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책상 위에 널려 있는 서류철과 온갖 잡동사니들을 바라보며 손에 걸레를 든 채 망연히 서 있었다.
“이거, 어떻게 치우냐 도대체...“
아휴. 그녀는 표가 나게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짜증스레 혀를 찼다. 몇 번이나 입맛을 다시며 책상 근처를 이리 저리 둘러보았지만 온갖 서류철과 책 나부랭이로 축조된 이 견고한 성채는 도무지 함락시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걸 치우면 어디서부터 치워야 하는 건지. 모르는 척하고 옆의 다른 선생님 책상이나 은근슬쩍 닦고 말까. 시간 안에 청소를 끝내려면 그래야 하긴 하겠는데, 그렇다고 이 엄청난 책상을 그대로 두고 다음 책상만 치운대서야 청소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결국 오만 인상을 다 찌푸리며 그녀는 책상 위에 가득히 널린 서류철들을 한군데로 모아 차곡차곡 쌓았다. 한꺼번에 들자니 팔이 저려올 만큼 무거운 것들이어서 결국은 반씩 반씩 나누어 옆의 다른 책상으로 옮겨 쌓았다. 서류철을 들어내고 나니 그 내부는 더욱 가관이었다. 제법 비싸 보이는 만년필부터 얄팍한 시집, 원고지 묶음, 무언가가 빽빽이 적힌 메모지까지 온갖 것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그녀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 잡동사니들을 주루룩 한 쪽으로 밀고, 용도 및 크기에 따라 하나씩 분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어지럽혀진 속에서도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점이었다.
“흠...“
잡동사니를 정리하자면 서랍이 최고인데. 그러나 보이는 책상 위를 이지경으로 해 놓고 사는 사람이 서랍 속인들 정리해 둘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그만 아찔해서 고개를 움츠리며 낼름 혀를 내밀었다. 오늘 손상향 죽는 날이군.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고는, 내키지 않는 손으로 서랍을 열었다.
“......“
그러나 의외였다. 열어본 서랍장 안은 손 대기가 민망할 만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두꺼운 골판지를 잘라 붙여 만든 칸막이에 따라, 온갖 물건들이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순간 방금의 그 너저분한 책상 위와 깔끔하게 정리된 서랍장 사이의 괴리감에 그녀는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연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누가 이 자리 치우려다가 책상 위는 포기하고 서랍장 속만 정리해 놓고 갔나.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저 편 다른 교사들의 책상을 닦고 있는 다른 학생들을 바라보았다.
“아... 치우려구?“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흠짓 놀라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키 큰 남자 하나가 머쓱한 미소를 짓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혼자 치우기엔 뭐가 너무 많을 텐데...“
그는 난처한 눈으로 상향이 손을 대어 치우기 시작한 자신의 책상을 쓰윽 훑어보았다. 도대체가, 책상 하나의 위에 어떻게 저 많은 것들을 다 늘어놓았던가 싶을 만큼 많은 것들이 차곡차곡 덩어리진 채 몇 개로 뭉쳐져 있다.
“치워야지 치워야지 생각은 하는데 늘 짬이 안 나서... 그렇지만 방금 그것도 다 나름대로는 제 자리에 둔 건데.“
그는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그 말투는 분명하지 못했고 무언가 어물대는 것처럼 들렸다. 나이 꽤나 먹은 어른이 듣는다면 비 맞은 중 염불하는 소리라며 버럭 역정부터 낼 듯한 그런 말투 말이다. 학생 대 교사라는 지금의 상황에 걸맞지 않게도 그의 그런 말투는 한참이나 어린 상향에게또한 상당히 짜증스럽게 먹혀들었다.
“그래서 치울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녀는 뾰로통하게 내뱉고는 앞을 막아선 이 어정쩡한 선생의 존재를 무시하고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사람이, 생각만 하면 뭘 해요. 실천에 옮겨야지.“
그가 자신의 반에 수업을 들어오는 교사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더라도 그 말투는 불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나 이 낯선 교사는 멋쩍은 듯한 웃음만을 흘리며 이 어린 제자의 손에 들린 걸레를 난처한 듯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그렇지. 미안하구나.“
그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묘안이라도 발견해 낸 듯 조금 커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오늘 퇴근 후에 책상을 조금이나마 정리해 둘 테니까, 내 책상 청소는 미뤄 두었다가 내일 하는 것이 어떻겠니? 명색이 애들 가르쳐 먹고 사는 선생이라면서, 학생한테 중노동 시키는 것 같아서 맘이 편치를 않구나.“
“......“
뭔가 미덥지 못한 선생이라고 상향은 생각했다. 한참 동안 이 신참 교사의 아래 위를 훑어보고서야 그녀는 큰 생색이라도 내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선생님. 그럼 내일 치울게요.“



다음 시간은 문학이다. 교과서를 가져오지 않은 걸 깨달았지만 별 걱정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또 자습일 테니까. 문학을 가르치던 학생들 사이에서는 마귀 할멈으로 통하던 늙은 여선생이 한달쯤 전 등교길에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나이도 있고, 이 참에 학교를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흉흉히 돌기는 했었지만 정확히 어찌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고 이러구러 한달 남짓, 문학 시간은 그저 조용히만 하면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그런 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지만 이래가지고 시험 어떻게 치지. 그녀는 잠시 눈을 깜박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스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교실은 일순 조용해졌다. 타박대는 구두발 소리를 울리며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어제, 책상을 치우느니 마느니 하는 일로 상향과 가벼운 입씨름을 벌였던 그 선생이었다. 어제와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머리, 똑같은 안경을 끼고, 옆구리에 출석부와 교과서 한 권, 교편을 든 채로 그가 열린 문턱을 넘어 교탁 위로 오르고 있었다. 교실 안에 가벼운 술렁거림이 일었다.
“반장.“
주춤대며 일어난 반장의 구호에 맞추어 입 속으로 웅얼거리듯 인사를 하고, 학생들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이 낯선 방문객을 바라보았다. 개중 몇몇은 이미 사태 파악이 끝난 듯 모자란 공부를 하려고 펴 두었던 영어니 수학 참고서를 덮어 주섬주섬 책상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대부분의 학생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오랜만에 사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문학 시간의 칠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
그는 뒤로 돌아, 백묵을 들어 크게 칠판에 자신의 이름을 썼다. 유비(劉備). 한글보다도 한문을 쓰는 문체가 고왔다.
“반갑다.“
그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조금 커지긴 했으나 그 웅얼대는 듯한 말투는 여전했다.
“앞서 문학을 담당하시던 한태영 선생님께서 건강상 이유로 학교를 사임하셨다. 그래서, 내가 앞으로 남은 문학 수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
그렇구나. 상향은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고 보니 본의 아니게 반에서 가장 먼저 새 문학 선생과 면식을 익히게 된 터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조금쯤 버르장머리없이 굴었던 게 아닌가 싶은 생각에 그녀는 짐짓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은 칠판에 적힌 대로고. 반장, 진도 어디까지 나갔지?“
순간 야유도 아니고 환호도 아닌 묘한 목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 채웠다. 새 선생님의 첫 수업. 군기가 꽉 잡힌 학기 초도 아니고, 얌전히 수업을 들어줄 이유라고는 전혀 없는 것이다.
“다음 시간부터 수업해요.“
“첫사랑 이야기 해 주세요!“
“첫날 밤 이야기 해 주세요!“
“선생님 몇 년 생이세요?“
순식간에 터져나온 몇 가지의 질문이 귀가 따갑도록 뒤섞여 교실 안을 울렸다.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제법 야멸차게 고개를 저으며 교과서를 펼쳤다.
“반장. 진도.“
“선생니임~“
“진도...!“
“...128페이지.“
몇 번 주위를 둘러보던 반장이 피식 웃으며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상화의 ‘나의 침실로’입니다.“
순간 박수 소리와 환호성 소리가 교실 안을 가득히 메웠다. 나의 침실로. 남자 선생님에게 이 낭만주의적인 색채가 넘치다 못해 퇴폐적이기까지 한 시를 들이대는 이유야 뻔했다. 이 시로 낯 뜨거운 수업을 하던가, 아니면 좀 봐 줄 테니 한 시간 편안하게 놀던가 양자 택일하라는.
“진도가 빠르군.“
그는 미소지었다. 곧이 들은 건지, 아니면 정면돌파하겠다는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교과서를 펼쳐 손에 들었다. 교실 안에는 기묘한 기대감이 가득히 퍼져가고 있었다.
“자, 128 페이지를 편다.“
사락대는 소리와 함께 책장들이 넘겨진다. 그러나 정작 교과서를 펴라고 지시한 그 내용이 무색하게도 그는 자신의 책을 덮었다. 두 손으로 교단의 양 끝을 단단히 붙잡고, 그는 천천히 교실 안 구석 구석을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길게 한 번 숨을 들이쉬고는 가볍게 입을 열어 천천하고도 완만하게 그 짧지 않은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다.
“마돈나, 지금은 밤도 모든 목거지에 다니노라 피곤하여 돌아가려는도다.
아, 너도 먼동이 트기 전으로 수밀도(水蜜挑)의 네 가슴에 이슬이 맺도록 달려오너라.
마돈나, 오려무나. 네 집에서 눈으로 유전(遺傳)하던 진주(眞珠)는 다 두고 몸만 오너라.
빨리 가자, 우리는 밝음이 오면 어덴지 모르게 숨는 두 별이어라...“



놀라운 일이었다. 일단 입을 여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교과서 책장 속에 늘 죽어있던 활자들이 순식간에 깨어나 제 운율을 지니고 흘러내렸다. 그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낭랑했으며, 연인을 부르는 듯 오지 못할 것을 기다리는 듯 짙은 그리움에 가득 차 있었다. 무대에 선 연극배우의 독백과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뒷덜미로 스르르 소름이 오를 지경이었다.
“마돈나, 별들의 웃음도 흐려지려 하고, 어둔 밤 물결도 잦아지려는도다...
아, 안개가 사라지기 전으로 네가 와야지 나의 아씨여, 너를 부른다.“
암송을 마친 그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교실 안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다. 흐트러진 앞머리, 두꺼운 뿔테 안경, 요즘은 일부러 구하기도 힘들 것 같은 짙은 회색 양복. 저 사람의 어느 구석에 저런 엄청난 에너지가 숨어 있는 것일까. 1분여가 채 못되는 짧은 시간 동안, 교실 안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이상화, 나의 침실로. 부제는, 가장 아름답고 오랜 것은 오직 꿈 속에만 있어라.”
마지막의 시인과 시의 제목, 부제까지를 말한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의 수줍은 경직은 그 짧은 순간동안 모조리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그는 더없이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군들은 몇 살이지? 2학년이니까, 열 여덟인가?”
“네.”
“좋은 나이다.”
그는 미소지었다.
“열 여덟은 어린애가 아니다. 이 시가, 바로 이상화 시인이 열 여덟 살 때 지은 시니까.”
아아. 교실 안에 가벼운 탄성이 일었다. 그는 흐뭇한 미소를 띄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제군들 또한 스스로의 감수성을 얕보지 않고 끊임없이 반추하고 사색한다면, 이런 글 쯤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는 두어걸음 옆으로 물러나 칠판에 마돈나(madonna)라는 단어를 썼다. 별 것 아닌 움직임이었으나 워낙에 교실 안이 조용했던 탓에 그 움직임은 몹시도 크게 느껴졌다.
“마돈나. 미국 가수 이름이 아닌 것쯤은 알고 있겠지? 통상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칭할 때 쓰는 말이다. 그렇지만 아름다운 여자나, 특히 연인을 부르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 시에서는 연인을 부르는 말로 보는 것이 적당하겠지.”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은 필기를 시작했다. 본 진도가 아니었을 값에라도 이왕 수업을 하는 이상, 선생이 하는 말은 농담까지도 받아적어 두어야 시험볼 때 유리하니까.
“이 시가 시험에 나온다고 했을 때, 마돈나의 의미를 묻는 문제는 반드시 나온다. 그리고 그 답은, 무조건 이상향, 혹은 잃어버린 조국이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런 문제가 나올 땐 예의상 그렇게 답을 써 주도록 하자.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시를 쓸 당시 시인은 고작 열 여덟 살이었다. 아까 열 여덟 살에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걸로 봐서 어린애가 아니라고는 했다. 하지만 과연 시인이 그 나이에, 정말로 광복을 빼앗긴 조국을 걱정하는 우국충정만으로 이런 시를 썼을까? 글쎄다.”
그는 싱긋이 미소지었다. 수업이 진행됨에 따라 그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커졌다. 그 속에 스며든 자신만만함은 더러는 오만함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변해 있었다. 어제 교무실에서 만난 그 수줍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여기 있는 나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면, 열 여덟 살 때의 나는 부모님이 주시는 참고서 값을 삥땅해서 플레이보이 잡지를 사고, 포르노 테이프 가지고 있는 친구 녀석 비위 좀 잘 맞춰서 그거 한번 보려고 눈이 시뻘개져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만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 나이 또래의 사내 녀석들은 대부분 다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 시인은 도대체 얼마나 잘난 자식이었길래 그 나이에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긴 칼 옆에 차고 싶은 시름하는’ 이런 시를 쓴 걸까?”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높고 낭랑하게 말했다.
“단언하건대, 난 개소리라고 본다. 물론 그런 심리가 아주 없지는 않았겠지. 시인이 열 여덟살 되던 해는 그 유명한 1919년이다. 삼일 운동이 일어난 해지. 그런 시대를 살면서, 글자를 가지고 시 나부랭이나 짓겠다고 끄적거릴 정도의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 생각이 없었을 수는 없었을 거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 시가 100% 그런 우국충정에서 쓰여진 것이라는 건, 후학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라고 나는 감히 생각하는 바다. 이 사람이 몇 년 후에 그 유명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썼으니까. 그런 위대한 민족 시인이, 불과 몇 년 전에 연애시 나부랭이를 썼다는 건 인정하기 싫었을 테니까.”
“......”
그의 발언은 발칙한 데가 있었다. 감히, 학원도 아닌 학교 문학 시간에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그런 내용. 학생들은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나 그만큼, 교실 안의 분위기는 더욱 진지해졌다.
“시인에게도 사생활이란 건 있는 거다. 몇 년 후에 ‘뜰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다’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피끓는 열 여덟에 보고 싶고 안고 싶은 여자 하나 없었으라는 법 있나? 아니다. 이 시는, 조국보다는 그 여자에 대한 애타는 그리움을 노래한 시라고, 나는 그렇게 본다.”
그는 여기서 말을 끊고는 몸을 꼿꼿히 세웠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론, 이건 내 생각이다. 제군들까지 반드시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처럼 생각하면, 현재의 입시 제도 하에선 손해를 매우 많이 보게 될 테니 웬만하면 내 말 같은 건 믿지 않기를 바란다. 다만.”
“......”
“자신의 생각이란 건 가질 필요가 있다. 참고서에 풀어주는 대로 달달 외우지 말고, 나름대로 시를 보고 해석하는 눈을 가져주길 바란다. 살아 생전 시인이 단 한번도 내 시 중 ‘나의 침실로’에 나오는 마돈나는 조국의 메타포(metaphor)라고 말한 적도 없고, 설령 그렇게 말한 적 있더라도 일단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을 해석하는 건 독자의 재량이니까.”
그는 고개를 쳐들었다. 늘 버릇같은 미소만을 짓고 있던 눈매가 그 속에서 매섭게 빛났다.
“글은 읽는 것이어야지 외우는 것이 되어선 인된다. 글 하나를 읽고, 주제니 상징이니 하는 것 따위를 찾아내는 건, 학교에서나 하는 미친 짓 중의 하나다. 제군이 이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숱한 시편이나 소설들 중에 단 하나라도 제대로 건지려면, 그건 시험공부용 암기로 그치고 그 이후엔 완전히 잊어야 한다. 그리고 제군들 나름의 방식으로 그 글을 해체하고 재해석해야 한다는 거다. 그 해석은 엉뚱하고 독창적인 것일수록 좋다. 다소 불경스럽더라도 말이지. 그만큼 많은 생각을 했다는 증거이니까.”
그는 찬찬히, 교실 안에 앉아있는 학생들을 주욱 훑어보았다.
“말 잘 듣는 학생은 학교의 이상형일 뿐이다. 학교를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면, 스스로의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점심 시간이 지난 후의 청소 시간에 교무실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아마도 그 자리의 주인이 이제는 호칭만 선생님으로 불러서 될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잘 보여야 할 수업 담당 교사가 되었다는 점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상향은 생각했다. 그런 문학선생이라니, 이야기도 처음 들었다. 그녀의 어머니와 이모들 역시 이미 환갑이 지난 역사를 지닌 이 학교의 학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지만 이 고리타분한 명문 사립 학교에 저런 문학 선생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은 차마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냥, 오늘 수업 잘 들었습니다 라고, 예의 바른 학생처럼 그렇게 말해 볼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상향은 피식 웃고 말았다. 흥이다. 그런다고, 이미 내뱉아 버린 그 버릇없는 말들이 퍽이나 술술 없었던 일로 지워지겠구나. 그녀는 일부러 눈을 질끈 내리감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에이, 몰라몰라. 어쩌라고. 찍힌 건 찍힌 거고, 설마 시험 볼 때 맞은 걸 틀렸다고 해서 점수 깎지는 않겠지 뭐. 시험볼 때 문학 공부 몇 시간 더 해버리면 되지 뭐. 그런 등등의, 기실 조금씩 불안해지는 마음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도 않는 말들을 속으로 열심히 주워 섬기며 그녀는 계단을 내려가 교무실로 들어섰다.
육중한 문을 밀어 열고 빼꼼히 고개를 디밀었다. 그러나 워낙에 구석진 곳에 틀어박힌 자리라, 문에서 겨우 한 발 정도 들어온 이 곳에서는 염탐이 불가능하다. 그녀는 절망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할 수 없지 뭐. 그녀는 아무래도 내키지 않는 듯한 발걸음을 끌며 예의 이사장의 동서뻘 된다는 교감의 앞을 지나고 뾰족한 턱이 야비해 보이는 교무주임의 앞을 지나고 돌아앉은 덩치가 다 자란 곰만큼이나 커다란 학생주임의 앞을 지나 문제의 그 구석 자리에 닿았다.
“저기...”
그는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등 뒤에 와 선 사람이 누구인지 돌아볼 여력 같은 것은 그에게는 없어 보였다. 그는 책상을 치우고 있었다. 그 육중한 책꽂이며 서류철들을 죄다 들어낸 채, 곁에서 보는 사람이 애처로울 정도의 느릿느릿한 손놀림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제 자리에 정리하고 있었다. 설마, 나 때문에? 상향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벌써 왔니?”
흘끗 뒤를 돌아보던 그는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한가득 안아들었던 책들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런데, 어떡하지? 아직 자리 정리를 다 끝내지 못했는데.”
그는 어제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어물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는 아까 수업 시간에 들은 맑고 낭랑한 목청과 같은 인후(咽喉)에서 나온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미적대고 소극적인 목소리였다. 상향의 입에서 대답이 떨어지지 않자, 그는 더욱 더 당황하며 무언가 열심히 변명을 하려고 했다.
“아, 저, 그게. 아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학교 부임한지가 얼마 안 되어서 자잘하게 해야 할 일이 좀 많다 보니까, 그래서. 음, 웬만하면 이 시간 전까지는 마치려고 했는데 말이야.”
“...괜찮아요.”
홀리듯이 그렇게 말해 버리고 말았다. 괜찮다니, 뭐가 괜찮다는 건가. 교사의 자리를 학생이 청소하는 것이 원래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먼저 치워두겠다 말한 것은 저 편이었고, 사정이 있어 하지 못하고 말았다는데 거기에 대해 괜찮다는 당돌한 대답을 할 자격 같은 건 실은 학생 따위에겐 없는 거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깃이 빳빳한 제복을 입어 왔고 역시나 아무나 가는 곳 아니라는 사립 여중학교를 거쳐 이 곳에 온 그녀로서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렇게 대답해 버리고 말았다. 괜찮다고.
“그것보다...”
말을 해야 할까.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잠깐의 머뭇거림 후, 그녀는 자신이 하고자 했던 말을 그대로 입 밖으로 밀어내 놓고야 말았다.
“오늘 수업, 멋지셨어요.”
“오늘 수업?”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새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 아까 수업시간에 서늘한 광채를 발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2학년 6반이에요.”
“아.”
그제서야 수긍이 간다는 듯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의 침실로?”
“네.”
그는 계속 아 하는 탄성을 연발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모습만 봐서는, 아까 그 수업을 진행한 그 사람이라고는 아무래도 생각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 어느 것이 진짜 이 사람일까 하는 호기심이 문득 들었다.
“재미있었어? 다행이네.”
그는 웃었다. 그리고는 제법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름이 뭔가? 군.”
수업시간부터도 느낀 것이지만, 그에게는 여학생을 군이라고 부르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입을 열던 순간 가볍게 가슴이 떨리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손...상향입니다.”



“......”
그는 더없이 진지하게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 오히려 이야기를 하려던 사람이 무안해졌던지 몇 번이고 이리저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솔직히 말해 봐요. 재미 없죠?”
“아닌데?”
“에이.”
상향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젖비린내 나는 여자애가 선생님한테 반한 얘기 따위가, 뭐가 재밌다는 거에요? 아저씨 정말 변탠가봐.”
“젖비린내 나는 남자애가 남자 선생한테 반한 얘기보다 백만배는 재미있으니까, 계속해 봐.”
그는 유들유들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상향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가 웃는 것은 처음 본다. 실소나 고소(苦笑)가 아닌, 저런 진짜 웃음은.
“사랑이라는 건, 껍데기 벗겨놓고 뼈대만 추리면 다 똑같이 유치한 거야. 그러니, 계속해 봐.”



“안 더우세요?”
요즘은 봄 가을이 없다며, 늘 입고 다니는 회색 양복 자켓을 벗어 의자 뒤에 아무렇게나 걸쳐 두고 셔츠 소매를 팔뚝 중간까지 걷어 붙인 채 흰 한지를 바른 합죽선을 흔들흔들 부치고 있는 비를 향해 상향이 물었다.
“더우시면 여름 옷을 꺼내시지 그러세요.”
“그래야 할 텐데.”
비는 선선히 대답했다.
“통 옷장 정리할 시간이 없구나. 어허, 이 땀 좀 보게.”
그는 안경 너머로 미간을 찌푸리며 멀리 교무실 창문 밖을 내다 보았다. 새파란 하늘에 걸린 뭉개구름 몇 조각. 때는 6월도 들어서지 않았는데 이미 여실한 여름 하늘이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다음 주나 그 다음 주 쯤엔 하복을 입으라는 말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냉커피 한 잔 타 드릴까요?”
“좋지.”
네 라고 입 속으로 대답하며, 상향은 커피 포트를 들고 교무실 한 켠의 정수기 쪽으로 갔다. 토요일 오후. 학생도 교사도 대부분이 집으로 돌아가고 없다. 다음주 목요일 쯤에 있을 연구 수업 교재를 만드는 것을 돕는다는 핑계를 대고 남기는 했는데, 어째 날은 덥고 하늘은 맑아, 시선이 자꾸만 창문 밖으로만 날아갈 뿐 좀체 책상 위에 펼쳐진 따분한 서류 위로 붙들려 있지를 않는다.
“근데요.”
딸깍대는 소리를 내며 상향은 냉커피를 타온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바깥 표면으로 송글송글 맑은 물방울이 배어나는 목이 긴 유리잔에 담긴 다갈색 커피는, 저도 모르게 한 모금 입에 대고 싶을 만큼 시원해 보였다.
“옷장 정리, 선생님이 하세요?”
“그럼 내 옷장 정리를 내가 하지 누가 하나?”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요.”
상향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선생님... 아직 결혼 안 하신 거에요?”
그는 상당히 특이한 경우였다. 여학교로 부임한 젊은 남자 교사가 흔히 겪게 마련인 결혼에 대한 질문 세례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반쯤은 누가 봐도 노총각 티가 나는 그의 후줄근한 행색 탓이었고, 나머지 절반쯤은 그런 질문이 나올 틈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수업 방식 덕분이었다. 아마도,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것은 학생 중에서는 그녀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
순간 합죽선을 쥐고 흔들던 그 손의 움직임이 가볍게 멎었다가 이어졌다. 그 끊어지는 느낌은 더없이 자연스럽기는 했지만, 그 속에 스며든 숨길 수 없는 머뭇거림의 기운은 곁에 선 상향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무언가, 물어서는 안 될 것을 물은 것일까. 그녀는 가만히 눈동자를 굴려, 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비를 흘끗 쳐다보았다.
“그럴 리가. 벌써 했지.”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거리낌없는 목소리로 선선하게 대답했다.
“거기, 책상에 안사람 사진도 있지 않니.”
“아.”
상향이 나직한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책상을 닦을 때 늘 그 곳에 놓여있던 앳된 여자의 사진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 사모님인가보다. 나이차가 꽤 지는 건가. 그녀는 소리없이 시선을 돌려,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놓여있는 웃고 있는 한 여자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좀 봐도 돼요?”
“좋을 대로.”
상향은 액자를 집어 들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웃는 얼굴이 유달리 예쁜 그녀의 사진은, 그러나 웬지 모르게 구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구석구석을 훑어보다 발견해 낸 왼쪽 귀퉁이에 남아있는 날짜로는, 그 사진은 지금부터 5년이나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그래서일까.
“미인이세요.”
“뭐가.”
비는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상향에게서 등을 돌린 채, 멀리 하늘위를 떠 가는 구름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니에요, 미인이세요. 웃는 얼굴이 예쁘신데요.”
“그런가.”
그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어쩐지 씁쓸하게 들려, 그녀는 아무래도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다는 생각에 불안스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의 눈이란 대개가 비슷한 모양이구나.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그 말은 어딜 가나 빼놓지 않고 듣는 걸 보면.”
그는 탁 소리가 나게 손에 든 부채를 접어 뒷짐진 손에 쥐고 먼 하늘을 넘겨다보았다.
“그 사람, 죽었단다. 그 사진 찍은 그 해 겨울에.”
“......”
“애를 낳다가 죽었지. 요즘은 흔치 않은 일인데.”
“......”
상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녀는 잠시 손에 든 액자를 주체하지 못하고 허둥거렸다. 한참동안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그녀는, 이윽고 최대한 조심해서 액자를 본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전 그냥...”
“아니.”
그는 웃었다. 한참만에야 고개를 돌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스레 두 손을 맞잡은 상향에게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어 보였다.
“못 물을 것을 물은 것도 아니고, 왜 군이 그렇게 미안해 하지? 신경쓸 것 없어.”
“그렇지만.”
“맘 쓸 것 없다니까. 그 사람이 죽은 게 군의 책임인 것도 아니고.”
“......”
그 대답은 너무도 담담하여 오히려 마음을 쓰리게 했다. 그는 착잡한 표정으로 손에 든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여지까지도, 그런 방법으로 그녀의 존재에 대한 누군가의 관심을 차단해 왔던 것일까.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른 표정은 매우 착잡해 보였다.
“고생만 하다가 죽었지. 남편이 남편 구실도 하기 전에. 제대로 된 월급 봉투 한번 손에 쥐어 줘 보기도 전에.”
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두꺼운 안경테 너머로, 그는 낯선 눈빛을 한 채 손에 든 부채를 이리저리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상향을 바라보았다.
“군, 보석은 왜 빛나는 것일까?”



그것으로 끝이었다. 어느 여류 작가의 수필집 제목처럼,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녀도, 한 편은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물었고 다른 한 편은 차마 물을 수 없는 듯 그저 침묵했다. 그런 어색한 침묵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멍하니 보는 이의 눈동자 속까지 푸른 물을 들여 놓는 늦은 봄, 어쩌면 초여름의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 보기만 했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 간의 느닷없는 선문답은 그렇게 끝나버렸다.
그러나 그 짧은 대화가 남겨 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보석은 왜 빛날까 라는 그 짧은 화두(話頭)는 영원한 숙제가 되어 그 날부터 상향의 머리 속을 떠돌아 다녔다. 그러고 보니 단 한번도 궁금하게 여겨 본 적이 없다. 보석은 왜 빛날까. 그녀는 끊임없이 고민했다. 연습장 가득이 그 짧은 문장을 낙서해 가며, 그녀는 어떻게든 그 답을 찾아보려 애썼다. 물리 선생이나 지구 과학 선생에게 가서 물어 보면, 가시 광선의 파장 운운 굴절면이 운운하는 조금은 전문적인 답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그의 손바닥에 쥐어진 답이 그것일 리는 없다고 어느샌가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까지 말을 마친 그녀는 검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알아요? 보석이 왜 빛나는지.”
“글쎄.”
그는 미소지었다. 보석이라. 내게 묻는다면 보석을 빛나게 하는 건 그 속에 스며든 주인의 추억이라고 말할 테지만, 그 선생님이 바란 답은 그것이 아니었겠지.
“책에 나오는 말이구나.”
“......”
순간 상향의 표정이 얼어붙어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는 검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물었다.
“그 말, 알아요?”
“아주 잘 안다고는 못하겠지만, 어디 적혀 있는 말인가 하는 것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두 손의 끝을 가볍게 맞대었다.
“‘바다로 간 목마’던가. 거기 나오는 말이지. 맞던가?”
“......”
순식간에 소녀는 시무룩해졌다. 한동안 말없이 눈을 깜박이던 그녀는, 조금은 대들 듯 그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금방 안 거에요? 난, 나는 그거 찾아내느라 일주일도 넘게 걸렸는데.”
그녀는 풀이 죽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마치,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말이 어디 들어있는 말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 큰 죄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냥...”
그는 부드럽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게다가 자신의 잘못이 될 수도 없는 이런 것에마저 패배감을 느낄 정도로 그녀의 상심은 커 보였다.
“그 책을 좋아했으니까. 그리고, 난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
“그 책은, 작가가 자신의 딸이 읽을 만한 이야기를 하나 쓰고 싶다는 생각해서 써 낸 거라고 하더라. 그러고 보면 재미있지. 똑같이 자신의 아이가 읽을 글을 쓴다고 해도 조앤 롤링같이 해리포터를 써내는 사람도 있고 한수산같이 바다로 간 목마 같은 글을 써 내는 사람도 있으니.”
“......”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저씨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아저씨한테나 물어봤을 걸. 그 책, 지금은 절판돼서 나오지도 않는대요. 하루 종일 학교 도서관을 뒤져서, 겨우 찾아냈어요.”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검고 맑은 눈은 순식간에 가라앉고, 더없이 서글픈 빛이 그 안을 가득히 채웠다.
“읽고 나서, 밤새도록 울었어요. 너무 마음이 아파서요.”



“그 책, 읽었어요. 선생님.”
스무 살의 여자와 서른 한 살의 남자. 그렇게 시작되는 이야기였다.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태어나 부모의 말 한 번 거스르는 적 없는 착한 딸이었던 여자는 서른 한 살의 가진 것 없는 남자를 사랑한 탓에 집에서 내쳐지고, 결국 두 사람은 교사인 남자가 부임한 바닷가 작은 마을에 신접 살림을 꾸리고 행복한 한 때를 보낸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아이를 가진 여자는 출산 중 죽고, 홀로 남은 남자는 아내의 목숨과 맞바꾼 딸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와 아내의 이름 한 글자를 따서 민주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런 이야기였다. 물론 상향에게는, 그렇게 읽혀지지 않았지만.
“바다로 간 목마요.”
“아아.”
비는 씁쓸히 웃었다. 처음 그 말을 꺼낸 지 일주일도 넘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옷장 정리를 하지 못한 것인지 그는 여전히 손등까지 내려오는 긴 셔츠를 팔뚝 중간까지 걷어붙인 채 부질없는 부채질로 이른 더위를 달래고 있었다.
“찾아냈구나. 쉽지 않았을 텐데. 오래된 이야기라서.”
그는 고개를 돌려 붉게 얼굴이 상기된 어린 제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공부 하기만도 바쁠 텐데, 그런 쓸데없는 일에 정신을 팔게 하다니, 미안하구나. 군이 그렇게까지 궁금해 하리라고는, 나로서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터라서.”
“아...니에요, 선생님”
그녀는 더듬더듬 말했다.
“...좋은 책이었어요.”
“군 나이의 발랄한 소녀가 읽기엔 너무 청승맞지 않았나?”
“아니에요, 절대로.”
“그랬다면 다행이지만.”
그는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왼 손으로 턱을 괸 채 바깥을 내다보았다.
“안사람이 살아 생전에 무척 좋아하던 책이었지. 대학 신입생때부터 그 책을 끼고 다녔으니 모르긴 해도 몇 백 번은 읽었을 텐데, 뭐가 그리 슬픈지 읽을 때마다 울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결국, 주희처럼 갔지만.”
그는 씁쓸히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 땐 그 사람이 그까짓 책 때문에 왜 그렇게 우는지 몰랐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우리가 그 책의 민우와 주희처럼 될 걸 예감하고 있었던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긴, 비슷했지. 나이차이가 열 한 살까지는 안 났지만, 그 사람은 좋은 집안의 사랑받는 막내딸이었고 난 빈털터리 대학원생이었으니까.”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엉망인 책상 위와는 대조적인 서랍 안에는 자그마한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는 그 상자를 꺼내 책상 위에 놓았다. 그 속에는, 어른의 엄지손톱만한 진주가 박힌 이삭 모양의 브로치가 놓여 있었다.
“집을 나오면서, 그 사람이 지니고 나왔던 유일한 물건이란다. 집 한 칸 얻겠다고 이것까지 팔겠다는 것을, 차라리 날 죽여다 고기를 내다 팔지언정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했었지. 이건 장모님의 유품이었거든.”
그는 중얼거렸다. 그는 상향을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에게 말을 건네듯 그렇게, 그는 편안하고도 나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둘이서 끌어안고 한참을 울다가, 그 사람이 그렇게 묻더구나. 오빠, 보석은 왜 빛날까?라고.”
상향은 입을 다물었다. 아직도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남았느냐는 듯, 그녀는 검은 눈을 들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눈 속 저만치 어딘가쯤이 이미 촉촉이 젖어들고 있음을 알아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실은, 사람의 눈동자만큼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보석은 흔하지 아니하기에.
“그 날 이후로, 많은 게 달라졌죠.”
꽤나 한참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그녀는 건조한 목소리로 한 마디 했다. 그 짧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과 마친 후의 그녀는 퍽이나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그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이니?”
“네.”
그녀는 고집스레 대답했다. 그리고 재빠르게 덧붙였다.
“유치해 보일 거라는 거 알아요. 그렇지만, 전 심각하거든요.”
“아까도 말했을 텐데. 껍데기 벗겨놓고 뼈대만 추렸을 때 유치하지 않은 사랑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그는 두 손을 깍지끼며 가볍게 등을 젖혀 등받이에 기댔다.
“선생님이고 제자라는 걸 벗겨 내고 나면 그냥 한 남자를 짝사랑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일 뿐인데 뭐.”
“하지만 다들 그러던데요. 한때라고. 그러다 만다고.”
“그럴지도 모르지.”
그는 선선히 수긍했다. 그리고는, 흠짓 굳어지는 상향의 어린 눈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그러다 만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니란다.”
“......”
그녀의 얼굴 위로 희미한 어떤 표정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녀는 한동안 무어라 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는 안스러움 반 걱정 반이 섞인 얼굴로 끊임없이 손을 만지작거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코코아요.”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이, 늘 코코아를 사 주세요. 이런 거 좋아하지?라면서. 아저씨 말마따나 어른들도 코코아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아는데, 그래도 그 말이 꼭 넌 아직 이런 거나 마셔야 하는 어린애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언제부터인가 코코아를 싫어하게 됐어요. 어른처럼 말하고 어른처럼 행동하고 어른처럼...”
“속옷도 입지 않고 다니고?”
순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상향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귀 옆으로 쏟아져 내리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붉게 물든 양 뺨을 가렸다.
“못 써, 그런 건. 여자가 브래지어를 벗는 건 스스로의 자유를 위해서여야지 남자를 홀리기 위해서가 되면 곤란해. 그 선생님도, 그런 건 원하지 않으실 거야.”
“......”
그녀는 입 속으로 무어라고 웅얼거렸다. 알아들을 수는 없는 말이었지만 자신의 말을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던 탓에, 그는 굳이 재우쳐 그녀의 중얼거림이 어떤 것이었는지 묻지 않았다.
“좀 자두는 게 어떻겠니? 시간도 어중간한데.”
그는 훌쩍 몸을 일으켰다.
“알차게 자면 한 두 시간 정도는 잘 수 있겠구나. 깨워 줄 테니까, 눈이나 좀 붙여 둬.”



퍽이나 곰살맞게, 블라우스며 교복 넥타이를 챙겨 두고 그는 상향을 깨웠다. 잠이 덜 깨 큰 눈을 껌벅거리는 등을 떼밀어 반 강제로 욕실 안으로 밀어넣은 후, 빵 두어쪽을 굽고 우유를 따랐다. 이렇듯 이른 아침에 부산을 떠는 체질은 아니었지만, 자신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준비한다는 것도, 자신이 쓰던 거울 앞에 붙어서서 머리를 빗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본다는 것도 생각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저씨 제법이네요.”
뺨이 미어지도록 갓 구운 프렌치 토스트 조각을 베어물고 우물거리며 상향이 말했다.
“많이 해 본 솜씬데요.”
“자취 경력이 10년이 다 돼 가는걸.”
밤을 꼬박 샌 탓인지 배도 별로 고프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이 한 음식이란 역시 시덥잖게 먹히는 탓일까. 상향은 제법 맛있게 먹고 있는 그 프렌치 토스트는, 역시나 자신의 입에는 그다지 맛있게 먹혀지지 않았다.
“잘 먹었어요.”
상향은 접시와 빈 우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대로 두니 설거지라도 할 태세를 잡는다. 아서라 싶어 한 걸음에 어깨를 잡아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설겆이 따위 시킬 마음으로 차려준 거 아니니까, 어서 학교나 가.”
“그렇지만.”
“술 먹고 남의 집 엘리베이터에 널부러진 것부터가 벌써 민폐였어. 그까짓 접시 하나 컵 하나 더 치우는 건 이제 민폐 축에 들지도 못해. 그러니 어서 학교나 가.”
그래도 역시 뭔가 내키지 않는 듯 머뭇거리는 상향을 떼밀어 거실로 내보내고, 그는 접시 두 개와 컵 두 개를 아무렇게나 싱크대 속으로 던져 두었다.
“어서 가. 지각하겠다.”
상향은 그의 손에 밀려난 채 싱크대 앞에 붙어선 그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그녀는 어렵게 입을 열어 물었다.
“저기, 아저씨.”
“왜?”
“저...”
그녀는 한동안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다가, 큰 결심이라도 선 듯 말했다.
“가끔, 놀러와도 돼요?”
“변태네 집엔 왜 놀러오려구?”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답했다. 그녀는 순간 찔끔하여 가볍게 고개를 움츠렸다. 역시나, 저질러 버린 실례가 너무 컸나. 그녀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편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런 그녀의 귓가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 어딘지는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 술김에 온 것 같은데.”
“네?”
“나갈 때, 주소랑 호수랑 잘 보고 나가.”
그는 여전히 싱크대 앞에 붙어선 채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어쩌면 내가, 아가씨를 도와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단백(蛋白)의 스피카(Spica) -下



상향은 소리없이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섰다. 그녀는 몹시 낯선 곳에 떨어진 듯한 눈으로 찬찬히 오피스텔의 주위를 둘러보았다. 왜 자신이 여기로 흘러왔는지 모르겠다. 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와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등 뒤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혀 버린 것은 이미 오래전, 그러나 그녀는 선뜻 발길을 떼어 제 갈길로 가지 못했다.
가볍게 숨을 들이쉬어 보았다. 코 끝에 맴도는 것은 새벽에 마시다 만 레몬타임 티의 냄새다. 그녀는 의혹에 찬 눈으로 등 뒤를 돌아보았다. 뭐하는 사람일까.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 아니면 30대 초반. 깔끔한 성격의 조용한 사람 같다. 남의 속을 궤뚫어 보고 넘겨짚는데 능한 것으로 봐서는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직업일지도 모른다. 카운슬러 같은 것일까? 아니면 정신과 의사? 그녀는 의혹에 미간을 찌푸렸다. 학교 선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잠시 해 봤지만, 아마 저 사람이 선생이었으면 일단 나한테 학교를 묻고 학생과로 전화부터 했을것이라는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움츠리며 혀를 낼름 내밀었다. 아무튼 웃긴단 말이야. 지네들이 무슨 인터폴도 아닌 주제에, 왜 밖에서 애들 보면 지네 관할도 아니면서 잡아다 넘기려고 들지? 그녀는 표가 나게 입술을 삐죽였다. 그리고 가벼운 섬유 린스 향을 풍기는 블라우스를 내려다 보았다. 확실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어제 술김에 뭔가 토해냈던 기억이 난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역겹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교복까지 입은 고딩이, 그것도 여자애가 술먹고 내뻗어 있다는데 그걸 아무 말 없이 옷만 빨아 입혀 내보내는 선생 같은 게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다. 외려 건드리지나 않으면 다행일걸. 그녀는 좁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
뭐, 좋아. 그녀는 간만에, 입가 위로 생긋이 미소를 흘렸다. 간만에 말 통하는 아저씨 하나 만났으니까 그걸로 됐지 뭐. 그녀는 몸을 돌려 오피스텔 현관문에 붙은 호수 번호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오늘은 문학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은근히 평소때보다 이런 저런 것에 신경이 쓰였다. 교과서를 펼치고, 각각 색깔이 다른 펜도 서너 종류쯤 준비했다. 오늘 수업 분량인 이육사의 ‘광야’는, 이미 며칠 전부터 읽고 읽고 또 읽어 이미 외어버린 상태였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그녀는 가만히 입 속으로 처음의 싯구를 외어 보았다. 아니, 아니다. 선생님이 읊는 식으로 하면, 여기보다 뒷부분이 훨씬 더 멋있을 거야.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이 부분 말이지. 순간 뒷덜미로 가벼운 소름이 오른다. 아, 오늘 수업도 재미있을 거야. 그럼. 분명히 그럴 거야.
수분 전에 수업 시작 종이 울렸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수업은 종이 울릴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교실로 들어와 교단 앞에 설 때 시작되는 것이다. 교실 안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여기저기서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괜시리 마음을 부지하지 못하고, 상향은 애꿎은 문학 책만 만지작거렸다.
“......”
스르륵 문이 열렸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참 규칙적인 발 소리를 내며 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늘 입던 회색 양복에 늘 끼던 구식 뿔테 안경이다. 그는 천천히 교단 앞으로 걸어가 제 자리에 섰다. 반장이 일어나 구호를 붙인다. 차렷, 경례. 반갑습니다. 학생들의 목례에 그 또한 마주 꾸벅 고개를 숙여 온다. 교실 안은, 기대 반 호기심 반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오늘 수업은 ‘광야’던가.”
그가 나지막히 물어 온다. 그 목소리가 어째 기운이 없는 듯 느껴졌지만 원래 그는 본 수업이 시작되기 전엔 늘 그랬다. 네에 라는 몇몇 아이들의 대답을 확인한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어째, 책장을 넘기는 손에 기운이 없어 보였다.
“......”
자신에게 쏠린 검은 눈동자들을 외면한 채, 그는 한참동안이나 쓴 입맛을 다시며 문학 책을 이리저리 뒤적거렸다. 무언가를 헤아려 보는 듯 이리저리 따지다가, 그는 결국 책을 덮어버렸다.
“이번 시간은 자습이다.”
“예?”
“이번 시간은 자습이다.”
그는 맥풀린 목소리로 반복했다. 이미 그에게는 수업을 진행할 신명 같은 것은 남아있지 않은 모양으로, 그는 더없이 착잡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교실 안을 죽 둘러보았다.
“정숙하고, 각자 할 일 하도록. 다른 과목 공부를 해도 좋고.”
“......”
“이상.”
의아한 듯 자신을 바라보는 학생들을 외면한 채, 그는 망연히 한 옆으로 걸어가 운동장 쪽을 향한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그제서야 이번 시간에 더 이상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다는 걸 수긍하기 시작한 학생들은 부스럭거리며 자습 준비를 시작했다. 그냥, 꺼낸 김에 다른 교과서보다는 조금은 재미있는 문학 교과서를 읽는 학생도 있었고 영어니 수학이니 하는 다른 책을 끄집어 내는 학생도 있었다. 더러는 아예 책상 위에 이마를 대고 엎드려 버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통상 자습이라고는 해도, 공부 이외에 잠을 보충한다거나 하는 짓은 담당 교사 앞에서는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비는 그런 것 따위에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멍하니 창문 유리에 이마를 댄 채 창 밖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 그는 더위도 잊은 모양으로 손에 든 부채를 부치지도 않고 있었다.
“......”
어디, 아프시기라도 한 걸까. 상향은 근심스런 눈으로 그런 비를 바라보았다. 부쩍 덥다는 말을 자주 하시더니, 어디 감기라도 걸리신 건 아닐까. 그러나 온 몸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아픈 것 따위와는 실은 거리가 멀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랬다. 그는 무엇엔가 크게 상심한 것처럼 보였다. 평소에도 그렇게 젊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오늘의 그는 보통 때보다도 훨씬 나이들고 지쳐 보였다. 무슨 일이세요.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상향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제가 알면... 안되는 일인가요?
“......”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것일까, 그는 고개를 돌려 이 편을 바라보았고 덕분에 상향은 움찔 놀라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 고개를 숙인 교실 안을 훑듯이 둘러보던 그는, 잠시 후 투덕투덕 무거운 발 소리를 남기며 천천히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어쩐지 망연하게 들려, 상향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책을 폈다. 그러나 상향의 책장은 그 시간이 마칠 때까지 한 장도 채 넘어가지 못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온 몸의 신경을 교실의 문에 집중한 채, 그녀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수업 시간이 줄어들어가고 급기야 수업이 마치는 종이 울릴 때까지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교과서며 출석부며, 늘 지니고 다니던 교편 때문에라도 돌아오려니 여겼으나 그마저 귀찮았던 모양이다.
니가 갖다드려 라고, 반장이 피식 웃으며 눈매를 찡긋 해 보였다.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드러나는 것이다. 상향이 새로 온 문학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미 반에서는 모르는 아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 뿐이다. 그들은 모를 것이다. 그들조차도, 그것이 한 때 지나가고 말 덧없는 감정의 사치라 여길 것이다. 세상의 아무도,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감정임을 모를 것이다. 가끔은, 나조차도 자신이 없으니까.
상향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교단 앞으로 나가 교과서와 교편을 챙겼다. 출석부 따위야 어차피 다음 수업 시간에도 필요하니 놓아두어도 상관은 없지만 이것은 갖다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혹시 다음 시간에 수업 비슷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총총히 교실을 나섰다. 흘끗 옆으로 내려다 본다. 이미 희미하게 손때가 타고 책장이 벌어지기 시작한 책장 위로, 비(備)라는 한 글자가 짤막하게 쓰여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팠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교무실에도, 그는 없었다. 치운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또다시 뭔가가 채곡채곡 쌓여가기 시작하는 그 책상을 헤집고, 책상 위에 덮인 두꺼운 유리 밑에 끼워진 그의 수업 시간표를 찾아내 다음 시간에 수업이 없음을 확인해 보고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지만, 역시나 평소답지 않은 그 모습에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책이나 교편 같은 것, 그냥 이 책상 위에 던져놓고 교실로 돌아간대도 아무도 그녀를 탓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 곳에 그런 사무적인 목적으로 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상향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책과 교편을 옆구리에 그대로 낀 채 조용히 교무실을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매점에서 캔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양호실에 모여앉아 자기들끼리의 이야기에 여념이 없는 여교사들과는 달리, 그 나이 또래의 남자 교사가 갈만한 곳은 교내엔 은근히 없다. 남교사 휴게실이나 학생부실 정도가 전부일까. 그나마 학생부실은 학생 주임과 사이가 좋은 몇몇 교사들이나 거리낌없이 들락거리는 곳인데다가, 하루중 대부분이 학생을 체벌하거나 반성문을 쓰게 하는 데 사용되고 있으니 그 곳도 힘들다. 그럼 휴게실에 계시나. 상향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그 어떤 이유도 근거도 없이 그녀는 그렇게 단정해 버리고 말았다. 남교사 휴게실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다. 자욱한 담배 연기에 가끔은 쉰다는 개념이 부담스러울 만큼 조용한 곳. 그다지 교내에서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동료 교사도 있지 않은 터에 선생님이 그런 곳에 가셨을 리가 없어.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옥상이라도 가신 건가. 생각이 떠오름과 동시에, 그녀는 자연스레 걸음을 떼어 옮겼다. 맞다면 좋은 거고,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다만, 쉬는 시간이 10분밖에 안된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다물었다. 그리고 교무실 앞 복도를 벗어나자마자, 다리를 크게 벌려 계단을 두 칸씩 세 칸씩 건너 오르기 시작했다.



“아, 군인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는 옥상에 있었다. 아까 수업시간에 본 그 후줄근한 회색 양복 차름 그대로, 두터운 뿔테 안경을 콧등까지 늘어뜨린 채 그는 원래는 열려 있지도 않은 옥상 문을 억지로 열고 그 안에 들어와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웬일이지?”
“이 것.”
상향은 말없이 옆구리에 끼었던 책과 교편을 내밀었다. 그제서야 비의 얼굴에 아차 하는 듯한 가벼운 표정이 스쳐 지나간다.
“아아, 깜박했군. 고맙다.”
“아니에요.”
상향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들 사이에는 잠시 묘한 침묵이 흘렀다. 이제 볼 일을 다 보았으니, 게다가 다음 시간 수업이 기다리고 있으니 내려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비를 올려다 보았다.
“저기, 선생님.”
“응?”
“오늘...”
이런 걸 물어도 될까. 어줍지 않다 생각하지는 않을까. 그녀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먼저 겁을 먹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느끼자마자 꼭 그만큼의 반발심이 치밀어 올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어 몸 옆으로 붙였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
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천천히 감았다 뜬 눈으로 그녀를 꼼꼼히 훑어볼 뿐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평범하다 못해 후줄근하고 촌스러운 그의 행색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제법이나 차갑고 매몰찬 데가 있었다. 그제서야,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그랬는지 어제 아침 자신이 속옷을 입지 않고 집을 나섰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흠짓 얼굴을 붉혔다.
“왜?”
그는 부드럽게 물었다. 그 별 것 아닌 반문에도 화들짝 놀라, 그녀는 표가 나게 어깨를 떨었다.
“아, 아니, 그냥요.”
그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하듯 말했다.
“늘 기다리거든요, 선생님 수업은. 오늘은 무슨 말씀을 해 주실까 하고. 게다가 오늘 배울 시가 광야였어서. 그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하는 부분...”
이런 말 해도 될까. 그녀는 다시 뜨끔했다. 웬지 위축되는 자신을 느끼며, 그녀는 목을 움츠리며 중얼거렸다.
“선생님이 읽으시면, 되게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비는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서일까. 그 순간의 그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그 낡은 양복과 촌스러운 안경 따위의 사물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보였다. 순간, 이 사람은 저런 옷이며 물건들을 일부러 걸치고 다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미안하게 됐구나.”
그는 고개를 돌렸다. 상향이 선 편에서는 그 얼굴이 보이지 않아, 지금의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상태로 수업을 하는 건 학생에 대한 선생의 예의가 아니라고 난 생각해서 말이야.”
“네?”
상향이 되물었다. 그럼 수업을 하기 싫었다는 얘긴가. 단지 그 이유로? 무언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당혹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비는 그런 그녀를 돌아보며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왜, 선생들도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딴생각하면 야단치잖니. 그런 주제에, 수업 중에 딴생각을 해서야 되겠니. 차라리 수업을 안 하는 게 낫지.”
“......”
상향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검은 눈이 차분히 가라앉고, 그러나 그 대신 심상치 않은 빛을 띠었다. 물론 그녀는 아직 어렸다. 그러나 어리다고 해서 여자가 아닌 것은 아니었다. 그녀 또한 이미 한 여자였다. 그리고 소위 여자의 직감이라는 것은, 이미 그녀에게도 어느 정도 그 빛을 드리우고 있었다.
“사모님... 때문에요?”
“......”
비는 뜨끔 놀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맞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반이었다. 맞춘다면 내가 이만큼이나 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니 스스로 대견스러워 해도 좋을 문제였지만, 동시에 이미 죽어 없어진 그 분이 이 사람에게 드리우고 있는 그늘이 그토록이나 크고 깊다는 이야기니 그다지 좋아할 수도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는 비의 표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넘겨짚음이 맞았다는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순간 가벼운 배신감이 치밀어 왔다.
“...오늘이.”
그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그 사람 생일이란다.”
“......”
“봄을 닮아서, 잘 웃고 잘 우는 그런 사람이었지. 나 아니라도, 아주 많이 사랑해 줄 사람이 분명 어디엔가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는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 진주 브로치. 그거였다. 그녀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는 그 것. 얌전히 책상 서랍 속에 묻혀 있을 때는 그저 희뿌연 빛을 내는 둥근 구슬 정도로만 보였던 그것은, 봄날의 화창한 햇살 아래서 불가사의할 만큼의 다양한 빛깔을 내고 있었다. 본래 진주란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여인의 보석인 법이다. 아직 어렸고, 그래서 진주의 불투명한 광채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상향의 눈에도 그 광채는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한동안은, 아무렇지 않았어. 그 사람이 죽은지도 이미 5년이나 지났고. 몇 년간은 아무렇지 않게 지냈지. 그런데 올해는... 기분이 퍽 묘하구나.”
그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런 그를 바라보는 상향의 얼굴은 점점 더 굳어져 가고 있었다. 화가 났다. 그런 것이었다. 어째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의 그런 한 마디는 걷잡을 수 없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실망이에요.”
그녀는 낮고 차분한, 그러나 어딘가 억눌린 듯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기신 건가 했는데, 결국은 그런 거였네요. 지금은 살아계시지도 않은 사모님 생신이라서, 그래서. 그것 때문에.”
“......”
사실 상향은 매우 솔직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러나 여지껏 비의 앞에서 그런 성격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덕분에 단단히 허를 찔린 그는 두터운 안경 너머 휘둥그레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군?”
“실망했어요.”
그녀는 고집스레 내뱉었다. 그리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여린 뺨 위로 드러난 실망의 표정이 너무도 적나라한 것이어서, 비는 짐짓 당혹스러움에 헛기침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선생님 말씀 대로라면, 학생도 오늘 심란해서 수업 받을 기분이 아니니까 바깥에 나가 바람이나 쐴래요 라고 말하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네요.”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가 만지작거리고 있던 진주에서 영롱한 빛이 났다. 그 빛이 견딜 수 없이 눈에 거슬린다는 느낌에 상향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모르지 않는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으리라는 것 따위, 나 역시 모르지 않는단 말이야. 하지만, 하지만 이런 건.
“그럴 수도 있겠지.”
비는 선선히 답했다. 안경의 투명한 렌즈 너머로 그는 막막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늘 궁금했었다. 그의 시력은 얼마나 되는 것인지. 그의 안경은, 때론 눈이 나쁘지 않은 보통 사람은 걸치기만 해도 멀미가 끼칠 만큼 어지러워 보이기도 했고 또 때론 하나도 시력이 나쁘지 않으면서 그냥 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어 보이기도 했다. 지금의 경우는 단연 후자. 말갛게 닦인 렌즈 너머로, 그의 눈동자가 너무도 선명히 보인 탓이다.
“난 이미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걸. 억지로 붙잡아둔다고 해서 다 공부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내게 찾아와서, 별다른 이유도 없이 수업을 듣고 싶지 않으니까 오늘은 빠지겠다고 말하는 용기있는 학생은 그다지 흔하지 않더구나.”
“......”
그러나 그녀는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사실 그녀에게, 오늘 그가 왜 수업을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수업이 시작된 후 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의 침울한 얼굴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 분이 제일 중요한 건가요. 5년이나 지났다면서. 어른에게 5년이란 시간은, 이제 그만하면 뭐든 잊을 수 있는 그런 긴 시간 아닌가요. 그런데 아직도. 그리고, 그걸 숨기려는 최소한의 노력조차도 하지 않겠다는 건가요. 그녀는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나, 난 그 눈에 어찌 보일까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어린애일 뿐이란 건가요.
“그렇군요.”
한참만에야 나직히 입을 열며, 상향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여지껏 한 번도, 단 한번도,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은 받은 적이 없었다. 물론 아무렇지 않을 수야 없겠지. 한때나마 살을 맞대고 살았던 사람을 그리도 젊은 나이에 비명에 보내고 아무렇지 않다면, 그건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지. 생각은 그랬다. 그토록이나 뻔하고 명백했다. 그러나 방금에서야 깨달았다. 그 얄팍한 관용은, 그가 자신의 앞에서 단 한번도 표나게 그녀를 그리워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이미 세상을 떠난 이가 세상에 태어난 날. 허허로와 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저릿한 배신감이 치밀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럼 저도, 이제부터 선생님 수업 빠지겠어요.”
“뭐?”
비가 물었다. 그는 표가 나게 당혹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히려 보란 듯이, 상향은 작은 턱을 앞으로 내밀고 또박또박 말했다.
“선생님, 그렇게 제멋대로이신 분인 줄은 몰랐어요. 저 이제부터, 선생님 수업 듣지 않을래요.”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싸움이라도 할 것 같은 품으로 한 발 앞으로 다가서 차라리 떠다 밀 듯 가져온 교과서와 교편을 비의 손에 떠맡겼다. 그리고 더없이 딱딱한 태도로 가벼운 목례까지 올리고 천천히 몸을 돌려 출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흘끗 시계를 본다. 쉬는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그 핑계를 대고, 그녀는 종종걸음을 치다가 서서히 뛰기 시작했다.
견딜 수 없이 속이 상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고 목청을 높여 대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느낌이 그녀를 지치게 했다. 자격 없다. 그녀는 중얼거렸다. 상처한 남자가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는 게 당연한 거다. 열 살도 넘게 나이 차 나는 어린 계집애가 그 일에 함부로 토를 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거다. 가끔은, 적당한 현실감 상실이 도움이 되는 때도 있는 법이건만, 불행히도 상향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피가 몰리도록 입술을 깨물고, 둔탁한 발소리를 울리며 옥상에서 내려왔다.



문학 수업 말고도 수업은 자그마치 두 시간이나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두 시간동안 상향은 우선은 교과서를 향해 고개를 숙인 채 더없이 굳어진 얼굴로 끊임없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냥 화가 나기만 한 것은 또 아니었다. 화가 난 한 편으로 서글프고 마음이 아프면서도, 어쩔 수 없이 역정이 솟구치고 심사가 뒤틀리는 것이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손 끝에서, 애꿎은 샤프펜슬의 심만 몇 번이나 부러져 나갔다. 그래도 결국은 화가 났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론은 그것이었다. 쿨하지 못하게 이미 5년 전에 죽어 없어진 사람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었다. 제 아무리 아니라고 이 악물고 고개 저어 보아도, 결국 그런 식으로밖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질투를 하고 있다는 그것 이외에는.



지겹던 수업도 모두 끝이 났지만 상향의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어쩌면, 수업이 마칠 때쯤을 기다려 그가 교실 뒷문쯤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생각도 잠시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괜시리 빨라지려는 걸음을 일부러 몇 번쯤 늦추었지만, 결국 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자신을 쫓아오는 발걸음 같은 것은 그런 그녀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느껴지지 않았다. 하기야. 상향은 스스로를 비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신경이나 쓰겠어? 수업 듣는 많고 많은 여자애들 중 하나일 뿐인데. 내가 뭐라고. 도대체, 내가 뭐라고.
더없이 현실적인 생각이기는 했다. 그러나 떠오른 생각이 현실적일수록, 그래서 제 나름의 설득력을 지닐수록 상향은 우울해졌다. 싫어, 이런 것. 흘러내린 가방 끈을 고쳐 메는 서슬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가슴살 위로 매끄러운 교복 블라우스가 스치는 느낌이 들자 그녀의 자괴감은 극에 달했다. 난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러고 집을 나온 걸까. 3류 포르노 비디오에서처럼, 아무도 없는 학교 교무실에서 윗옷이라도 벗어붙이고 유혹해 볼 속셈이기라도 했던 걸까. 신경도 쓰지 않을 텐데, 나 따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무슨 마음을 먹는지 따위, 그 사람은 신경도 안 쓸 텐데.
이미 날은 후끈히 더웠다. 빠른 걸음 탓에 이마와 목덜미 위로는 끈끈한 땀이 배어 올랐고 덕분에 불쾌지수는 극에 달했다. 이래저래 지치고 화가 나, 그녀는 망연히 그 자리에 발을 멈추어 버렸다. 오늘 아침, 내가 어쩌면 너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의 얼굴이 생각날 때까지.



“벌써 마친 거야?”
요행히 기억해낸 오피스텔의 주소로 찾아가 보았으나 그는 집에 없었다. 약속을 정해 둔 것도 아니었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말을 들은 것도 아니면서 불쑥 찾아왔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럭 짜증이 났지만, 이대로 고스란히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갈 수 있는 다른 곳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녀는 오피스텔 복도에 초조하게 기대어 선 채 언제 올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려야만 했다. 핸드폰을 꺼내 평소엔 하지도 않던 게임을 시작하고 20분도 더 지난 시간에, 한 번 밑으로 내려갔다 올라온 엘리베이터의 문 속에서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요즘 고등학생들은 자습 같은 것도 안 하냐? 우리 때는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가는 날은 토요일 뿐이었는데.”
“쨌어요.”
상향은 불퉁해진 채 대답했다. 아무래도 버릇인 듯, 특별히 어지럽혀지지도 않은 집 안을 이리저리 정리하던 그는 그 말에 잠시 손을 멈추고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가씨, 지금 그거 자랑이야?”
“아저씨는 학교 다닐 때 자습 짼 적 없어요?”
“있기야 있었지만.”
그는 한참동안이나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천천히 눈을 돌렸다.
“집에 거짓말하고 외박한 다음날 자습 째고 놀러가는 짓까진 안 해 봤는데.”
“......”
상향은 말없이 입을 삐죽거렸다. 틀린 말이 아니어서 토를 달기도 힘들었다. 그녀는 가방을 던져 놓은 뒤, 제법이나 요란하게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러는 아저씨는, 어디 갔다가 이렇게 늦게 와요? 사람 기다리게 해놓고.”
“올 줄 알았으면 안 나갔겠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들어와 기다리지 그랬니? 문도 안 잠궈놓고 다니는데.”
“에?”
상향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아저씨 문 안 잠그고 다녀요?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구.”
“들어봐야 훔쳐갈 것도 없으니 뭐.”
그는 태평스레 말했다. 상향은 눈을 둥글게 뜬 채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 사람에게 깃들어 있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유라는 것은 어딘가 이 세상 사람의 그것 같지 않은 데가 있었다.
“그래, 웬일이지?”
커피 줄까?라고 그는 물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상향에게서 등을 돌려, 커페 메이커 속에 필터 한 장을 깔고 그 속에 커피를 떠넣으며 그는 물었다.
“싸우기라도 했어? 선생님이랑.”
상향은 빳빳이 고개를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혹시 사설탐정 같은 것일까 생각이 들 만큼, 그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오늘 아침도, 그리고 지금도. 그는 흥미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이 내지른 그 말이 상향의 얼굴에 어떻게 먹혀들어가는지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상향은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싸움이란 거, 상대가 돼야 하는 거지.”
사실이었다. 오늘의 일, 그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냥, 가르치는 학생 중에 참 이상한 녀석이 있더라 정도에서 그치고 말지 않을까. 그런 거라면 싸움이 될 수 없다. 그녀는 생각했다. 싸움이란 건, 양 쪽의 기억이 같을 때만 성립이 가능한 말인 거다. 사랑이 그러하듯이. 이런 식으로, 한 쪽에서만 가슴을 치며 입술을 깨무는 건 싸움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그래?”
그 한 마디가 그에게 상당한 흥미를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부글부글 물이 끓는 소리를 내며 커피 메이커가 커피를 뽑아내는 동안, 그는 예의 그 찬찬하고도 차분한 태도로 조용히 걸어와 상향이 앉아 있는 맞은 편 소파에 몸을 내려놓았다.
“네가 그 선생님의 상대가 못된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 선생님이 네 상대가 못된다는 말인가? 어느 쪽이지?”
“......”
갑자기 벌컥 짜증이 나 상향은 눈에 띄게 미간을 찌푸렸다. 별로 깊은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일부러 말을 돌린 것이었는데, 그 속에서까지 저런 낌새를 맡아 내다니. 여전히 재미있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

list       

prev [수필] 부활절 - 정연숙 admin
next [연재소설] time to remember (12) - 박미정 admin

Copyright 1999-2017 Zeroboard / skin by kimamore.com

회사소개  |  지역소식  |  시사  |  인물탐방  |  문화  |  공지사항  |  게시판  | 사이트맵

주소 :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57 사조빌딩 223호
경북신문사 대표전화 :02-365-0743-5 | FAX 02-363-9990 | E-mail : eds@kbnews.net
Copyright ⓒ 2006 경북신문 Corp. All rights reserved. 등록 서울 다 06253 (2004.2.28)